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동주(吳越同舟)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행동을 같이 한다든지 자리를 같이 함을 말한다.
<손자 병서> 용병법에는 아홉가지 경우가 있는데 마지막의 경우를 사지(死地) 즉 죽을 고비라고 일컫는 바,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그런 경우에는 병사들은 한 마음으로 싸워서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말하기를,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와는 오랜 적국이요 국민 끼리 미워하는 사이다. 그러나 두 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다면 그들은 서로 왼손과 오른손처럼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바랄 것은 필사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병사들의 마음이다. 여기에서 '吳越同舟'라는 말이 생겨났다.
<孫子 兵書>는 춘추시대 오나라 사람인 손 무(孫武)가 지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서쪽으로는 초(楚)나라의 서울을 함락시키고 북쪽으로는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무찌른 명장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인 손 빈의 저서라는 설도 있다. 그는 다리가 잘리우는 등 기구한 운명을 더듬어면서도 마침내 대장군이 된 병법가였다.
서로 적의(敵意)를 품은 사람끼리 한 자리나 같은 처지에 있게 된 경우, 또는 서로 미워하면서도 공통의 어려움이나 이해에 대해서는 협력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니 요즈음 정치판에서 한번 새겨볼 만한 말이다.
# 와신상담(臥薪嘗膽)
일부러 섶나무 위에서 자고, 쓰디쓴 곰 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주(周)나라의 경왕 24년(BC 49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는 월나라 왕 구천(勾踐)과의 싸움에서 패하였다. 합려는 적의 화살에 손가락을 상했는데 그로 인해서 죽었다.(합려의 묘는 江蘇省 蘇州 虎丘에 있다) 그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태자 부차(夫差)에게 유언하기를 기필코 월나라에 복수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왕위에 오른 부차는 밤낮으로 아버지의 유언과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리려는 굳은 결의에서 밤마다 섶에서 자며(臥薪), 아버지의 유한(遺恨)을 되새겼다. 뿐만 아니라 자기 방에 드나드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아버지의 유언을 외치게 하였다. "부차여, 그대는 아비의 원수가 월나라 왕 구천임을 잊어서는 안돼!". "네, 결코 잊지 않으렵니다. 3년 안으로 기필코 원수를 갚지요".
부차는 이렇게 아버지의 임종 때 대답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를 훈련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낌새에 선수를 칠 생각으로 월나라 왕 구천은 먼저 싸움을 걸었으나 복수의 일념으로 단련된 오나라 군사에게 크게 패하여 구천은 회계산에서 포위를 당하였다. 구천은 마침내 나라를 버리고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될 조건으로 항복했으니 치욕을 참고 다시 일어설 날을 기약하려는 속셈이었다.
오왕의 도량으로 고국에 돌아온 구천은 앉으나 누우나 또한 식사할 때마다 쓰디쓴 쓸개를 핥으며(嘗膽), 오왕 부차에게 복수할 결의를 가다듬곤 하였다.
스스로 농사를 짓고 부인은 길쌈을 하며 회계산(檜稽山)에서 겪은 치욕을 되새겼다. 그리하여 항복의 치욕을 '회계지욕(檜稽之辱)'이라 한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항복한지 12년, 오왕 부차는 기(杞)나라 황지(黃池)에서 여러 군주들과 만나 천하의 패권을 잡았다. 그 부재중에 구천은 오나라를 쳤으나 결정적인 타격은 못되었다. 4년 후에 또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다시 2년 후에는 수도 고소(姑蘇 - 오늘의 蘇州)를 침공, 오나라 왕 부차를 고소성에서 포위하였다. 드디어 회계산의 치욕을 씻은 구천은 부차를 귀양보내어서 여생을 마치게 할 생각이었으나 부차는 그 호의를 뿌리치고 스스로 목을 베었다.
구천은 더욱 북진하여 제나라 진나라의 군주들과 서주(徐州)에서 만나, 오나라 대신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복수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와신상담하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함을 일깨운 고사이다.
# 전철(前轍)
앞서 간 수레의 뒤집힌 바퀴 자국은 그 뒤를 따라가는 다른 수레에게 경계가 된다는 말로 앞사람의 실패의 경험을 일컫는다.
전한(前漢)의 제3대 황제인 문제(文帝)는 고조 유 방(劉邦)의 서자요, 제2대 혜제(惠帝)의 아우로서 제후(諸侯)였던 바, 한실(漢室)의 내분 때문에 뭇 신하에게 추대되어 제위(帝位)에 오른 인물이다. 그 무렵의 이름난 신하에 가 의(賈誼)라는 인재가 있었는데 그는 20여세에 문제에게 초빙되어 박사가 되었다. 문제는 제후 출신인 만큼, 강대한 제후 사이에는 그의 명령이 업신여겨지는 경향이 있어 가 의 등의 명신을 중용하여 제후 대책을 비롯하여 국정 쇄신에 힘썼다. 가 의는 황제를 도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중국에서 가장 오랜 나라인 하(夏) 이래로 진(秦)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의 흥망의 길을 거울 삼아서 제후의 힘을 덜고 백성의 힘을 기르며 정도(政道)를 바로잡기 위하여 여러가지 대책을 진언하였다. "항간에 이르기를, 앞서 간 수레의 뒤집힌 바퀴 자국은 그 뒤로 가는 수레에게 경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모범으로 삼는 바 옛날의 좋은 시대인 하(夏) 은(殷) 주(周) 3대는 비록 오랜 옛날일망정 잘 다스려진 까닭은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진나라가 일찍 멸망한 것을 우리는 몸소 보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앞날이 암담해질 것은 빤합니다. 나라의 운명과 난리를 다스릴 열쇠는 오직 여기에 있는 것이올시다."
문제(文帝)는 이 말을 받아들여 제후의 영토를 들고 대국을 소국으로 나눈 이외에도 농업을 장려하여 세(稅)를 면하고 극형을 폐지하는 등 어진 정치를 폈다. 더우기 질소검약(質素儉約)의 기풍을 장려하여 궁녀들도 구슬을 장식하거나 옷자락을 끌지 못하게 하니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루어 천하가 태평해졌다.
오늘이라 해서 치정(治政)의 도(道)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리라.
# 읍참마속(泣斬馬謖)
대의(大義)를 위하여 애통함을 무릅스고 사정(私情)을 버리는 일을 두고 비유적으로 읍참마속이라 한다.
촉(蜀)나라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은 각지에서 위(魏)나라의 대군을 무찔러 천하를 석권하고 있었다. 그 때 위나라의 장수 사마 중달(司馬仲達)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산(祁山)벌에서 촉군을 맞으려고 부채 모양으로 진을 쳤다. 공명은 그것을 물리칠 작전이 돼 있었으나 꼭 한군데 불안한 곳이 있었으니 그것은 촉군의 군량 수송로인 가정(街亭)땅이었다. 만일 이 곳을 위군에게 빼앗긴다면 전선(前線)의 촉군은 꼼짝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가정땅을 누구에게 수비케 하느냐 하는 점이 제갈공명의 고민거리였다. 이 때 스스로 그 소임을 자원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공명의 친우인 마 량(馬良)의 젊은 아우 마 속(馬謖)이었다. 재기환발(才氣喚發)하여 공명은 그의 대성(大成)을 내다보며 아우처럼 사랑하는 부하였다. 하나 상대방의 장수 중달과 대항시키기에는 아직 젊었기에 공명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다년간 병법을 배운 터에 가정 땅 하나를 지켜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패하는 날이면 저는 물론이요 저의 가문을 모조리 군벌(軍罰)에 처하여 주십시오", "그래, 진중에서는 허튼 수작이 없느니라".
마 속은 기꺼이 공명의 명령을 받들었다. 공명은 특히 왕 평(王平)을 부장(副將)으로 택하여 마 속을 보좌토록 했다. 가정산(街亭山)은 3면이 절벽인 바 그 산기슭을 사수하여 위군의 접근을 막으라는 것이 공명의 명령이었다. 하나 마 속은 적군을 끌어들여서 역습하기에 알맞은 지세라고 판단, 왕 평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위에다 진을 쳤다. 그 결과 위군이 산기슭을 포위하니 물이 끊기어 마 속은 궁한 나머지 전군을 이끌고 쳐내려 왔으나 위군에게 에워싸여서 참패를 하고 말았다.
공명은 마 속을 기용한 것을 뉘우치며 전군을 한중(漢中)땅으로 후퇴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철수가 끝나자 공명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마 속의 목을 베기로 하였다. 마 속은 유능한 인재인만큼 그를 잃는 건 나라의 손실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명은 단호히 말하였다. "마 속은 아까운 사내다. 하나 사정(私情)은 그가 범한 죄보다도 더욱 큰 죄악이다. 마 속을 잃는 건 나라의 손실일지도 모른다. 하나 그를 용서한다면 더욱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아까운 사람이면 그럴수록 그를 처단하여 대의를 바로잡아야 한다. 마 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공명은 얼굴을 소매로 가리고 자리에 엎드려서 울었다. 이윽고 마 속의 목이 진중에 내걸리자 전군의 장병은 공명의 심정을 헤아리고 모두 울었다.
먼 옛날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이 나라의 통치권력자들의 행태와는 그야말로 철학이 달라 은근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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