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문학에 길을 묻는 부산의 수필동인지 <길>

如岡園 2008. 4. 30. 08:34

 동인활동은 대개는 젊은 나이의 문청(文學靑年) 시절이거나 문단에 등단해서도 지향하는 바와 뜻이 맞는 비교적 젊은 나이의 사람들끼리 모여 동인지를 만들고 자신들의 문학적 외연을 넓혀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동인 모임의 활발한 활동은 학문의 각 분야에서는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고 문학에 있어서는 다른 갈래의 문예사조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부산의 <길>동인의 경우 앞서의 모든 통념을 뛰어넘는다. <길>동인들이 동인활동을 위해 처음 모임을 가졌던 것이 2003년 2월로, 연조로 따진다면 불과 4년 전이다. 국내에 30,40년 동인모임도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연륜은 짧은 편에 속한다. 동인지 <길>도 통권 7호를 발행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동인은 여타의 다른 동인 모임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동인들의 면면이다. 동인 모두가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구축한 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학교수로 퇴임했거나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교수들이 여덟 분이고, 부산의 언론을 대표하는 신문사의 현역 주필과 방송국의 전 보도국장이 있고 또, 원로소설가 한 분과 시인이 한 분, 수필가이면서 약국을 경영하는 동인과, 조금은 의외의 인물로 생각되는 분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녀님이다.

 모두 자신들의 일과 학문분야에서는 물론 자신들의 문학 장르에서도 활발한 활동으로 문명을 떨친 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목되는 것은 이들 <길>동인들이 동인 모임을 발기한 시점의 연령 구성이다. 한두 분을 제외하고는 동인들의 연령대가 육십대 후반에서 칠십대 중반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자신들이 속한 분야에서 성공적인 업적을 쌓았고 불혹은 물론 이순도 넘긴 <길>동인들이 새삼스럽게(?) 모임을 발기한 데는 그만한 취지의 명분이 있었다.

 <길>동인이 결성된 이후 동인지 창간호를 발간, 이를 보도한 2003년 11월 3일자 부산일보 문화면 기사에서 이들의 동인 결성 명분과 취지를 찾아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할 것 같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그대로 옮긴다.

        "우리는 글로써 길벗"

           부산학계 등 중진 14명 수필동인 <길> 창간호

  "우리는 글로써 같은 길을 가는 길벗이 되었습니다." 수필동인 <길>의 짤막한 동인 선언이다. 그뿐이다. 부산의 학계 교육계 문학계 언론계의 중진14명이 수필동인 <길>을 결성하고 230여 쪽의 창간호 <길>을 냈는데, 드러내지 않는 행보가 진중하다.

 소설가 이규정 회장의 말.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삶에 대한 진지한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는데 의기투합했습니다." 가장 진실한 글로써 얘기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표지도 심심할 정도로 담백하고, 동인들의 서너 편 글만 실었을 뿐 약력이나 사진 등 거추장스러운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뺐다. 이 모임은 "곰삭아서 깊고 무게 있는 진실한 글로써 서로 벗하자"는 천두현 전 동의대 교수의 제안에 각계 인사들이 뜻을 함께해 결성된 것. 동인 간사 정경수는 "1년에 2차례 낼 계획이다" 라고 말했다.

 

 창간호의 창간사 역시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길>동인의 모임을 집성촌의 재실에 비유하고 여유와 멋을 지닌 사랑채와 한 가문의 격조와 향기가 어린 재실을 겸한 것 같은 집 한 채가 <길>동인이라고 적고 있다. ......중략......

 수필동인지 <길>은 참으로 겸손하고 소탈하게 기존의 권위나 우월의식을 내던져버리고 조금도 치장하지 않는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다가서려는 마음으로 창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약력이나 직책까지도 밝히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마음이 보인다. ......중략......

 지난 5월에 발행된 수필동인지 제7호 <길>은 창간 당시의 이들 마음이 올곧게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반영한다. 동인지의 표지는 그림이나 상징 없는 청색 바탕에 흰 글자로 제목 <길>을 표지의 상단 중간에 배치했다. 글체는 퇴계선생 친필본 <도산십이곡>에서 집자한 것이다. 발행연도와 통권표시는 제자 바로 밑에, 그리고 동인명은 표지의 가장 아래쪽에 두었다. 이러한 표지 편집은 표지의 색깔만 달리할 뿐 창간호부터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동인지는 얼른 보아 싱거울 정도로 밋밋하고 단조롭지만 잡스럽지 않은 동인들의 절제된 품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차분하고 경건한 느낌이다. 이 책 속에 한 시대를 살아 온 정제된 동인들의 유려하고 폭 깊은 사고가 담겨 있다.

 내용을 보지 않아도 <채근담>같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교훈이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듯싶다. ......중략......

 국판 302쪽에 담은 동인들의 글의 무게는 천금보다 무겁고 값지다. 살아온 연륜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길>동인지는 길 동인들이 지향하는 만큼이나 가식 없이 소박하고 담백할 수밖에 없다.

 인터뷰가 예정되었던 날은 부산일보 이문섭 주필의 집무실에서 곧 출판될 동인지<길> 8호의 편집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 8시 35분에 서울을 떠난 KTX 고속열차가 정확하게 세 시간을 달려 부산에 도착했고 지하철로 약속시간 정오 12시에 부산일보 현관에 도착했다. 모두 바쁜 일정들을 접어두고 여덟 분이 참석해 있었다.

 참석한 동인들은 마지막으로 출판 일정과, 동인지 표지의 색깔을 의논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단색으로 하되 개나리 꽃 색의 노랑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편집회의가 끝나고 사무실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막말로 정치는 개판이나 다름없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고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이 나라에 <길>과 같은 고결한 동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든, 누가 알아주든 말든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산소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호삼. / 2007 계간문예 겨울호 NO.10 / 문학에 산다<7> 문학동인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