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돌이 추위
음력으로 시월 스무날은 예외없이 춥다. 이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 하고, 이 때 부는 바람을 '손돌풍'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강화도는 육지와의 사이가 염하(鹽河)라는 강너비만 밖에 안되는 수로로 가로막혀 있어 섬이란 명칭을 갖게 되었고, 이 조그만 물줄기가 오랜동안 몽고병의 침공을 저지하였다.
변란이 잦은 고려조의 일이라,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어느 임금이 초조하게 이 수로를 배로 통과하게 되는데, 손돌이라는 일등 사공을 길잡이로 세웠건만 점점 엉뚱한 곳으로만 이끌고 가는 것 같아 가뜩이나 불안하던 끝이라 그만 그 사공을 죽여버렸다. 그 죽인 곳이 지금의 '손돌목'이요 뱃길의 가장 험소(險所)라고 한다.
그런데 왕은 그의 유언대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 흘러가는대로 따라 행선하여 비교적 수월하게 인천 앞 바다에 나올 수 있었고, 그제사 그의 충성심을 알아, 죽인 것을 뉘우치고 후하게 제사 지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은 날에는 천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춥다는 것이 거기 얽힌 전설이다.
어떤 사람이 하필 시월 스무날이 제 아비 제사날이라, 무심코, "고놈 죽은 날은 만날 이렇게 춥다."고 하여 망발하였다는 얘기도 민간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다. (손돌이 고놈 죽은 날을 두고 한 말이지만, 그날이 하필이면 자기 아버지가 죽은 날이기도 하니 듣기에 따라서는 자기 아버지를 고놈이라고 한 것이 된다.)
# 사명당의 사처방
방이 몹씨 춥든지 하면 흔히 '사명당의 사처방인가?' 한다. 사명당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대장으로 활약하였고 전란 후 일본을 왕래하며 피납되어 간 민간인을 대량 데리고 오는 등 공로가 큰 스님이다. 명은 惟政 자는 松雲 호가 泗溟堂이다.
임진왜란은 민족적으로 얼마나 크게 적개심을 자극하였든지 이를 소재로 한 <壬辰錄>(또는 黑龍錄)이 여러 형태로 전해져 민간에 널리 읽힌 민족설화가 되었다.
민족의 기억에 새로운 여러 사람의 행적을 열기한 끝에 사명당이 일본에 들어갔을 때의 행적을 쓴 것에 이런 것이 있다.
그가 일본에 가서 신승(神僧)이라 하니, 어디 견디어 보라고 구리 방석을 만들어 물에 듸우고 거기 앉혀도 가라앉지 않고 또 구리로 한칸 집을 짓고 거기 들여보낸 뒤 사면으로 숯을 쌓고 불을 지피어 대풀무로 부니 구리가 녹아 흐를 지경이라 나중 문을 열고 보니 눈썹엔 서리가 앉고 수염에는 고드럼이 달려 있으며 "일본은 왜 이리 추우냐?"고 하여 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설화가 있어 방이 몹씨 춥든지 하면 "사명당의 사처방의 사처방인가 왜 이리 추워?" 하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 보호색 군복
조선시대 초기 세조 때 함경도에서 이 시애가 모반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구성군(龜城軍) 준(浚)으로 도총사를 삼고 허 종, 강 순 등으로 이를 도와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홍원 북청 싸움을 거쳐 만령 싸움에서의 일이다. 적은 높고 험한 영을 의지하여 완강히 항전한다. 대장 어 유소가 한 꾀를 내었다. 군사들에게 모두 풀빛 옷을 해 입혀 적의 눈을 속이고 접근, 높은 곳에 올라 소리치고 협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보호색 군복의 시초였다.
오늘날 육군의 군복 색깔은 카키색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영국이 해외 영토를 확장하느라 광분하던 당시 남아프리카의 토민과의 싸움에서 우연히 생긴 이름이다. 본래 영국 해군의 군복 색깔은 흰색이었다. 처음 해군을 상륙시켜 싸울 때 상당한 희생자를 냈었는데, 때마침 범람한 카키강을 헤엄쳐 건넌 뒤로 사상자 수가 부쩍 줄기에 그제사 보니, 해군의 흰 군복이 흙빛으로 물이 들어 주위의 풀이나 흙과 구분이 잘 안되기 때문인 것이 밝혀졌다. 그 후로 군복은 가키색으로 바뀌었다. 카키색은 곧 카키강의 흙색깔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보호색 군복에 대한 착상은 그것을 훨씬 앞지르는 것이 된다.
또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접는 부채는 처음 고려에서 착상하고 제조하여 중국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를 고려선(高麗扇)이라 하였고, 황실에서는 이 신기한 물건을 모본(母本)으로 하여 그 곳 직공들에게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 기록으로도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아이디어는 기발한 것이 많다. 이것을 조금만 발전시키면 훌륭한 발명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 녹두 장군
녹두 장군은 동학란의 전주 전투의 지휘자였던 전봉준의 체수가 조그맣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동학란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청 일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많은 일화가 생겨나곤 하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淸泡)장사 울고 간다."
이것은 당시 유행한 동요였는데 녹두는 물론 녹두 장군을 말한 것이고 청포는 녹두로 쑤는 것이지만 청나라를 말한 것으로 싸움의 결과를 예언한 것이라고들 한다.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어지나" 하는 것은 청일 두 나라의 최초의 대 접전을 말한 것이다.
또 갑오낙청(甲午落淸)이란 말도 유행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갑오년(1894년)에 청나라의 세력이 물러날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이 무렵의 사회적 불안을 틈타 <鄭鑑錄> 신봉자가 갑자기 늘고 十勝之地 피난처를 찾아 일신일가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소극적인 움직임이 매우 승하였었다.
# 노목궤(노木櫃)
조선시대 말엽 홍만종은 그의 저서 <旬五志>에 상당히 많은 민속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데 거기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촌 영감이 딸을 사랑하는 나머지 사위를 고르는데, 노목으로 궤를 만들어 쌀 쉰 닷말을 넣고 누구든 이 궤를 무슨 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속에 얼마의 쌀이 들어 있는가를 맞히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하였다. 알아맞힐 수가 없는 난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맞히지를 못하고 뒤통수를 치고 돌아간 뒤의 일이다. 그 딸년이 어찌나 시집이 가고 싶었든지 몰래 장삿군 총각에게 이 내용을 귀띔해 주고 취재 보도록 권하여 사위가 되었다.
이렇게 얻었다는 사위가 알고 보니 천치 바보라, 장인이 이 자를 쫓을 양으로 다시 장에 가서 소를 고르랬더니 소를 보고 하는 말이, "이 노목궤에 쌀 쉰 닷말은 들겠군!" 하여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같이 변통성없는 사람을 흔히 노목궤라 한다
못난 사위와 깜찍한 며느리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무수히 많았다. 그것은 밖의 사회에서 들어온 자에 대해, 자기네 풍습에 익숙지 못한 것을 웃음거리로 삼았던 한 예라 보겠다.
'故事熟語 神話傳說'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田)조림/공당問答/비오는 날의 나막신/살아서는 임금의 형 (0) | 2008.01.13 |
---|---|
너 자신을 알라/백일몽/백일천하/원탁회의/다모클레스의 칼 (0) | 2007.12.28 |
존 불*양키/철혈재상/아킬레스힘줄/역린/콜럼부스의 달걀 (0) | 2007.11.04 |
패각추방/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강한 자의 주장이 항상 옳다/ (0) | 2007.10.15 |
악어의 눈물/사자의 몫/물고기 이크투스/길 잃은 양/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0) | 2007.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