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의 혼례
고구려를 비롯하여 고대국가에서는 아내를 돈을 주고 사 오는 이른바 구매혼(購買婚)이라는 관습이 있었는가 하면, 신랑이 한때 처가살이를 하는 풍습이 있어서 심지어는 '장가든다(入丈家)'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또 신라나 고려에서는 동성동족(同姓同族) 혼인이 많아서 조선의 학자들은 이것을 통렬히 비판하고 그 폐해를 고치려고 많이 노력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왕실에서는 소위 간택(揀擇)이라 하여 왕비나 세자비를 택할 때에는 여자의 체면과 인격을 무시하고 여자 자신이 나타나서 선을 보이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혼례 방법에 대해서도 비판의 소리가 많았다.
그리하여 신랑 신부의 양가가 동등한 처지에서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또 돈을 써서 인신을 사고 파는 인상을 주지 않는 혼례를 구상하여 만든 것이 소위 친영(親迎)의 혼례인 것이다.
혼례는 대체로 혼의(婚議)-납채(納采)-납폐(納幣)-친영(親迎)의 네 가지 절차를 밟아서 이루어지는데, 이 중에서 친영에 가장 무거운 비중을 두었다.
# 혼례의 절차
우리 나라의 재래식 혼례에서 혼의(婚議)는 중매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배우자의 선택은 옛날에는 양가의 어버이가 정해주는 것이고, 개화 이후에는 일부에서 이른바 자유연애라 하여 당사자들끼리 사귈 수는 있으나 결국은 어른들의 동의나 허락을 받아서 결혼하게 되었다. 연령에 있어서 옛날에는 남자는 서른, 여자는 스물이 넘지 말아야 한다는 제한이 있었으나 이것도 구속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사례편람,四禮便覽>의 혼례조에는 납채(納采)나 납폐(納幣)에 관해서 복잡한 규범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대개 무시되고 편법을 사용하여 왔다. 본시는 신랑의 집에서 먼저 신부집에 허혼을 감사한다는 편지를 보내고, 여자편에서도 이에 회답을 보낸다. 그리고 양가는 이 사실을 사당에 고하는 중대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한갓 신랑의 사주(四柱)를 신부집에 보내고, 신부집에서는 택일(擇日, 涓吉이라고도 한다)을 보내면 이른바 납채의 절차는 끝나는 것으로 되었다. 이 납채는 신식혼례에서는 약혼식으로 대신되는데,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에 기독교식 혼례식이 유행할 때부터 이 절차는 없어지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사주와 택일을 교환하는 것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납폐(納幣)는 본시 친영 전에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채단을 보내면서 편지(납폐문)를 보내는 것인데, 요새는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혼인 전날이나, 혼인 당일에 신랑의 친구들이 가지고 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어떤 지방에서는 근래까지도 '함진아비'라 하여 신분이 낮은 하인이 지고 가기도 했다.
다음의 절차는 친영(親迎)이다. 이것은 신랑이 친히 신부를 맞이해 온다는 뜻인데, 혼례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또 복잡한 행사인 것이다. 이날 신랑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사당(祠堂)에 혼인하게 된 사실을 고하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이때 아버지가 "이제 아내를 얻어서 종사를 잇게 하라" 고 당부하면, 신랑은 "명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하고 성장(盛裝)한 다음 신부집으로 간다. 신랑의 복장은 사모(紗帽)에 관복(官服)을 입고 띠를 띤다. 신발도 검은 신을 신는다. 이것을 통칭 사모관대(紗帽官帶)라고 하는데, 이것은 벼슬을 상징하는 복장이다. 그런데 지방과 당색(黨色)에 따라 복건(幅巾)을 쓰고 또 사모를 쓰는 경우도 있고, 그냥 사모만 쓰는 경우도 있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향할 때에는 보통 말을 타고 가는데, 지방에 따라 가마를 타고 가는 곳도 있다. 가마에는 신랑용과 신부용이 구별되어 있다.
신랑을 데리고 가는 어른은 대개 신랑의 삼촌인데, 삼촌이 없을 경우에는 그 친척 중에서 적당한 분이 따라간다. 이것을 상객(上客)이라고 한다. 그외에 마부, 종들이 신랑을 안내하여 간다. 한편 신부집에서도 사당에 혼례할 것을 보고하고, 부모는 딸에게 "삼가고 삼가서 규문(閨門)에 욕됨이 없게 하라" 고 당부한다.
이윽고 신랑이 신부집 마을에 도착하면 직접 신부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근처의 집을 빌어서 우선 들어가서 쉰다. 이 집을 사처라고 한다. 혼례는 미리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까지 사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신랑은 안부(雁夫)의 안내를 받으면서 신부집으로 향한다. 신부집에 다다른 신랑은 우선 기러기(나무로 만든 것으로 목안木雁이라고 한다. 기러기는 순절殉節의 새로 인식되어 기러기로써 혼약을 맹서한다는 뜻이다)를 바친다. 이 기러기는 보통 신부의 어머니가 받아서 치마에 싸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이 기러기를 바치는 일이 혼례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전안례(奠雁禮), 전안청(奠雁廳)이란 용어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예서(禮書)에는 기러기를 바친 신랑이 신부의 부친에게 인사를 하고 곧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신랑 신부의 합환(合歡)의 의식을 거행한다고 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신부집에서 모든 의식을 마치고 신랑집에 와서는 연회만을 한다.
전안례(奠雁禮)는, 신부집에서 하든 신랑집에서 하든 전통적인 절차는 이렇다. 즉, 신랑이 기러기를 안고 전안청에 이르면 주인(장인)이 먼저 대청에 올라가서 서쪽을 향해서 서고, 신랑은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북쪽을 향하여 기러기를 땅에 놓는다. 그러면 주인을 모시고 있던 자가 기러기를 받는다(근래에 와서는 장모가 받지만). 이때 신랑은 두 번 절을 한다. 장인은 그 절에 대해서는 응답을 하지 않는다. 전안이 끝나면 신랑 신부의 상견례가 있고 합근(合근) 혹은 합환(合歡)의 술잔을 각각 마시게 함으로써 의식은 끝나고 이로써 정식 부부가 되는 것이다.
상견례(相見禮)는 가운데에 큰 상을 놓고, 신랑은 서쪽에서 동향으로 서고, 신부는 동쪽에서 서향으로 선다. 주례자의 안내로 신부와 신랑이 각각 큰 절을 한다. 합환주는 청실 홍실을 드리운 술잔을 신랑 신부에게 돌려서 조금씩 마시게 한다. 신부의 복장은 족두리 혹은 화관(花冠)을 쓰고 원삼을 입는다.
이 식이 끝나면(신부집에서 행했을 경우) 신랑은 나와서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향하게 된다. (신부집에서 신방을 차려 이틀밤을 묵고 사흘만에 시집으로 가는 것이 보편적 관례가 되었다). 신랑집으로 갈 때 신부는 수모(手母)가 안내한다. 이 행렬의 제일 앞에는 초롱을 든 하인이 서고 다음에 신랑, 신부, 후행의 순서로 진행한다. 이렇게 혼례를 치루고 시집에 들면, 그 이튿날 아침에 신부는 시부모를 비롯하여 시집의 여러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시아버지가 새며느리를 데리고 사당에 가서 인사를 시킨다. 또 그 이튿날 사위는 처가에 가서 장인 장모와 처가 어른들에게 인사를 함으로써 복잡한 혼인 육례(六禮)는 끝난다. (육례는 納采, 問名, 納吉, 納幣, 請期, 親迎의 周六禮의 절차이나 이는 문헌에만 있을 뿐, 실제로는 이대로 행한 예는 거의 없고, 전통 육례로서 婚談, 四柱, 擇日, 納幣, 禮式, 于歸의 절차에 의해서 행해졌다).
육례 이외에도 사례(四禮)의 약식이 있는데, 이것은 의혼(議婚, 중매자로 청혼하는 것),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네 가지 절차다. 이것도 대개 육례와 비슷한 형식이다.
육례식에서 중요시 되는 것은 우선 양가의 대등한 위치를 견지하면서도 대개 남자측에서 능동적이라는 것, 양가가 모두 선조 사당에 보고하는 절차, 그리고 신랑 신부가 각각 자기 부모에게 엄숙히 인사하고 그 부모는 자식에게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각별한 부탁을 내리는 것 등이다. 간택이나 입장가(入丈家)의 폐해를 없앤 비교적 합리적인 예의를 갖춘 혼속(婚俗)이라 할 수 있다.
# 혼례에 따르는 민속
서민들의 결혼도 대개 육례의 절차를 거쳐서 친영(親迎)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에는 으례 민속적인 행사가 따르고 있다. 그것은 폐백을 털어먹는 풍속과, 신방 지키기와, 신랑 달기 등이다. 이것들은 언뜻 보기에는 미풍양속 같기도 하고, 또 그런 민속이 생길 만한 합리적인 근거도 발견되지만 여러 가지의 폐해도 따른다.
& 폐백 털기
육례 가운데 납징(納徵, 신랑 집에서 신부집에 선물을 보내는 것)이라는 것이 있다. 서울의 풍속은 결혼하기 전에 신랑집에서 폐백을 신부집에 보낼 때에 종을 성장시켜서 폐백을 지워 보낸다. 신부집에서는 대청마루에 촛불을 밝히고 폐백을 받게 마련이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들, 또는 이른바 건달패들이 성군작당(成群作黨)하여 신부집에 뛰어들어 혼잡한 틈을 타서 촛대를 훔치고 여러 기물을 빼앗으면서 술과 음식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배불리 먹고 마신 다음에야 훔친 물건을 돌려준다. 이것이 폐백털기(打封徵)인데, 근래에는 그 흔적은 약간 남아 있는 것 같으나 기물을 훔친다거나 난동을 부리는 폐습은 없다. 신랑 친구들이 함을 지고 가서 신부집에 돈을 뜯어내는 엉뚱한 풍습이 폐백 털기의 한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잔치 전야의 축제 기분을 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의의가 있으나, 성군작당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 신방 지키기
결혼 후 신랑 신부가 한방에서 사흘밤을 지내는데 이를 신방이라 한다. 만일 신랑이나 신부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면 장성한 후에 따로 택일을 하여 신방을 차리기도 한다. 이 방에는 신부집의 여러 여인들이 신방 주위에 모여서 문틈으로 신방의 동정을 엿본다.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아가며 신랑 신부의 동정을 살피는데 이것을 신방 지키기(守新房)라고 한다.
이덕무는 이 폐해를 논하여 "이 습속은 부정하다. 신부집에서 신랑을 맞이하여 사흘을 지낼 때 집안의 부녀자들이 신방을 엿보며 몰래 그들의 정담을 엿듣는 것은 지나친 장난이다" 라고 했다. 이런 풍습이 생기게 된 연유는 대개 신방에서 돌발적인 사고, 예를 들면 급살을 당한다든가 또는 악귀가 침입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지킨다고 한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이런 일례가 인용되어 있다.
<<<어떤 선비의 전처 소생 딸이 신랑을 맞이하여 신방을 차렸는데 밤중에 문 밖에서 칼을 든 도둑이 큰 소리로 외쳤다. "신랑아 나오너라. 안 나오면 이 칼로 네 목을 베겠다."
이에 신랑이 놀라서 뛰어나가려고 하니 신부가 그 옷을 잡고 못 나가게 하고 자기가 나가서 처치하겠노라고 하고는 뛰어나가 그 도둑을 안고 호소했다. "어머니, 어머니 이것이 웬 일입니까?" 그 도둑은 칼을 버리고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마침내 집안 식구들이 촛불을 밝히고 나가보니 그 도둑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신부의 계모였다는 것이다. 이튿날 신랑은 그 장모의 나쁜 것을 알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고, 계모는 마침내 전처의 딸을 죽여서 파묻었다는 이야기다.>>>
대개 신혼부부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있어 그 초야에 모해하려는 일들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신방 지키는 풍속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민속 치고는 그리 아름다운 것은 못된다.
& 신랑 달기
중국 혼속에 신부를 희롱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곧 많은 친구와 친척 앞에서 더럽고 음탕한 말로 신부에게 질문하여 신부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고, 바늘로 살을 찌르기도 하고, 신발까지 벗기기도 하는 악습이었던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이 기록을 인용하여, 우리 풍속에는, 신부를 희롱하는 악습은 없으나 잔칫날에 무례한 무리들이 술과 고기를 강요하고 혹시 그것이 부족하면 칼로 장막을 찢고 기구를 때려부수는 버릇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신랑이 신부집에 갔을 때 소년배나 또는 무리배들이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그 발바닥을 때리며 이른바 남의 딸을 훔쳐간 죄를 문책하는 일이 있다. 이때에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담과 욕을 퍼부으며 신랑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술과 고기를 강요하는데, 이 풍속은 예로부터 내려온 고풍(古風)인 것이다. 이것을 소위 동상례(東床은 사위, 신부집에서 신랑의 친구를 대접하는 잔치)라고 하지만 지나치면 예에 어긋난다고 하여 식자들은 그 폐해를 극구 비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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