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 장재불이라는 작은 산동네에 명도 할매가 하나 있었다. 그 명도 할매는 우리 집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지 음력 정초가 되면 꼭히 우리 집에 와서 점(占)을 치곤 했는데, 그 때가 되면 이웃동네 사람들까지 우리 집으로 몰려와 명도 점을 보곤 하였던 것이다.
그 점이라는 것이 여느 점복(占卜)과는 달리 허공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 해설을 내려 주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 명도 할매는 이른 바 '새트니'라고도 일컫는 공창무(空唱巫)였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점쟁이 무당(巫堂)들이 하는 점이나 굿은 민간신앙으로 오래 전부터 뿌리내려 온 것이지만, 철학적 지식이 없는 무지한 점쟁이에 의하여 행하여져 왔고, 물질에 탐혹하여 혹세무민(惑世巫民)하는 일도 있었으므로 이들 점쟁이를 팔천(八賤)에 몰아놓고 이들이 하는 점이나 굿을 요술(妖術)이라 하여 배척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공창무는 무(巫)가 신령(神靈)을 내려 이 신령으로 하여금 음성을 발하게 하고 이 음성(音聲), 곧 신령(神靈)의 소리를 해석하여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것인데, 그 신의 소리는 보통사람의 귀에도 들리고 유음(幽陰)하여 신기하기 때문에 다른 점술(占術)에 비하여 사람을 현혹시키기 마련이었다.
태자(太子), 명도(明道), 새트니, 공징이 등을 통칭하는 공창무(空唱巫)는 그 신령이 어떤 것이며 신성(神聲)이 어떤 모양으로 발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는 <고려사> 안향전(安珦傳), <세종실록> 18년조(條), <성종실록> 3년조(條), 9년조(條), 및 21년조(條), <필원잡기> 권2, 이규경의 태자귀설(太子鬼說) 등에서 그 실상을 살펴 볼 수가 있다.
나는 국민학교 입학을 하기 전부터 그런 점을 치는 장재불 명도 할머니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고, 또 나를 귀한 아들로 생각했던 우리 부모님은 그 신비한 능력을 가진 할머니에게 나를 팔기도 하여-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통적 풍습에서는 질병을 막아내거나 운로(運路)를 열어가는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흔히 신통력을 가진 자연물이나 점쟁이에게 아이를 팔아 정신적 보호를 받도록 했다- 이를테면 그 명도 할매는 나의 대모격(代母格)이었다. 따라서 나는, 명도 혹은 공창(空唱)은 점술(占術) 중에서도 근거없는 것이 아닌 신비한 무엇이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자랐다.
내가 목격한 그 명도 할매의 점(占)이라는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
품위가 있어 보이는 명도 할매가 점을 칠 사람을 상대하여 점잖게 앉아 암시(暗示)를 하면 방안 허공에서 '휘휘휙' 하고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이 곧 명도할매가 데리고 다니는 신령이 도달하였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보통사람의 귀에도 들리는 허공에서 나는 소리이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부터 점(占)이 시작되는데, 궁금한 것을 물으면 명도 할매가 받아 공창(空唱)의 신령에게 전달하고 신령이 휘파람소리로 대답을 하면 명도할매가 점을 치러온 사람에게 해설을 해 주는 방식이었다.
예닐곱 살 어린 나이 때에 각인된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점친 내용은 태반이 조상의 묘지에 관한 사항 아니면 태중에 든 아이의 남녀 성(性)구별이었다. 조상의 묘지 안부를 물으면 공창의 신령은 무덤에 가 살펴보고 오겠노라고 휘파람 소리로 말을 해 놓고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이윽히 있다가 허공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면 산소를 둘러보고 온 것이다. 명도 할매가 어떻더냐고 보통말로 신령에게 묻고 공창의 신령은 휘파람 소리로 답한다. 조상묘의 흉조(凶兆)는 주로 묘 안에 물이 고였다거나 나무뿌리가 유골을 휘감아 조상의 유체를 괴롭혀 이장(移葬)을 서둘러야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태중(胎中)에 든 아이의 성 구별은 은어(隱語)를 쓰고 있었는데, 남자아이를 '꼬도리'라 하였고 여자아이를 '비지'라고 하던 것이었다. 이런 모든 점복의 과정은 공창(空唱)의 신령한 휘파람 소리로 진행되고 영매(靈媒)인 명도 할매의 해설로 내용이 전달되던 것이었다.
명도 할매의 그 점(占)이 맞았었는지 아니면 틀렸었는지는 그 후 확인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 다만 틀림없는 것은 그 명도 할머니가 돈벌이의 수단으로 명도 점을 치는 직업적 점쟁이는 아니었으니,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요즈음 점쟁이는 대가를 받고 있으니 혹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서 거짓으로 사람을 현혹할 수도 있지만, 그 때의 그 명도 할머니는 일푼의 복채(卜債)를 받지도 않으면서 그냥 신(神)이 지펴서 하는 일로, 혹세무민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한다.
말인즉슨 죽은 송아지의 영혼이 할머니에게 내려 지폈다는데, 일반적으로 명도(明道)라고 하면 혈연관계가 있는 사아령(死兒靈)의 강신체험(降神體驗)을 통해서 된 무(巫)이지만 내가 아는 장재불 명도 할매의 경우는 어린 동물의 영혼이었다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그 시절 소중한 아들로 태어났기에 그 명도 할매가 나의 대모(代母)가 되어버린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나는 속신(俗信)의 신봉자는 아니며, 다른 어떤 특정의 종교인도 아니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유독 명도 할매를 믿은 것은 순전히 한 인간에 대한 신뢰심에 바탕한 것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그러한 속신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부대껴 온 운명의 양지길이 어쩌면 말없이 어린 나의 머리를 자비로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던 장재불 명도 할매의 신령(神靈)의 힘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실소(失笑)를 머금는다.
나는 우연스럽게도 몇년 전 3월 어느 날,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에 있는 작은 산동네에서 민박을 하게 되었는데, 그 동네가 바로 내가 여섯살 때 어머니를 따라 나를 판 명도 할매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던 장재불이라는 동네임을 알고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혔었다.
실로 기억도 아슴한 60년 전 유년시절의 현장에 발을 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동네 입구 요로에 몇 채의 민박집이 자리하고 있을 뿐 이미 폐허가 된 산동네였다.
민박집 바로 옆 폐허가 된 명도 할매의 집터가 다행스럽게도 그대로 있었다. 유년시절의 아슴한 기억을 되살려 60년 전의 족적을 더듬다가 명도 할매집의 섬돌이었을 성싶은 자리에 주저앉아 사념(思念)을 흩날리고 있노라니 이른 아침 먹이를 찾아나선 딱다구리과의 작은 멧새 한 마리가 '다그르르......' 하고 나뭇가지를 쪼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정령(精靈)의 관점에서라면 어쩌면 그것은 나의 대모(代母)이기도 했던 명도 할매의 영혼의 현신(顯身)이었는지도 모른다.
산막(山幕)이나 다름없는 산동네가 고작 등산객이나 찾아드는 민박집으로 바뀐 70년에 가까운 시류(時流)의 격차를 느끼면서도 영혼 속에 잠재한 근원적인 의식의 흐름에는 세월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이 글을 쓴다.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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