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는 우리 대학 국문학과에 1회로 입학한 학생이었다. 신설 대학이어서 교수 구성원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대학생 숫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은 시절이라 해도 대학에 다닌다고 하여 크게 주목을 받을 대상이 아닌 것이 세상의 인심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에다가 가치를 두고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관심을 돌리고 보면 섣불리 인간의 가치를 저울질 하기가 어렵게 된다. 명문의 대학에 다닌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모두 우량한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서이다.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인지는 몰라도 나는 연미를 한 제자로서 좋아하고 기특한 학생으로 여겨 주목하였다. 지순성근(至純誠勤)하고 천의무봉(天衣無縫)한 그의 천성이 눈에 띄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한 마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든지 대학신문에 투고한 그의 글의 한 구절이 나의 졸강(拙講)을 듣고 감동한 내용이라 자못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실증(實證)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81년 여름, 지리산 북쪽 언저리 산동네 등구 마천으로 우리 학과 제1회 학술조사를 갔을 때 연미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방불케 하기도 했다. 경상 전라 접경지역의 방언 조사와 민속, 민간설화를 토착민을 상대로 채록하는 활동이라 주민들과 인간적으로 밀착하여 교감이 이루어짐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데, 유독 연미는 촌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던지 인기가 있었단다. 떠나올 때 하늘 닿은 산골 마을 가난한 아낙네가 허리춤에 꼬깃꼬깃 구겨넣은 천원짜리 지폐를 연미의 손에 쥐어주며 차비해서 잘 가고 편지해 달라며 눈물짓기도 했던 것이다. 연미의 인간적 매력에 이끌렸던 촌 아낙의 심성의 일단이자 연미의 마음이기도 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연미는 그런 매력이 있는 학생이었다.
외모도 깜찍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학생 때 그의 모습이 대만 여가수 등려군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가을학술제의 학과 행사로 기획된 전통혼례 재현에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신부로 나서는 용감성도 발휘하여 주변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 당시 연미의 장래 희망은 장애자를 위한 특수학교의 교사가 되는 것이라 하였다. 교사자격이 필요하였지만 연미는 교직과목 이수 대상자가 아니었다. 졸업을 하고서라도 특수학교 교사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과정을 이수하여 기어코 장애인 교육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 연미의 소신이었다.
그런 연미의 속내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를 만난 후였다. 연미의 아버지는 영관급 장교 출신이었고 연미는 남동생이 하나 있어 남매로 자랐는데 항생제 주사에 과민체질인 것을 모르고 유아기에 주사를 잘못 맞았다가 동생은 농아가 되고 연미는 구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점의 그늘이 없는 연미에게서 나는 물론, 가까운 주변에서도 그런 불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연미는 밝은 학생이었다.
장애자를 위한 교사가 되어 헌신하겠다는 연미의 갸륵한 희망을 열어줄 방도가 없어진 나는 의기소침하여질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것은 제자를 교육하는 선생으로서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졸업을 하고는 연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풍문에 들리는 바로는 역시 장애자 시설에서 장애인을 돕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도 하고, 어느 장애인을 둔 가정에서 청혼을 해 와 당혹해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 왔다. 짐작컨대 연미의 인간적 매력에 심취한 상대편의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소식을 영 알 수가 없었다가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1회 졸업생 동기회에서 연미의 밝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마 중년의 나이, 이내 결혼을 하여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연미는 행복해 보였다. 그가 가진 갸륵한 인생관대로 스스럼없이 살아갈 근황을 굳이 물어 알아 볼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 행복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인간의 삶이니까.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그런 연미에게서 그야말로 갈채를 보내고 싶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느 교회의 담임 목사로 취임한다는 목사취임식 초청장이었던 것이다. 교회도 많고 목사도 많은 세상이지만 유수한 명망의 교회 담임 목사를 아무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나는 연미가 목사로 있는 교회는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임을 장담할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제끼고 참석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축전(祝電) 하나로 모처럼의 희소식에 답을 하고 만 마음의 빚을 나는 지금도 지고 있다. (2003. 2. 여강 김재환 산문집 <如岡散藁>)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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