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지상(至上)의 가치를 가진 인간의 감정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씨앗은 반드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나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된 고령의 외할머니를 우리집으로 모셔 임종하실 때까지 종신으로 모신 일이 있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도리였다고 생각된다. 흔히들 육친간의 사랑에는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지만 내 경우는 내리사랑에 대한 치사랑을 실천한 셈이 된다.
아들이 절대적이었던 시절, 우리 외할머니는 딸만 내리 다섯을 낳았으니 그야말로 칠거지악(七去之惡)의 멍에를 짊어진 한국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맏딸인 내 어머니 역시 딸 셋을 내리 낳고 내가 태어났으니 외할머니의 입장에서 나는 장중보옥으로 구원의 존재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외할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은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는 무한대의 것이었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외손자인 나에게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못낳았으니 자연히 인생의 후반을 딸네집으로 옮겨 다니시며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산을 따로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니었고, 외할아버지께서 아들을 얻기 위하여 얻은 소실 태생의 아들이 있었으나 시앗을 보아넘기지 못하는 성미인데다 물려준 유산마저 탕진한 시앗 아들에게 얹혀 있을 형편도 못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째 사위가 되는 이모부가 생활이 넉넉했던 관계로 기력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 이모님 댁에 기식하면서 편히 계실 수가 있었다. 이모부는 장모가 되는 외할머니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극진히 잘 모셨다. 종신토록 호사스럽게 모실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남이 부러워할 정도였더란다. 수의(壽衣)와 옻칠을 한 관까지 준비해두셨더란 이야기를 나는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시절이 외할머니로서는 일생 일대를 두고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가 외할머니의 일생을 짚어 본 결과다.
그런데 사람이 오래 살다가 보면 인생을 마감하는 차례걸음이 순서가 뒤바뀌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부모를 앞질러 자식이 먼저 죽는 일이 그것이다. 불행한 결과이지만 그게 어찌 사람의 뜻대로 되는 일인가. 외할머니를 친아들 이상의 입장에서 그렇게 모셨던 이모부께서 단명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대주가 없으니 재산도 기울게 마련이다. 그 때 외할머니는 그런 일마저도 당신의 복이 없는 탓이라 생각하셨을 분이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외할머니의 성품이다.
외할머니는 또다시 이 딸 저 딸, 딸네 집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유산을 몽땅 날려버리고 이미 외할아버지를 양로원으로 보내 돌아가시게 한, 시앗이 낳은 아들에게 돌아갈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그런 저런 세월을 흘려 80을 훨씬 넘긴 외할머니의 인생을 마감할 기착지가 없었다. 그 시점에서 외손자 외손부가 되는 우리 부부가 외할머니의 만년을 책임지기로 자청하였다.
그때 이미 우리 부부는 환갑을 훨씬 넘긴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는데다가 미성의 형제 자매까지 한집에 있었으니 보통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다. 그 당시 중학교 선생이었던 나의 월급을 주된 수입원으로 하여 대지 마흔 평 건평 스무평 짜리 좁은 집에서 부모 형제 부부 3자녀 합해 모두 아홉 식구가 살고 있었다. 외할머니를 모시겠다는 뜻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부친께서는 어처구니가 없으셨던 모양으로 우리까지 얹혀 있는데, 이 많은 식구가 농촌도 아닌 대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냐고 야단을 치셨지만, 가정을 이끌어 가는 모든 일을 우리 두 부부의 판단에 일임을 하고 있었던 터라, 체면이 서지는 않았겠지만 굳이 반대하지는 못하셨다.
아홉 식구에 외할머니를 더하여 열 식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침실 공간은 5개라야 하는데 외할머니를 모실 공간은 또다시 1개가 더 필요하였다. 한 평 남짓한 작은 부엌 하나를 방으로 만들어 놓고, 그 당시 서울 이모집에 계셨던 외할머니를 모시러 우리 부부가 갔다. 기억에도 생생한 1972년 6월 6일 현충일이었다. 이모님들을 비롯한 외가쪽 가족들은 노부모를 어렵게 모시고 있는 외손자가 외할머니까지 한 집에서 모시려는 우리 부부의 성의를 안쓰러워 하면서도 감탄을 하였다.
자선이든 효행이든 주위 사람들이 감동하고 진심으로 갈채를 받을 수 있는 행위. 그것은 선량한 사람의 마음이 창출해 낸 위대함이라고 우리 부부는 확신하였다.
고속도로가 막 개통된 직후라 고속버스로 서울 부산을 드나들던 분위기에서 우리 부부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난생 처음으로 고속버스라는 걸 탔다. 지금이라면 우리 실정, 우리 체형에 맞도록 제작된 여러 가지 국산 고속버스가 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고속버스를 미국에서 수입해서 운행하던 시절이었다. 간이 화장실이 있고 사냥개 그림이 그려진, 이름하여 '그레이하운드'라고 하는 고속버스였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이 아니지만 그 때 생각에는 서양 사람들의 체형에나 맞도록 제작된 그 버스의 좌석이 오히려 불편하였다. 그런 버스 좌석에 본래부터 작은 체구에 고령의 나이로 허리마저 꼬부라져 한 줌 번데기같이 옹그라 드신 외할머니를 앉히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였다. 할 수 없이 무릎에 안았다.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몰려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괘념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내가 어렸던 시절, 어린 나를 이렇게 안아 애지중지 하면서 키웠을 외할머니를 떠올리면서 흔들리는 그레이하운드의 차창 밖으로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내가 받은 외할머니의 사랑을 회억하면서 법열과도 같은 희열을 느꼈다. 어떤 노인네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환자인가 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의지할 데가 없어진 외할머니를 우리집으로 모셔 간다는 안사람의 설명을 듣고는 요즘 세상에 드문 효자부부라고 감동들을 하던 것이었다. 참으로 육친애라는 것은 내리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치사랑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실감하고 있었다.
허리는 꼬부라지셔도 우리 외할머니는 강건하신 노인이셨다. 그만큼 모시기도 편하였다. 우리 집으로 오신 이후 비로소 안식처를 찾아드셨다는 안도감에서 늘상 환한 표정을 지으셨다. 옛날 우리고장 안의의 질군내기(길군락) 민요를 잘하셔서 내가 청하면 외손자인 나의 청에 못 이겨 "요옹추우 포옥포야하 네에헤 잘 있거어라아아 며엉녀언 추운 사암워월에 다아시이 오오마아하 ......"하고 기억도 생생하게 들려 주시던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사진에라도 많이 담아두고 싶어 정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드리려고 하면, "아서라! 늙은 모습 보기 싫다."고 하시면서 거절하는,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시는 성품이셨다.
그런 외할머니였는데 어느날 집을 지키고 있던 식모아이로부터 밖에 나가 있는 우리 부부에게 큰 일이 났다는 연락이 왔다. 외할머니가 심상치 않다면서 빨리 와 보라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니 외할머니는 의식을 잃고 돌아가신 듯 쓰러져 있었고 방바닥에는 풀어헤쳐진 쥐약봉지가 있었다. 자살을 기도하셨던 것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응급조치를 했지만 워낙 독성이 강한 독극물이었기 때문에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식경이나 지났을까 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회복의 기미가 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 외할머니! ' 하면서 우리 부부는 울며 불며 외쳐댔다. 그런 한참만에 외할머니는 어렴풋이 눈을 뜨고 우리들 부부를 올려다 보시면서 회한의 눈물을 지으시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소생을 하신 것이다.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여 "외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면 우리 처지가 어떻게 되겠어요." 하면서 핀잔을 했더니, 그런 우리의 입장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셨던지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시는 걸 보니 어린애 같기도 하였다.
외할머니의 자살기도 사건을 헤아려 보니, 당신께서는 언제인가부터 벌써 작정을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복도 없이 살아가는 길고도 질긴 목숨이 원망스러워 스스로의 목숨을 결단하기 위하여 쥐약을 준비하고 다녔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쥐약 한봉지를 통째로 음독하고도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이미 오랜 세월을 간직해 오는 동안 독성이 소멸되었던 결과였음이 분명하였다.
외할머니께서 굳이 우리집에서 자살을 기도하신 뜻을 짚어보니 우리들의 불효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가 아니라 비로소 생을 마감해도 좋을 안식처를 찾아들었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당신의 죽음을 거두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스스로 돌아가시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자살 시도였다.
그 후 외할머니는 우리집에서 2년 6개월 3일을 더 사시다가 1974년 9월 9일 86세를 일기로 자연사 하셨다. 대수롭지도 않은 설사병으로 하루를 몸져 누우시다가 짚불이 사그라들듯이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34년 전의 일이다.
여 강
'여강의 글A(창작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세대의 어두운 시절 (0) | 2008.08.10 |
---|---|
매미와 제트엔진 (0) | 2008.06.24 |
어버이 날의 카네이션 (0) | 2008.05.08 |
내가 겪은 4.19 (0) | 2008.04.19 |
연미의 목사취임 초청장 (0) | 2008.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