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는 1960년 4월에 일어난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 학생시위였다. 그 핵심적인 사건은 극도에 달한 그해 3월의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이었다. 따라서 '4.19'라 함은 물론 1960년 4월 19일의 일뿐이 아닌 그해 3,4월의 일련의 사태를 일컫는다.
1960년 3월 15일의 대통령선거에서 국민들은 선거 수일 전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의 사거(死去)로 실의에 빠졌다. 다른 강력한 대적자가 없는 마당에서 이승만의 재선은 확고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노령으로 인하여 1960년의 선거에서는 부통령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선거전에서 자유당은 여러가지 불법과 폭력을 자행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수에서 단독출마시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되었고 이기붕은 1백 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백 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 민주당은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했다. 반정부 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4.19 전 수주일 동안 대구 부산 마산 등의 지방도시에서 각종 행사에 집단으로 동원된 고등학생들이 불법선거와 자유당 정권의 반민주적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했다. 그런 와중에 항구도시인 마산에서 시민들은 머리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채 바다에 버려졌던 16 세 소년의 시체를 발견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희생된 것을 유기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심각한 사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또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4월 18일, 서울에서 시위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 수천명이 대통령 저택인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이 데모대에 발포하기 시작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화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 주요 도시에서 수십만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서울에서만도 이날 1백 30명이 죽고 1천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주요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일반시민들도 가담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파괴방지에 전념하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정치적 상황은 급격히 변해갔다.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으로 하여금 모든 정치활동으로부터 물러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은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가 자유당과 그 밖의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시위군중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서울 시내 각 대학 3백여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퇴를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행진에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임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경찰력에 의해 유지되었던 이승만 정권은 결국 학생을 선봉으로 한 반독재 대중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나는 그 당시 23세의 대학생 신분으로 현실을 생생하게 목도했고, 4월 19일에는 물론 데모에도 참여했다.
1957년 4월, 나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에 입학하여 안의에서 대구로 유학하고 있었다. 안의에서 대구까지는 250리 길, 거창을 지나 합천을 거쳐 고령재를 넘어 낙동강을 건너고 화원을 지나면 대구였다. 그 당시 사정으로 한강 이남에서 그래도 괜찮은 국립대학교가 있는 곳이어서 마음에 들었지만 이 고장은 아무데도 연고가 없는 곳이어서 발붙일 거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자취생활을 해야겠기에 그 당시 대구 시내에서 산격동 경북대학교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이었던 경대교(慶大橋) 바로 앞 빈민굴이나 다름없는 판자촌에 자취방을 하나 얻어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난한 시골학생의 유일한 방편이 자취를 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출발하였다. 산격동으로 옮겨 다니며 어렵고도 서러운 자취생활을 3년을 하고 나니 그것도 진력이 났다. 풍로에 장작불을 지펴 밥을 해먹을 부엌도 없는 자취방, 겨울에 남의 처마밑에 알미늄 밥솥을 놔두었다가 이른 아침 밥을 지을라치면 물을 담아놓은 밥솥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밥솥의 얼음을 깨고 언손으로 쌀알을 앉치는 일이 너무나 힘들기도 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을 수몰직전의 자취방에서 겪은 그 이듬해 겨울, 나는 대구매일 사진부장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행운을 잡았다. 그런데 그 시절 유명 신문사의 사진부장 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강하고 뒷받침은 제대로 할 수 없는 가정형편, 한칸 방에서 할머니 딸 아들 모두 합쳐 여섯 사람이 거처하는 방 한 칸 구석자리에서 기숙을 하며 그 아들을 가르쳤다. 다행히 그 아들을 그 당시 대구시의 일류 중학교에 합격시킨 것이 다음 가정교사 자리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소개받은 가정교사 자리가 그 당시 대한반공청년단 경북도단장을 겸하고 있던 K변호사 댁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그 K변호사 댁에 입주 가정교사로 기숙하면서 대학생활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4.19를 맞이했다.
교육은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이루어진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양식있는 부모의 아들을 맡게 된 것이다. 변호사인 본인이 시간이 부족하여 자기 아들을 대신 가르칠 선생을 모신 이상, 그 선생이 학생의 신분일지라도 선생으로 대접함으로써 자식을 가르치려는 의지를 가진 양식있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변호사 아버지가 '선생님'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니 선생의 가르침을 그 아들이 어찌 감수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아이는 선생인 나를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면 교육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내 가정교사의 기반은 다져졌다. 그 당시 가정교사의 댓가는 입주하여 숙박을 해결하는 정도에 그쳤고 경우에 따라 용돈과 잡비를 얻어 쓸 정도면 좋은 자리로 쳐주었던 것이 그 시절의 형편이었다.
1960년 4월 18일 밤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데모가 있었고 그 이튿날 '4.19'가 터졌다. 내가 다니던 경북대학교에서의 봉기는 그 날 5교시 강의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캠퍼스 서편 교양과정부에서부터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차도를 따라 일군의 첨병 시위대가 깃발을 내두르며 달려오는 것을 계기로 하여 강의실을 박차고 나선 젊은 열기가 삽시간에 합류하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누구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었다. 교문을 나서서 신암동 입구에서 경찰과 맞닥뜨렸을 때 나는 어느덧 대열의 선두 스크램에 들어 있었다. 다혈질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정의에 사는 젊음의 속성이었을 것이다. 시위대에게 총질을 하였다는 서울의 소식을 듣고 발뺌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밀치고 당기는 경찰대와의 몸싸움에서 돌파하는 것만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다행한 것은 서울과는 달리 대구에서는 경찰의 발포는 없었다. 경찰의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칠성동 신천교를 지나 태평로를 휩쓸고 지나갈 때 태극기를 휘두르며 좋아 날뛰는 민주당 당원들로 구성된 시위군중의 한 떼가 학생 데모대에 합류하려는 것을 물리쳤다. 순수한 청년 대학생의 애국적 시위에 더러운 정치세력이 끼어들 수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파죽지세로 경북도청까지 밀어부쳤다. '부정선거 책임지고 도지사 물러나라'는, 데모대의 주동자격인 영문과 W의 사자후(獅子吼)가 일품이었다.
그런 데모를 하고 난 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집으로 돌아온 모습을 본 K변호사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찼다. 세상의 위기를 느낀 것이다. 그 당시 나의 가정교사 주인인 K변호사는 비록 어쩔 수 없이 맡은 겸임 명예직이었긴 해도 반공청년단 경북도단장으로서 일말의 시국에 대한 책임도 있었고 이승만 정부의 말기 현상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김선생 걱정스럽네" "몸조심 하게" 하였지만 그 때는 그 말의 함의까지 새겨들을 만큼 시국에 대한 감각이 없는 나이였다.
4월 19일 이후의 사태는 급전직하로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생이 완장을 두르고 파출소를 접수하였고, 탱크까지 동원한 군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처지였다. 자유당의 앞잡이 신도환의 가재도구가 중앙통에서 불살라지고 있었고, 반공청년단 단장인 K변호사 자택이 그 다음 목표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K변호사는 가재도구를 지하실에 모두 옮겨 놓고 가정교사인 나와 경북의대 나의 두 해 후배인 그의 처조카에게 온통 집을 쓸어맡기고 피신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우리 둘은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탈은 없었다. 그래도 K변호사는 양심적인 사람으로 인심을 잃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이듬해인 1961년 3월 25일은 나의 영광스러운 졸업식 날이다. 견성사의 벽안스님과 K변호사 가족 모두, 나의 첫번째 가정교사 주인인 대구매일신문사 사진부장 가족,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P, Y 등의 친구들이 축하한 자리였다. 국립사대 졸업생이라면 그 해 졸업 즉시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내려야 했는데 자유당 말기의 정치나 행정력은 4.19를 겪어도 복마전이기는 매일반이어서 사범계 교사자격 출신이거나 비사범계 교사자격 출신이거나 간에 돈만 가져다 주면 우선적으로 교사발령을 내려주었다. 돈도 빽도 없었던 나는 발령 순서가 한참 뒤로 밀리었다. 웃기는 세상이었다. 그런 웃기는 세상을 뒤엎은 것이 5.16군사혁명이었다.
군사 혁명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병역 미필자가 되어 있어 일체의 발령이 정지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교사 발령을 포기하고 1961년 10월 1일 공군 병과 96기로 대전에 있는 항공병학교에 입대하고 말았다. 나의 가정교사 주인인 K변호사가 이런눔의 난장판 세상이 어디 있느냐고 한탄하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려 들으면서......
그 후 K변호사는 박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의 변호인단 수석변호인으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에서의 4.19 주동자격인 영문과 W는 내가 경남 일원에서 중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을 무렵, 역시 같은 경남에 발령을 받아 교사로 근무하면서, 옮겨다니는 학교마다 교장 교감의 책상을 뒤엎어 한학기가 멀다하고 전근을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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