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落穗

푸른 도시 呼和浩特 왕소군의 무덤

如岡園 2007. 9. 5. 10:28

 외국 여행에서 몽고는 그 풍경의 황량함에도 불구하고 매력이 있는 여행지임이 분명하다. 기마민족이 황야를 휩쓸고 다니며 중원을 노략질했던 활동의 무대여서 역동감이 있었고,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아심에 호기심까지 겹쳐 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곳임으로 해서이다.

 15박 16일의 마라톤 여행 일정에서 몽고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일행의 일치된 의견이기도 했던 것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여행이었으니 굳이 국경을 넘어 외몽고로 이동하느니 내몽고로 만족하자고 작정을 하고 북경에서 호화호특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1993년 7월 11일 저녁이었다.

 

 기상의 악화로 북경 공항에서 오랜 대기 끝에 호화호특 비행장에 내렸을 때는 밤이 깊었다. 먼 길은 아니었지만 마음으로는 지구의 아주 낯선 곳으로 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의외로 황사의 발원지로 허허벌판 삭막한 사막의 가운데려니 생각했던 호화호특은 불빛도 휘황찬란한 짜임새 있는 대도시였다. 그야말로 다른 중국의 대도시들과 어금버금한 규모를 제대로 갖춘 도시로 내몽고자치주의 거점도시였던 것이다.

 외화벌이로 눈독을 들이는 현지인들의 설왕설래 끝에 투숙한 곳이 '내몽고반점'이었다. 규모는 번듯해도 허술한 면이 역연한 호텔에 투숙한 이튿날 몽고인들의 생활의 진면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목민 마을 빠오촌으로 향했다. 만리장성 외각의 거점도시 호화호특 시내를 벗어나기가 바쁘게 몽고 벌판의 황량함이 시야에 와 닿았다. 메마른 구능지대며 지표면에 물기 하나 없는 벌판을 먼지를 뒤집어 쓰며 고물 소형 전세버스는 한량없이 달렸다. 어쩌다 유채꽃과 꿀벌통과 멋없는 미루나무가 도열한 도로 연변엔 원주민의 흙담 움집이 간혹 눈에 띄여 이런 곳에도 역시 사람이 살고 있구나 싶어 안도하곤 하였다.

 武川을 지나 외몽고와의 국경지대가 가까워질수록 황량한 벌판은 끝없이 넓어져 사방은 아득한 지평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행의 승합버스가 달리는 한줄기 폭좁은 비포장 도로만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는 몽고 벌판, 황야의 군데군데를 야생마가 떼지어 질주하는 풍경에 접하면서 기마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국경에 접한 촌락도시 百靈廟에 미처 이르지 못한 빠오村이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기존의 작은 마을에 몽고의 관광객을 위한 빠오가 여러 채 늘려 있어 이방인의 눈길을 끌었다. 방목하는 토종 돼지와 양들이 풀을 뜯고 흙을 뒤지고 있었고, 호사가를 위한 조랑말이 끄는 수레와 낙타를 타고 유목민과 대상의 역사를 더듬기도 했다. 손님을 환대하는 풍습에 따른 원주민 복장의 남녀가 불러주는 권주가에 곁들여 '아이락'이라고 하는 馬乳酒를 마시고 통째로 삶아낸 양고기를 포식하는 것으로 그네들의 식사에도 접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이드를 졸라대어 일정에도 없는, 그 예의 흙벽집으로 취락을 이룬 몽고인 마을을 들렀다. 이방인을 보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웅기중기 모여드는 원주민의 아이들, 아뿔사! 1940년대 아니면 20세기 초엽의 우리네 시골, 우리네 아이들,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발견한 듯하여 코끝이 찡하였다. 가위로 삭발한 머리엔 부스럼이 나 있었고 얼굴에는 마른버짐, 들여다 보진 않았지만 엉덩이엔 어김없이 몽고반점(蒙古斑點)이 찍혀 있었으리라. 개인적으로 준비해 간 쵸코렛이며 캔디 검 등의 선물을 몽탕 털어 주면서 좀더 많이 가져가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였다.

 발길을 되돌려 호화호특에 돌아왔을 땐 마치 꿈속을 헤매다가 돌아온 듯하였다.

 

 시내에 있는 내몽고박물관을 보고자 하였으나 퇴근시간이 지나 문이 닫혀있어, 대신으로 찾아간 곳이 청총(靑塚)이라고도 일컫는 왕소군의 무덤이었다. 시내에서 9킬로미터 떨어진 호화호특 근교에 있는 한나라 여인의 한이 서린 무덤이다.

 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원제 때 귀주 사람 왕양의 딸이다. 그는 열 일곱살 때 漢元帝의 궁녀로 뽑혀 궁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는 수많은 궁녀들이 있어 황제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얼굴 한 번 바라보지 못하고 평생을 늙어가는 궁녀들이 대부분이었다. 왕소군도 그 많은 궁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궁녀를 간택하여 황제께 올리는 절차의 모순으로 인하여 때로는 천하 제일의 미인일지라도 간택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궁녀 간택의 방법이란 것이 황제가 그 많은 궁녀들을 일일이 접견할 수가 없어 궁중의 화가로 하여금 모든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올리게 하고 그 초상화를 황제가 보아 마음에 드는 미인을 낙점하는 것이었는데, 궁녀들이 화가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폐습이 있었다.

 그러나 뛰어나게 아름다운 자신의 용모를 믿었던 왕소군은 누가 뭐라 해도 뇌물을 내어 놓지 않았다. 왕소군의 초상화를 담당했던 모연수는 그러한 왕소군이 오만하게 여겨졌다. 그리하여 간악하고 요사한 모연수의 붓끝이 천하제일의 경국지색(傾國之色) 왕소군의 얼굴을 추녀 중의 추녀로 그려 황제께 바쳤다. 추한 용모가 황제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 왕소군은 영원히 황제의 은총을 받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땅을 치고 하늘을 원망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왕소군은 유월 염천에 서리가 맺힐 원한에 몸을 떨며 비통에 젖은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다.

 왕소군의 더욱 기구한 운명은 그 다음부터 찾아왔다. 북방 변경을 위협하던 흉노의 우두머리 單于가 한황실(漢皇室)에 장가를 들겠다고 요청해 온 것이다. 황실에서는 못마땅했지만 변방 무마책의 일환으로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元帝는 궁여지책으로 궁녀들의 초상화를 가져오게 하여 그 중에서 제일 못생긴 초상화 한 장을 골라 그를 單于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그 못생긴 초상화의 장본인을 불러 單于에게 시집을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초상화의 장본인은 궁중 최고의 절세가인이었던 것이다. 한원제는 그때서야 모연수의 간계에 속은 줄을 알았지만 흉노의 우두머리에게 한 번 허락한 일을 되돌릴 수 없어 모연수의 목을 베고 그 재물을 모두 몰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왕소군은 부득이 單于의 사신을 따라 갔는데 그 때 왕소군은 말 위에서 비파를 타며 원망의 노래를 불렀다.    

     黎菜芳葉元黃   (명아주 푸르러 무성도 한데 꽃다운 잎은 원래 누런 색이었다네)

     有鳥此處 集于苞桑  (새들은 그 속에서 깃들었다가 훨훨 날아 뽕나무 숲으로 옮겨 간다네)

 單于는 원제가 왕소군을 하사함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한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은혜에 감사하며 오랫동안 변방 침입을 금하였다.

 그 후 왕소군은 세달이란 아들을 낳고, 단우가 죽은 후 그 아들 세달이 흉노 왕위에 올랐는데, 오랑캐 나라에는 왕이 죽으면 그 자리를 계승한 아들이 자기를 낳은 어미를 다시 자신의 처로 삼는 천륜을 어기는 악습이 있어, 이를 거부하다가 세달이 말을 듣지 않자 왕소군은 이 어이없는 일로 인해 끝내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한다.

 왕소군이 죽자 흉노는 그 땅에 소군의 장례를 치루었는데 겨울이 되면 황량한 호지(胡地)의 풀이 모두 희게 말라버리지만 유독 왕소군의 무덤 풀은 마르지 않고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푸른도시 호화호특의 지명도 이에서 비롯되었단다.

 

 이런 왕소군의 무덤이 호화호특 시내 근교에 있었다. 후인들이 왕소군을 생각하여 사당을 짓고 그 묘정(廟庭)에 큰 잣나무를 심었는데, 둘레가 여섯 아름하고도 5척이나 되었으며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고대(故臺)를 뒤덮었다고 하지만 그 잣나무는 없었다.

 왕소군의 뜻을 기리는 글을 각인한 비대(碑臺) 뒤로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 웅대한 山峰이 그녀의 무덤이라고 하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비문에 새겨져 있는 董必武의 시 "昭君自有千秋在 胡漢和親識見亭 詞客各攄胸臆滿 舞文弄墨總徒勞(소군은 천추에 스스로 있다/ 호 한 화친의 드높은 식견/ 글쟁이 소군 가슴 감상문 써서/ 꾸미고 다듬어도 헛수고이다)"란 싯귀를 마음에 아로새기며 무덤에 비하여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사당을 참배하고, 잡목으로 뒤덮인 무덤 가장자리를 돌아 봉분 정상의 정자에 오르니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였다. 이름 그대로 푸른 도시 호화호특의 외각 들판을 조망할 수 있었으니 인공으로 쌓아올린 무덤임이 틀림 없었다.    (1993. 7) 

 

                                                                            여강 김재환의 산문집 <여강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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