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어떤 세대의 어두운 시절

如岡園 2008. 8. 10. 00:19

 금년 8월15일은 광복 63주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이 되는 해다.

 해방이 되던 해 여덟 살 나이로 국민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그래도 그 나름대로 철이 들기 시작하였던 시절이다. 6학년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3년 동안의 전란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어른들 아이들 남자들 여자들의 한숨 눈물 통탄 절규를 보고 듣고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청년기를 맞이했던 나보다 열 살 전후로 나이가 많았던 앞선 세대의 비극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이 어린 소년이고 천진난만할 수 있었던 우리는 다소 명암이 교차하긴 해도 즐거운 추억도 많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가 놀이터였고 버려진 탱크의 포신 깡통 탄피가 유일한 장난감이었다.

 그 시절 염씨네 장남과 우리 뒷집 김씨의 의붓아들로 성이 이가인 S와, 한쪽 눈에 미영씨(목화의 씨앗 -눈의 수정체에 이상이 있어 검은창에 목화씨앗이 박힌 것 같았다)가 박힌 섭이라는 친구와 나는 특히 친한 동무가 되어 놀았는데, 한쪽 눈이 까마귀가 파먹은 듯 옴폭 들어간 외눈박이는 '또 물래 까옥'이었지만 이 친구는 그냥 무명씨가 박힌듯 눈의 검은창을 덮었으니 눈에 미영씨 박힌 친구다.

 이 친구는 그네 아버지가 일찍 죽은 여러 형제 중 막내였는데, 워낙 집이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여름이면 다 떨어진 삼베 고쟁이에 치수가 턱없이 작은 삼베 적삼을 입어 항상 배꼽을 내놓고 다녔고, 국민학교 1학년 때까지도 제 엄마의 쭈그러든 젖을 빨던 친구라 곧잘 놀림감이 되었다.  6.25 전후, 공비가 준동했던 지리산 주변 지역에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학생들이 등하교를 할 때 마을 단위로 정열하여 대오를 지어 발맞추고 구령을 외치며 행진해 통학을 하도록 해서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는데, 이 친구를 그 쑥스러운 호령대장을 시켜 놓으면 우쭐대고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것말고도 좀 어수선하고 막되어먹었던 이 친구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부산에서 양키 물건을 행상하는 형을 두고 있어 어쩌다 치약이나 양담배를 몰래 가져와 상큼한 치약을 나누어 핥아먹기도 하고 논두렁 밑에서 박하향이 은근한 양담배 '살렘'을 나누어 피우다 콜록거리며 악동으로 길들여지는 스릴에 도취하던 원인 제공자였기 때문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 이 친구는 천만다행으로 우리 곁을 훌쩍 떠나버렸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때 동창회 수첩을 만들면서 사진을 안 낸 사람의 자리에는 공란으로 비워두는 것이 아무래도 이가 빠진 것 같아 그 자리에 신라시대의 미소짓는 수막새 기와 사진으로 채웠더니, 그 유명한 수막새 신라 유물의 가치를 알 리가 없는 이 친구가 화를 벼락같이 내는 것이었다. 자기만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외눈박이로 평생을 콤프렉스에 쌓였던 그에게 완전한 모습도 아닌 깨어진 수막새 기와 조각에 괴상한 문양이 들어 있는 사진을 자신의 인물사진 대신으로 끼워놓았으니 모욕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전쟁이 스치고 간 그 시절은 삼시 세 끼 끼니를 따지는 데도 급급하고 군것질할 것마저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라, 주로 남의 집 참외밭 토마토 밭을 습격하여(전쟁 시절이라 주로 그런 표현이 더 어울렸다.) 참외나 토마토를 훔쳐 따 먹는 일이나 과수원집 복숭아 밭에 몰래 숨어들어가 복숭아를 축내는 일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지르곤 했다. 그것까진 그래도 참외서리 복숭아서리라는 이름으로 눈감아 둘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후 모종의 기묘한 절도 행각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던 데는 그것이 비록 개구쟁이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쳐도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한 짓이 아니었나 싶어 고소가 머금어진다.

 그 절도 행각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염씨네 곳간에 추수해 놓은 쌀 한가마니를 통째로 들어내어다 읍내 최씨네 엿방에 갖다 주고 엿과 맞바꾸어 먹는 일이었다. 염씨네 장남도 함께 끼어들어 저지른 일이라 자기집 쌀을 같이 몰래 들어낸 것이니 생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보기엔 무엇하지만 도적질의 방법치고는 영악스럽다고 할 만큼 지능적이었다. 신발을 거꾸로 신어 족적을 혼란스럽게 했는가 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쌀을 흩뿌려 도적이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가다가 쌀을 흘린 것처럼 위장하였다.

 도적질을 할 만큼 간이 크지 못했던 내가 직접 행동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우리 집 나의 공부방에서 계획하였고 쌀 한가마니와 맞바꾼 엿을 여러 차례 분할하여 우리집 뒤안 짚동더미 속에 숨겨두고 무시로 드나들며 겨우내 셋이서 나누어 먹었으니 나 역시 공범관계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머니를 졸라대어 보리쌀 한 가마니로 하모니카를 사서 불던 나 같은 사랑, 나와 같은 은전을 받아보지 못한 염씨네 장남과 의붓아들로 천대받던 S의 환경에서 천진한 욕망이 저지른 해프닝이고 추억이어서 그것마저도 그립다.

 호적법이 바뀐다면 '金李00'이나 '李裵00'으로도 불릴 법한, 아버지의 성은 金인데 너는 왜 李인가고 의아해 하던 주위의 시선이 따가왔던 그는, 중학으로 진학할 엄두도 못내고 의붓아버지집 머슴처럼 일하다가 사춘기를 벗어날 즈음 나의 공부방에서 가출의 첫밤을 자고 서울로 줄행낭을 쳤고, 또다시 서울에서 부산으로 도망나온 것이 그 나름의 진출이고 출세의 가도가 된 것이었지만 의지가지 없는 타향에서 뿌리내리기가 어찌 한 해 두 해 만에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서울 못공장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공장일 뒤치다꺼리에 중노동을 감당할 수 없었던 S는 부산 천마산 기슭 콩나물 공장(말이 공장이지 콩나물을 기르는 움막이었다)에서 허리가 휘도록 물 주는 일에 진력이 나서 그것마저 그만 두고 주류 도매상 배달꾼으로 들어섰던 것이 장사꾼으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더란다. 소주를 비롯한 주류의 유통 구조와 마진을 상세히 꿴 그는 구멍가게를 세내어 술장사를 하게 되었고, 정품 소주의 공식 마진으로는 돈 될 것이 없으니 아예 에틸알코올에 물을 탄 가짜 소주를 정품 소주병과 병마개로 위장하여 진품으로 둔갑시켜 폭리를 거둔 것이다. 그 당시 세월은 모두 그렇고 그런 방법으로 살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대를 이어갈 장남은 부모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어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면 부자대로 농촌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었지만, 염씨네 둘째 아들 B는 그래도 개성이 강하고 자립심이 있어 그 형과는 대조적이었다. 고집이 세고 한번 뜻한 일은 기어코 해내고 마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성품이다. 장남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농사꾼이 되고 만 것에 비하면 진취적 행동파여서 뒷집 이씨 성을 가진 S의 전례에 따라 새벽길 가출을 했던 것이 출세(출세라야 맨손으로 가출했으니 도시로 나와 남의 집 잔심부름에서부터 출발하여 이것저것 먹을거리 장사까지 안 한 것 없이 돈을 모아 부동산을 장만하고 땅값 집값이 오르는 바람에 재산이 증식된 것이지만)의 가도에 올라선 것이다.

 부산까지 내려올 차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처마 끝에 매달아 둔 마늘 석접을 부모님 몰래 장날 내어다 팔아둔 돈으로 차비만 해 내려와 안 한 고생 없었노라고 눈물지어 술회한 것이 엊그제 같다. 아닌게 아니라 그 시절 고향에서 부산까지 단 한 편의 정기 버스편, 새벽 4시에 출발하여 진주 마산에서 한 두 시간 정차하여 손님을 내리고 태우고 하며 쉬다가 또 몇차례 타이어 펑크 수리까지 해가며 자갈밭 비포장 도로를 달려 충무동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면 겨울의 짧은 해가 거물거물 넘어가는 다섯 시나 되었던 것이었다.

 뼈빠지게 돈을 벌어 먹고 살만 해지니까 돈자랑도 하고 싶어 그만그만한 또래의 고향 친구들에게 술 대접 밥 대접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게 되었고, 숫제 등을 대고 은근히 기대는 염치없는 친구의 등쌀에 난색도 드러낸 일이 있어 터무니 없이 짠돌이라는 핀잔도 듣게 마련이었다.

 1960년대 남녀를 불문하고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로 포화상태를 이루었던 도시는 그래도 삶의 숨결로 달아오른 용광로였다. 새벽이 부산하게 바쁘고 통행금지에 쫓기면서도 일거리에 영일이 없이 하루가 아쉬웠던 세월! 24시간을 2교대 3교대로 뼈가 으스러지게 일하면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를 후원하고 자식을 공부시켰다. 공부하지 못한 것이 철천지한이 되어 오로지 자식에겐 공부 공부였다. 대리성취였던 게다.

 염가네 둘째 아들 역시 자신이 시골 중학교까지 밖에 나오고 만 것에 한이 맺혀 아들을 대학에 진학시킨 걸 큰 자랑으로 여겼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제일이라는 대학을 나오게 되었다니 으스댈만도 한 것이었는데 언젠가는 의기소침한 모습이 되어 걱정을 털어놓는 걸 보니 곁에서 들어도 딱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랑을 했던 대학을 졸업했는데 취직할 곳이 없더란 것이다. 대학의 교명에만 현혹되어 그 대학의 입학만을 바랐던 것이고 전공학과의 선택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고등학교 진학지도 때 명문대학 합격 숫자 올리기에 얹혀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이 체질로 밴 실무적인 그가 또다른 인생살이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어차피 그런 시대 그런 세월을 보낸 그런 세대는 샌드위치 세대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은 맨손에 가난을 물려받아 허기졌고 궂은 일로 허리 휘게 일하여 노령의 부모 봉양에,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젊음을 보냈으니 위로 아래로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닌가.

 무실역행한 노령의 대가로, 나이드신 어른들께서는 새로운 시대에 간섭을 접고 그만 집에서 쉬라고 해서 분노를 산 적이 있었다. 역사의 흐름에서 얼룩진 과거는 세탁하고 청소할 것이 아니라 쓰다듬고 보듬어 어루만져 주어야 할 정신적인 그 무엇이다. 해방 63년, 건국 60년, 지금 환갑을 넘긴 나이에서부터 아직까지 이승에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그만그만한 세대들이 아픈 역사를 살아온 현실을 소중하게 재조명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늙어갈수록 짙어진다.

 세월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어쩌면 온고지신(溫故知新)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맹목적 개혁이 전진의 수레바퀴를 잘못 굴리는 데서 오는 반작용인지도 모른다.

 친일의 후손이란 굴레를 뒤집어 쓰고 전전긍긍해야 할 자를 만들어내고, 애국지사의 후손으로 조상의 뼈를 팔아 득의만면한 자를 만들어 으스대도록 하는 것이 하필이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거사를 헤집고 뒤적거려 보니 한몸뚱이에 애국지사의 후손이라는 영예와 친일 앞잡이의 후손이란 오명이 오버랩 된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지금부터 63년 전인 1945년, 00공립국민학교 1학년 교실에서는 요시가네 사이강(慶金在煥)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을 부르는 조선인 마쓰모도 선생의 호명에 '하이' 하고 대답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독립지사의 후손도 아니고 매국노의 후손도 아니어서 오늘에 영예스러울 것도 없고 오욕될 것도 없다는 데 나는 다행함을 느낄 따름이다.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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