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落穗

장춘의 마지막 황제 부의

如岡園 2007. 7. 27. 15:48

 길림성의 성도(省都) 장춘은 중국 동북부의 중심도시이다. 고구려의 옛 영토이기도 했던 이 지역은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의 무대이기도 했다.

 장춘이 오늘날 중국 동북부의 중심지가 된 것은 지금부터 180년 전 청나라가 산동반도로부터 이주민을 정착시키고 장춘부(長春府)를 설치하면서부터 비롯된다.

 봄이 긴 長春, 봄의 성도라 해서 春城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지만 왜정 때는 일제의 야욕에 희생물이 되어 만주제국의 새 서울이라 하여 新京이란 이름표를 달았던 비운의 도시이기도 하다.

 

 내가 장춘을 가게 된 것은 1993년 여름,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탐방하던 긴 중국 여정의 일환으로서였다. 7월 13일 홍콩에 기착하여 심천, 광주, 장사를 거쳐 동정호 저 멀리 호남성 대용시 장가계국가삼림공원의 호남비파계빈관에서 학회 행사를 끝낸 7월 18일이었다.

 심양에서 1박을 하면서 청태조 누르하치의 능묘가 있는 동릉(東陵), 제2대 황제 홍타이지의 능묘가 자리한 북릉공원을 답방하고, 심양을 출발하여 기차편으로 만주벌판을 달려 장춘에 도착한 것이다.

 장춘은 오늘날 중공업에서부터 융단 모피제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공업도시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나무가 많아 산림의 도시, 중국 최대의 자동차 생산공장이 있어 자동차 도시, 전통을 자랑하는 영화제작소가 있어 영화의 도시로 일컬어진다고 안내자는 자랑한다.

 아닌게 아니라 斯大林大街에 늘어선 포풀러의 흰 비단같은 씨가 바람에 날려 하늘을 떠다니는 풍경은 한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을 떠올리게 한다.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장춘 거리의 가로수 단풍과 낙엽을 소재로 한 수필이 나는 평생을 통하여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이국의 정서와 아울러 황금색 단풍과 지천으로 흩날리는 가로수 낙엽을 잔잔한 필치로 서정한 수필이었는데, 생면부지의 이국 도시 장춘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은 수필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데 막상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게 된 나는 그보다도, 이 도시와 관련하여 근대사에 대한 관심쪽으로 탐방의 촛점이 맞추어졌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의 관동군사령부가 자리한 곳, 만주제국을 설립하고 괴뢰황제 부의를 앞세워 일본이 야욕을 채웠던 곳, 따지고 보면 신경(新京)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위한 새 도읍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아시아 대륙 진출을 위한 새서울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마각을 호도한 희생양이 부의였다.

 자금성 황제궁에서 폐위된 부의는 천진의 일본 조계 시절을 거쳐, 봉천(심양)으로 가면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황제로 받들어질 것이라는 주위의 말을 믿고 봉천으로 갔다. 선조의 땅으로 돌아가 거기에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풀렸다. 적어도 예견되는 장래에, 제국은 있을 수도 없으며 수도는 봉천이 아니라 만주의 장춘에 세워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만주국을 일본의 공식적인 속국으로 삼으려 의도했던 일본의 계산에 의했던 것이다.

 장춘이 만주국의 수도로 정해진 것은, 장춘은 일본이 소유하는 남만주 철도의 북쪽 종점, 소비에트가 소유하는 동부철도의 남쪽 종점, 그리고 현지 회사가 소유하는 로컬선의 서부 종점이었고, 일본 조계의 한 구역이었으며, 장춘의 시민들 사이에 노골적인 적의가 적었던 때문이었다.

 만주 및 몽고인 독립선언서와 새로운 국기 도안이 문제였는데, 깃발은 하얀 바탕에 작은 장방형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 만주, 중국, 몽고, 일본, 조선 등 만주 5민족을 상징하는 5색 선이 들어있는 것이었는데 부의는 ,"이것은 대체 어떤 나라요, 대청제국이 아니지 않느냐?"고 분노하였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부의는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로 선언되어 세 번째로 황제자리에 복원되었는데 이것이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비극이 된 것이다.

 

 경북 영덕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어 1989년에 한국에도 한 번 다녀갔다는 조선족 3세의 안내자는 박학다식할 뿐더러 말재간까지 있어 장춘의 이곳저곳을 골고루 안내하며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안내로 일제 때의 관동군사령관 별장이며, 지금은 중국공산당길림성위원회가 들어선 관동군헌병사령부, 길림공업대학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장춘에는 1948년 해방 이래 27개 대학이 있는 동북지방 교육의 중심지라는 것, 시내에만 8백만 그루를 헤아려 시역의 30퍼센트가 녹화지구로 이루어진 삼림도시임을 강조하곤 한다.

 길림성 박물관을 견학하는 김에 부의가 만주제국 괴뢰황제로서 처량한 지위를 누렸던 왕궁을 관광했다. 이름마저도 위황궁(僞皇宮), 괴뢰황궁이었다.

 일본제국의 계책에 의해 만주국의 황제에 오른 부의의 만주시절이 영광스러울 수는 없었다. 타타르인인 선조의 땅에서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부의의 꿈은 일제의 야욕에 무참히 짓밟혔던 것이다.

 공포와 증오로부터 침묵한 장춘의 시민들이 부의에게 돌리고 있는 차가운 환영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급히 날조한 한 채의 저택으로 들어가 그로부터 한 달간 그 곳이 부의의 집행부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러시아인이 세운 또 다른 지저분한 건물로 밀려났다. 그 곳은 과거에 소금의 전매를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비꼬아 말한다면 소금창고가 대청 황제의 황궁이 된 셈이다. 이 높은 담으로 둘러쳐진 넓은 부지 내의 둥그런 지붕의 큰 벽돌조 건물에서 부의는 14년간을 보내고 그를 위해 세워진 보다 큰 신궁전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한다.

 일본인들과 원만하게 잘 해나간다면 황제의 지위를 되찾는 일에 그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의, 그런 부의에게 선전포고권과 행정 입법 3권이 형식적으로 부여되긴 했었다. 그러나 입법 부분만 하더라도 일종의 의회가 설치되었으나 의원은, 물론 공선(公選)이 아니라 위협 또는 매수에 의해 탄생된 만주의 일본인 독립운동조직에 불과했다 한다. 통치과정 역시 만주국 황제인 부의를 전혀 거치지 않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국무원 총무청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하니 부의는 가히 괴뢰황제라 할 만하다.

 그런 부의,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살았던 위황궁을 눈앞에 접했을 때 또 다른 심정에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 곳에서 11년 이상이나 만주국 황제로 있으면서 일본에 잠시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녹색 지붕의 추악한 제궁(帝宮)에서 거의 한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부의, 나가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고 최초에 가졌던 청조 황제로 복귀할 가능성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니, 비록 만주국 궁정에 살면서 일반 만주인과 같은 궁핍에서 제외되었다는 특권적 소세계였다 치더라도 일종의 산 송장이나 다름없을 바에야 그런 황제면 무엇에 쓰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닉하게도 그 위황궁과 길림성박물관 사이에 영화 <마지막 황제>의 촬영 현장이 있어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곳은 부의의 황후 완용을 위해 일본이 지어준 저택이기도 했던 곳이다. 아편쟁이가 되어버린 황후 완용,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측실 문수 담옥령 이옥금으로 분장한 캐스트들이 세트가 아닌 실제의 이 건물에서 촬영됐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는 현장의 맞은편 벽면에 걸린 '모택동동지만세'라는 대형 현수막이 을씨년스럽고 어색하여 밖으로 나와버렸다. 차라리 지는 햇살에 실루엣으로 나타난 둥그런 위황궁의 돔을 핸디캠으로 촬영하는 것으로 마지막 황제를 회억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나를 한없는 상념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장춘은 연변 연길을 탐방하고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돌아오는 길에 또 한번 들르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용정과 연길 백두산을 관광하고, 내친 김에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중국과 북한을 다리 하나로 국경선을 긋고 있는 圖們을 관광하는 바람에 연길에서 밤기차를 타고 사흘만에 다시 장춘으로 왔다.

 장춘 역에 내렸을 때는 아침 6시, 특쾌연와(特快軟臥)의 부드러운 침대칸이긴 해도 밤새도록 만주벌판을 기차로 달려왔으니 일행 모두가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은듯한 몰골이었지만 장춘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에 희색이 만면하였다. 그만큼 장춘은 일행을 끌어들인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아침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 승리공원 앞 광장에서 양거리춤을 구경하게 된 것은 또한 큰 볼거리였다. 아침운동을 겸한 놀이인 듯, 중년의 남녀가 심양에서 본 그 예의 깃털부채를 손에들고 자유스럽게 원형을 그리며 3박자의 단조로운 리듬에 맞춰 원무를 하는 춤이다. 구경하는 관광객들도 끌어들여 가르쳐 주기도 하여, 보는 사람이나 춤추는 사람이나 한결 흥취로운 모습이어서 나는 장시간에 걸쳐 비디오 카메라에 수록하였다. I대 W교수는 유독 젊은 부녀자와 어울려 춤을 추는 바람에 나의 놀림감이 되어 주었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전통을 자랑하는 영화촬영소 역시 장춘에서는 볼 만한 것이었다. 자금성 곤녕궁과 양성전의 황제 황후의 침실을 셋팅으로 사극을 촬영하는 일이 이루어졌고, 북경거리, 일제 침략기의 헌병주재소가 가설되어 있어 제법 그럴듯한 사진 촬영감이었다. 한켠에선 일본 헌병 짚차에 기관총까지 설치하여 관광객이 공포탄을 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중국인 주점거리로 꾸며진 홍등가엔 간드러진 노랫가락이 흘러 100년 전의 세월로 되돌아간 듯했다.

 

 봄이 길어 장춘(長春)이라지만 연중 최저 기온 섭씨 영하 38도에서 최고 기온 섭씨 영상 38도라니 한서(寒暑)의 차가 극심한 장춘, 그래서 장춘은 봄이 길었으면 하는 소망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1993. 7)

                                                                                  여강 김재환의 산문집<如岡散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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