여강의 글A(창작수필)

이름의 인간사

如岡園 2006. 11. 19. 09:31

 인간사회에는 개념을 대표하고 사물을 구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름이 있다. 허공에 떠 있는 작은 별에도 이름이 있고, 숲 속에서 노래하는 산새, 돌아보는 이 없는 외로운 초원에 피는 꽃에도 이름이 있다.

 이름은 실체의 그림자다. 이름을 통하여 사물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름을 통하여 그 존재 가치와 자리매김까지를 하게 된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역시 이름 석 자인 것이다. 이름을 두고 생긴 속담 격언을 보아도 이름의 중요성이 깨달아진다. "사람은 죽으나 이름은 남는다", "생명을 빼앗기는 일은 있어도 이름을 빼앗기는 일은 없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개에게 악명을 붙이는 것은 이것을 교살하는 것과 같다", "꼴 보고 이름 짓는다", "이름 좋은 하눌타리"...

 귀여움을 많이 받는 아이일수록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명예)을 떠나면 근심이 없다.

 

 그리하여, 이름에는 흔히 역할에 대한 기대나 상징성을 담게 마련인데, 서양에서 그리스인은 개인의 행동을 기념하여 이름을 짓거나 인상, 인품을 좇아 이름을 지었고, 로마인 역시 행위나 공적에 연유한 이름 짓기를 좋아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도, 태어날 때의 사정이나 신체적 특징에 좇아 이름을 짓는 것이 상례인 것은 우리와 사정이 같다. 이름의 상징성을 너무 신비화할 때, 소위 성명의 미신이라는 것도 생겨나지만, 아무튼 이름은 한 존재의 진로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나 이제나 이름을 함부로 지어 부르기를 꺼려, 그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중요시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름에도 역사가 있다면 혹자는 "그게 뭐...." 하겠지만, 역대 소설책, 역사서, 근현대 인물사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두루 섭렵해 보아도 불리는 이름이 참으로 많이 변했구나 싶고, 특히 한 40년 교편생활 속에서 출석부 이름을 접하다 보니, 40년 전 출석부 이름들과, 지금의 출석부 이름들에는 큰 간극이 있구나 싶기도 하여, 여기 이름의 인간사를 글로 쓰고 있다.

 南解次次雄, 阿達羅尼師今, 乙巴素, 斯多含, 甄萱, 解慕漱, 解扶婁... 이런 이름들은 비록 한자로 기록 유전되고 있으나, 모두 배달겨례가 쓰고 있었던, 뜻을 가진 이름을 그대로 음차(音借)한 것일 것이고, 문자생활이 한문으로 본격적인 정착을 하고 나서부터는, 한자 의미의 이름이 생겨났겠지만, 그것은 특정인들에 국한되었을 것이고, 태반의 민초들의 이름에서야 제멋대로 붙여 불리었을 것이다. 작대기처럼 길다랗다고 '작지'이고, 둥글목같이 생겼다고 '둥구리'이었겠지만, 먼 시대의 일은 기록된 자료를 통하여야만 하기 때문에 밝힐 재간도 없고 지면도 허용되지 않아 접어 두기로 한다.

 지명에 대한 연구는 일부 어학 전공 학자들에 의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된 걸로 알고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중심으로 이름의 변천사를 연구해 봄직도 하지 않겠는가.

 8.15 해방을 전후한 약 100년 시기를 두고 이름의 변모 양상을 짚어 보면, 우리 언어문화의 변동이 한 눈에 들여다 보인다. 아니래도 이 시기는, 한문화, 일제 침탈, 민족문화 창달, 세계화가 소용돌이치며 바뀌어 돌아가고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씨할 아이라고 '씨동이'이고, 바위처럼 튼튼하게 자라라고 '바우'이며, 너무 안을 받아 얼러 키우지 말라고 '개똥이'이고, 경기(驚氣)를 자주하여 광주리에 담아 시렁 위에 올려 놓아 길렀다고 '광어리'이다.

 손가락이 열 아닌 여덟만의 아이는 '팔손이'이고, 딸을 그만 낳으라고 '고만딸', '끝딸', 아가 아가 하다가 '아기'가 이름이 되고, 외가집에서 낳았다고 '외숙이 외순이'가 이름이 되었다.

 이웃집 박첨지가 마을 건너편 밤나무에서 밤 따는 손주 놈을 보고, "고만 따라아 - ! (밤을 그만 따라)"고  외치는 소리에 딸 그만 낳으라고 이름 지어진 뒷집 '고만딸'이란 이름의 아이가 "예- !" 하고 대답했던 일화는 허구가 아니라 실화였다.

 이런 이름들은 호적부를 정리하면서 시동(時東), 석돌(石乭), 개동(介童), 팔손(八孫), 말달(末達), 악이(岳伊), 고만달(古萬達)로 정착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英子, 文子, 今子, 花子, 菊子, 順子 등 '子'자 의 전성시대가 오고, '英'자 '雄'자가 남자 이름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이른바 우리말 쓰기의 열풍이 불어 이름에서까지 혁명이 오는 듯도 했다. 봄비, 참빛, 나래, 단내, 슬기, 다솜, 달래, 봄볕.... 그러나 순수 한글 이름에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에는 개체의 변별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개성을 드러내고 상징적 의미가 있어야 하며, 운로까지를 개척해 가야 할 의미를 실어담고, 성취를 위한 잠재력까지를 가늠하고 싶은 기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언어적 진폭을 제한해 버리면 다변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서양 바람이 불어닥치고부터는 미라, 애리사, 매리, 카나리아, 유리같은 이름도 등장하였지만, 자칫 애완동물의 이름과 혼선을 빚을 우려에서인지, 그것도 한동안의 유행일 수박에 없었다.

 아무튼, 사람의 이름은 인간사의 물결을 타고 생성 변형 창조의 과정을 밟아가며 다양성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한 인간적 개체를 두고 무엇으로 불러야 하고, 그 이름에 값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우리들 인간의 고뇌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람살이의 한 모습을 대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가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 갓난 어여뿐 병아리며 강아지에게 이름이 없듯이 / 아가도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 새벽이라 밤이라 어스름저녁이라 / 허구 많은 글자 속에 찾고 또 찾았건만 / 아가를 부를 아가처럼 귀여운 글자가 없습니다 // 하늘의 별밭 바다 속 진주의 더미 / 머나먼 나라에서 처음으로 보내온  / 파란 새 흰 꽃의 이름을 모르듯이 / 아직 우리 아가 이름을 모릅니다."

 어느 시인의 "아가에게"라는 시다. 이름은 사람의 그림자이니, 소중한 존재를 불러 줄 이름이 정해지는 망설임이 묻어 있는 시가 아닌가 한다.

 

 본명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이름의 세계도 있다. 어떤 이름을 걸고 자기가 구축한 세계에 대한 호도(糊塗)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또 어떤 이름세계의 변신일까? 익명이나 또 다른 이름을 즐기는 심리의 기저는 어디에 있을까?

 세계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이름의 노출이 행위를 제한하고, 거추장스러운 경우도 있을 것이고, 다른 새로운 이름을 내걸고 어떤 정신세계를 펼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명(兒名)이 있고 자(字)가 있고 호(號)가 있고 요즈음에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이름도 있는 것이 아닌가!

 名不虛傳 ! 이름은 헛되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기발한 이름을 창안하는 데 고심할 것이 아니라, 이름에 값할 만한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명명(命名)이 가장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다.  ( 同人誌 <길> 6호, 2006.9.30 )

 

                                                   如 岡    金   在  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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