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田) 조림
조선조 말의 정치가로 어 윤중(魚允中)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개화기에 처해 국고를 정비하고 경제를 바로 잡으려 무던히도 애쓰던 성실한 행정가였건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직 내각이 허물어졌을 때, 각원의 한 사람으로 군중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그가 탁지부(度支部) 대신으로 어찌나 예산을 깎고 깎아 긴축 정책을 쓰든지 당시의 사람들이 魚允中의 성자 '魚'를 거두절미(去頭截尾)하여 밭 전(田)자를 만들어 '田 조림'이란 별명을 지어 불렀던 것이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이런 분이 몇분만 조정에 섰던들 그 꼴은 안되었을 것이다.
당시 별명 지어 부르기로는, 유길준이 국한문 혼용을 시작하여 모든 공문에 '이리이리 홈'이라는 문투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하여 '유홈'이라고들 불렀었다.
시대는 아주 떨어지지만 최남선이 줄곧 메투리를 신고 동분서주하였다 하여 '최 미투리', 주시경은 매일 교재를 프린트하여 뭉퉁이로 들고 다니며 가르쳤다 하여 '주 보퉁이', 원영의는 짚고 다니는 단장을 그대로 교실로 가지고 들어와 교편(敎鞭)으로 쓰는데, 국운을 생각하여 감개하든지 하면 그것으로 교탁을 치며 호령하였기 때문에 '원 몽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한다.
모두가 나라의 역군으로서 길이 남을 분들이다. 이 시대는 이제 어떤 별명의 인물이 생겨날지 모르겠다.
# 공당문답(公堂問答)
조선조 초에 호를 고불(古佛)이라고 하는 맹사성이라는 정승이 있었다. 청렴하고 소탈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이기도 하다.
맹사성이 한번은 고향인 온양에 다녀오는 길에 용인의 원(院)집- 院이란 관에서 경영하던 숙박소-에 들었는데 호화로운 차림을 한 영남 선비와 같이 쉬게 되었다. 녹사(錄事)라고 정부의 최하급 관리에 취직하려고 취재(取才)-요새말로 테스트-차 가는 길이라 한다.
그와 같이 수작하던 끝에 '공'字 '당'字로 운(韻)을 달아 문답을 하기로 하였다.
"어째서 서울 가는공?"
"녹사 취재하러 간당."
맹정승이 웃으며
"내가 당신 위해 녹사 시켜 줄공?"
하였더니
"놀리는 건 안된당"
물론 상대가 정승인 줄은 모르고 한 대꾸다.
며칠 뒤 맹사성이 정부에 있으려니 그 영남 선비가 과연 취재차 들어오므로
"요새 어떠한공?'
하였더니 영남 선비가 그를 알아보고 엎드리며
"죽여지이당" 하였다.
그래 한 자리의 관원들이 모두 놀라 물었더니 그런 연유라, 좋은 자리에 붙여주고 돌보아 주어서 여러 고을 원을 거쳤는데 매우 근실하고 업적이 있어 나중까지 얘깃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예나 이제나 좋은 인연이란 이렇게 소중한 것이다.
# 비오는 날의 나막신
조선조 말의 비운의 정치가 김홍집을 두고 세간에서 하던 소리가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다. 김홍직은 25세에 과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39세에는 수신사로 일본 국내의 정세 파악과 병자수호조규의 뒷처리 문제로 활약하였다.
그러자니 자연 당초 대신중 가장 식견이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화를 반대하는 척사(斥邪)운동이 전개되어 대관들의 태도가 달라져도 그의 태도는 의연한 바 있었다. 미 영 독 여러 나라와의 수교에도 힘이 컸으며 개국 이래로 청 일의 세력 다툼 가운데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하였건만 그 때마다 그들은 김홍집의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계속 요직에 앉게 되고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별명도 그래서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혁신파에게도 수구파에게도 쓰이었던 때문에 대가 약한 인물 같이도 보이나 중도의 인물인 때문에, 또 식견과 외교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중용되었던 것이다.
일본이 희미해져가는 세력을 만회하려고 낭인들을 시켜 경복궁에 들어가 왕후 민씨를 시해하는 을미의 변을 일으키고 친일 내각을 세웠을 때 그 수반으로 뽑히었다가 아관파천으로 친로파가 정권을 잡자 거리에서 폭력배화한 보부상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 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애석한 일이다.
#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
조선왕조 초기에는 신흥의 왕운을 띠었다고 할까 자손들도 기걸차게 잘 나더니 후기에 가서는 어찌 그리 손이 귀하고 단명들 한지 이 역시 가운인지 모를 일이다.
태종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맏이가 양녕대군이요 둘째가 효령, 세째가 충녕 곧 세종대왕이요 네째가 성녕대군이다.
양녕이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 되는 태종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때문에 임금자리를 모피하고자 일부러 광패하게 굴어 여러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여론을 일으켜 폐세자를 당하게 되었다.
둘째 효령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일까 얌전하게 독서를 하고 있으려니 형 양녕이 들어와 발길로 차면서 "이놈 죽고 싶으냐" 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과연 그럴 일이라 그 길로 불교에 귀의하였는데 어찌나 북을 잘 두드리며 염불을 외쳤든지 쿠렁쿠렁하면서도 질긴 것을 '효령대군의 북가죽 같다'고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 자주 두 형을 청하여 동기의 정을 나누었다고 하는데, 양녕이 하루는 술 먹고 고기를 씹으며 효령 염불하는 자리에 나갔더니 충고 비슷한 소리를 하는지라 활개를 벌이고 춤을 추며 이렇게 외쳤다는 것이다.
"내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니 이 아니 즐거운가?"
양녕대군의 묘와 사당은 서울 영등포구에 있고 사당의 간판은 지덕(至德)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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