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개나리가 많이 피었군/ 꽃중의 꽃/ 모주,모주망태/ 내 코가 석 자

如岡園 2007. 4. 13. 00:34

         # 개나리가 많이 피었군

 권력자에 빌붙어 아첨하는 무리들을 두고 '개나리가 많이 피었군' 하고 비꼬는 말이 생겨났다.

 개화기의 선각자요 왜정 때 기독교청년회 회장으로 민족의 지도자였던 월남 이 상재 선생은 날카로운 풍자로 사람의 폐부를 꿰뚫는 많은 교훈을 남겼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유머에 차 있었다.

 그가 어느 자리에 이 완용을 면대하여 말하였다. "대감! 일본으로 가십시오. 대감이 계셔서 조선이 망했으니 일본이 망해야 우리가 독립이 될 것이라, 그러니 대감이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또 한 번은 조선사람으로서 일본 총독부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 들어서면서 마치 준비나 하였던 것 같이, "이크 신이화(莘荑花)가 많이 폈군!" 하였다. 신이화란 본디 목련을 가리킨 말이지만 흔히는 봄에 일찍 피는 개나리를 이렇게 부른다. 그러니 이 말은 "개나리가 많이 피었군!" 하는 말이 된다. 둘레의 사람들은 한참만에야 이 말의 뜻을 깨닫고 어이없어 속으로들 웃었다. 신이화란 개나리요, 왜놈 밑에서 벼슬을 하니 '개 나으리'라는 말이 되고 개와도 같이 비열한 나으리들이 많이 있다 라는 뜻이 된다.

 그가 또 어느 자리에서 연설을 하기를, "65세의 청년 이 상재는....." 하였다. 모두들 웃으니까, "내가 청년회장인데 회장이 청년이 아니면 어떤 놈이 청년이란 말이냐?" 하여, 한국 사람의 조로증(早老症)을 빈정거리기도 하였다.

 한 번은 형무소에 갇혔다가 풀려 나왔는데 길에서 만난 제자가 인사를 하였다. "선생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대답은 않고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넨 지금 호강을 하고 있는 셈인가?" 했단다.

 그의 날카로운 구변이 대충 이와 같았다. 바야흐로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고 있는 오늘의 봄날, 정가나 관변에서도 '개 나으리'가 많이도 피고 있겠지....

 

          # 꽃중의 꽃(花復花)

 '꽃중의 꽃 무궁화 꽃'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지만 그것은 근래에 와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고, 꽃중에 좋은 꽃은 목화꽃이다.

 조선조 21대 영조가 늙어서 상배를 하고, 환갑이 넘은 분이 다시 장가 가겠다고 하여 간택을 하였다.

 처녀들은 예에 의하여 아버지의 벼슬과 이름을 써 붙인 방석 위에 앉게 되어 있는데 한 처녀만이 그 방석을 비껴 방바닥에 앉아 있다. 까닭을 물으니까, "아무리 종이일지라도 아비 이름 쓴 것을 어떻게 깔고 앉겠습니까?" 하였단다. 왕은 그 처녀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

 그 다음에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꽃중에 좋은 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모두 모란이니 함박이니 월계니 하고 대답하는데 그 처녀는 "목화 꽃이올시다." 한다. 까닭을 물으니, "그 꽃이 아니면 만 백성이 헐벗습니다." 하였다. "반찬 중에 제일 좋은 반찬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소금이올시다. 모든 반찬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때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이 전각의 기와골이 몇이겠느냐?" 하였더니 처녀들은 모두 고개를 쳐들어 빗줄기를 세는데 그 처녀만은 다소곳하니 세는 기색이 없기로 물었더니 꼭 알아 맞힌다. 그 사이 빗줄기가 떨어져 패인 자리를 살폈던 것이다.

 이리하여 왕비로 뽑힌 처녀가 김 한구의 따님인 정순(貞純)왕후로 숙덕을 높이 찬양 받는 분이다.

 영조의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가 <花復花 - 꽃 위에 다시 꽃 피는 것>로 제목을 내어 조관들을 시험하였더니 채 제공(蔡濟恭)만이 그것을 맞춰 냈다고 하는데, 그는 뒤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 시절에도 실용성이 존중되었던 일화이기도 하다.

 

          # 모주(母酒), 모주꾼, 모주망태

 술에 중독되었달까 술 없이는 못사는 사람을 모주꾼 또는 모주망태라고 별명지어 부른다. 그런데 진짜 모주는 그것이 아니다. 약을 넣지 않고 순 곡식과 누룩으로 술을 담가서 먹던 시절, 서울에는 곧잘 모주집이 있었다.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뜨끈뜨끈하게 끓여낸 것이다. 입김이 허옇게 서리는 추운 새벽, '모주 끓었소' 하고 외이면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해장 겸 아침 겸 모여들 든다. 물론 값도 어지간히 싸다.

 그런데 모주를 어미 모(母)자를 넣어서 쓰는데 대해 이렇게들 설명하고 있다.

 조선조 15대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 비록 계모일지라도 어머니는 어머니겠는데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궐에 유폐하는 폭거를 하였다. 그리고 대비의 어머니 노씨도 제주서 귀양살이를 10년이나 하였는데 생계를 이을 도리가 없어 재강(술 지게미)을 사다 끓여 팔아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역시 생계를 이을 길로 술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서울 대가집 솜씨로 약주를 만들어 파니 섬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 들었더란다. 약주가 떨어지면 그 나머지라도 맛보자고 졸라, 하는 수 없어 막 걸러서 팔아서 막걸리가 되고 그 지게미를 다시 끓여서까지 팔아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 내 코가 석 자(吾鼻三尺)

 지금 내 처지가 급하게 되어 남을 동정할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흔히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을 쓴다.

 신라시대 김 방이라는 사람이 있어 형제가 살았는데 동생은 부자이나 형 방이는 가난하여 빌어먹다가, 누가 땅 한귀통이를 주어 농사를 지으려고 아우에게 씨앗을 얻으러 갔더니 심술궂은 아우는 씨앗을 모두 쪄서 주었다.

 방이는 그것도 모르고 심었는데 오직 한 그루만이 나서 커, 한자 길이나 넘는 이삭이 달렸다. 진기하여 주야로 지키는데 하루는 새가 와서 짤라 물고 달아난다. 좇아가다가 날이 저물어 새가 들어간 돌 틈서리에서 밤을 나게 되었다.

 그런데 붉은 옷을 입은 여러 아이들이 나와 노는데 금방망이로 두들겨 술과 음식을 내어 먹고 즐거이 놀다가 새벽녘이 되자 그 방망이를 바위틈에 꽂아두고 헤어지므로 방이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큰 부자가 되었다.

 이 말을 듣고 동생이 저도 그렇게 되려고 그곳에 갔다가 도깨비들에게 붙잡혀 코를 석 자나 잡아 뽑혀 코끼리 코처럼 되어 돌아왔다.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은 이런데서 연유된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