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어버이날을 기해서 아이들이 1박 2일 일정으로 모처럼 한 번 가족 여행이나 하자고 하여, 강원도 평창 봉평 용평 대관령 일대를 두루 여행한 일이 있다.
여행이라면 응당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 놀라운 일에 대한 견문, 마음에 느끼는 신선함이 있어야 여행을 하는 의미가 살아나는 것인데, 종심의 나이로 접어들다 보니 국내 여행이고 외국 여행이고 간에 여행이 가져다 주는 호기심과 감흥과 긴장을 느낄 수가 없어 되도록 접어두기로 했는데, 이번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여행이고 또 아시아의 알프스로 자랑하여 동계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던 곳이기도 하여 그 나름대로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선뜻 따라 나섰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여러 번 여행을 했던 곳이라 뻔한 곳이기도 하지만,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 손녀들까지 아우른 만큼 관광 휴양에 학습 효과까지를 생각했어야 했으니 가 볼 만한 곳을 미리 작정해야 했다. 용평 리조트니, 휘닉스파크니 하는 곳은 계절도 계절이었으려니와 젊은 아이들은 더러 가 보았던 모양이고, 오대산 월정사나 상원사는 아버지 어머니들 관광코스라 그것도 별로였으며, 이승복 생가 터와 기념관은 반공을 무슨 사약처럼 인식하는 시대가 되어버려 관심 밖으로 훨씬 밀려 나 있었다. 그 대신 내 눈에는 코미디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세트장이 대단한 관광지로 부상되어 있어 세태 인심의 표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강원도 평창 가족 여행 관광 목표는 평창무이예술관, 효석문화마을, 허브나라, 삼양대관령목장으로 한정했다. 평창무이예술관은 예원학교에 들어간 미술 전공의 외손녀딸을 의식해서였고, 효석문화마을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이름을 낸 이효석을 기려 조성한 관광 마을이었으니 평창 봉평을 지나며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허브나라는 100여 종의 허브를 재배 전시 판매하는 농장으로, 지나는 길에 들리기로 했다.
삼양대관령목장은 우리 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을 정도로 조금은 이국적인 목장 풍경이었다. 스위스 알프스를 여행하면서 우리 나라도 조국 근대화를 외쳐 국토 개발을 서두를 때에 피폐한 산야를 이런 식으로 개발하였더라면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소박한 이상이 늦게나마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현장이라 가슴뿌듯하였다. 이만한 구경거리에 국내 관광객이 줄을 지어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광경이 조금은 초라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하찮은 멜로드라마나 무슨무슨 영화의 촬영 장소라고 붙은 팻말이 오히려 딱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관광 자원의 활용에 있어 관심의 향방이 이것밖에 안되는가 싶어 실소를 하기도 했다.
효석문화마을의 관광에는 심기가 좀 엇갈린다. 한 문학자의 힘은 크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한 초가에서 출생한 이효석이 1936년 '조광'에 고향을 셋팅으로 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여 봉평 땅을 아름다운 문학 기행의 명소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고향이 효석을 키웠다기보다 향토의 아름다움을 그려준 효석에게 이 고장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효석의 명성을 팔아먹거나 매도하는 인심에는 배신감이 감돈다. 친일 작가라 하여 친일 사전에 덩그마니 올려놓는 일에 앞장서서 쾌재하는 인심은 무엇이며, 효석의 생가 터라 하여 가상의 기와집을 지어 관광객을 유치하는 꼴은 무엇인가?
기념문학관을 열어 효석의 문학 행적을 기리는 것은 좋은데 유료입장을 시키는 것도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조작된 충주집, 물레방앗간, 장터거리의 풍경이며, 동물원 원숭이처럼 내어다 묶어놓은 애매한 나귀 한 마리가 눈이 멀뚱멀뚱 애처롭다. 허생원, 동이, 조선달의 이름표를 단, 막걸리 막국수 부침개가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린다. 문학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앞서 번뜩이는 상술에 작품으로 읽었던 '메밀꽃 필 무렵'의 상념을 흐리게 한다.
평창무이예술관은 평창을 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키워나가는 데에 한 몫을 하는 공간으로 자라고 있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 58번지 평창무이예술관은 1999년에 폐교된 무이초등학교를 폐교 스튜디오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2001년도에 예술관으로 개관하여 조각, 도예, 회화, 서예가 함께하는 작업실이자 오픈 스튜디오로 활용하고 있었다.
운동장이었던 야외 조각 공원에는 조각가 오상욱의 작품 150여 점을 전시하여 소통과 창작이 매개되는 열린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교실은 작업장 및 전시실로 꾸며 도예 조형 예술가 권순범의 도예작업 현장 및 생활도자기와 컴퓨터 소하체를 개발한 소하 이천섭의 서예 작품을 만날 수 있고, 30년간 메밀꽃을 그려온 서양화가 정연서 화백의 메밀꽃 그림을 접할 수 있는데, 이 메밀꽃 그림이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정서와 맞아떨어져 일품이다. 사실 봉평의 메밀꽃밭은 실제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것보다는 이 메밀꽃 풍경화를 사진으로 찍는 것이 더 아름답고 실감이 난다.
아무튼 이 평창무이예술관은 산골의 폐교를 소통과 창작이 매개되는 열린 공간으로 활용하여 예술 창작의 장이자 전시 공간으로 재활용한 모범적인 사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프로젝트였다.
효석문화마을이 한 작가의 소설 무대를 가상하여 재구현하고 있는 다소 진부하고 허구적인 향토 문화 유산의 발양이라면 무이예술관은 폐품을 재활용하여 예술을 창조하는 생산적인 예술 활동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연서 화백의 메밀꽃 풍경화에 반하여 한참 동안 전시실을 맴돌다가 야외 조각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던 나는 조형 예술 작품 하나 앞에서 몸이 굳어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생활 도구나 폐기된 자재들을 예술적으로 재구성 배치하여 작품화한 공간예술, 이 조형예술의 새로운 한 기법을 미술계에서 무엇이라 하는지 그 용어는 잘 모른다. 아무튼 그런 작품 하나를 보고 내가 깜짝 놀란 것은 작품으로서 그것이 잘 되고 못 되고가 아니라 그 소재에 대한 나 개인의 연고 때문이다.
바로 F86 터보 제트 엔진의 압축 컴프레스와 연소실을 해체, 해부하여 용접하고 공간적 예술적으로 배치 전시한 것이다. 작가가 그 재료를 무엇인지 알고 작품화했는지 모르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작품명도 게시되지 않았다. 일반 관람객의 시각으로는 그냥 기묘한 철제품 잔해의 미적 배치, 아니면 기계 문명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었다는 정도로만 인식되었을 것이지만 나는 이 조형미술 작품을 대하면서 깊은 감회에 젖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60년대 초 나는 제트 엔진 정비사로 만 3년간 공군에 복무를 한 일이 있다. ...(중략)...
제트 엔진 정비실이나 시운전실에서 우리들은 정확성과 엄밀성을 생명으로 하여 밤낮없이 나사를 풀고 죄고 부속품을 교환하는 엔진 정비를 해 왔다.
이런 기계와 더불어 사는 정비사 생활을 하다가 보면 기계가 아닌 생명체에 접하는 신비가 남다르다. ...(중략)...
그 시절 나는 제트 엔진 정비기수 자격으로 시운전실 직감이었다. ...(중략)...
제트 엔진 시운전실은 엔진 샵에서 정비를 마친 엔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비행기 동체에 장착하기 전에 지상에서 엔진을 작동시켜 시험하는 곳이어서 엔진의 구조나 작동상태를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제트 엔진을 정비 시운전하면서 겪은 애환도 많다. ...(중략)...
그 제트 엔진을 해부하여 예술적으로 구도를 잡아 여기 평창의 무이예술관 야외 조각 공원에 예술작품으로 전시하고 있었으니 만감이 교차하여 아연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F86 터보 제트 엔진 컴프레스가 돌면서 12단계 컴프레스 블레이드(compress blade)를 거치는 동안 4분의 1로 압축된 공기에 옥탄가 90의 가솔린 JP4를 분사한 연소실에 2만 볼트 고압전기 스파크로 불을 질러 폭발하는 에너지가 가스 터빈을 1분에 7,950 바퀴나 돌려내는 굉음을 나는 평생을 통하여 잊지 않고 있다.
그 제트 엔진의 컴프레스 섹션( compress section)을 해부하여 내장이 드러난 압축 블레이드는 아닌 게 아니라 예술적 시각에서 하나의 통일감이 있는 조형미를 갖추고 있기도 했다. 8개의 원통형 연소실을 다시 원형으로 배열한 컴버션 섹션(combustion section)을 받침대로 활용한 그 위에 반으로 절개된 고정 컴프레스 섹션 두 쪽을 연결 용접하여 얹어 놓고 그 옆에 회전 컴프레스 블레이드 유니트(rotary compress blade unit)를 자연스럽게 배치한 이 조형미술 작품은 그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작품으로 내놓은 사람이 과연 F86 제트 엔진을 알고 작품화 했을까 하는 것이 궁금했지만 그것을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이 조형물의 소재로 활용한 F86 제트 엔진이 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작품화한 사람과는 무슨 인연이 있는가, 이 조형예술 작품의 구성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몹시 궁금했지만 작가를 찾지는 못했다.
효석문화마을이 인근에 있었고, 6.25전쟁을 배경으로 했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세트장이 평창군 관내에 있었으니 그 영화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유추에서 발상한 것이나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지방 자치 단위로 지역 문화를 개발하여 널리 알리고 관광자원화하려는 의지를 탓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문화적 안목이 천박하고 치졸해서는 문화의 발양이 아니라 역으로 문화를 후퇴시키는 역작용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곳곳마다 무슨 드라마, 무슨 영화의 무대이고 촬영 현장이었노라고 야단스럽게 선전을 늘어놓는 일이다. 관광객을 유인하는 그런 팻말을 보고 따라가다가 보면 필연 실망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 우리 관광문화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조형 예술에 무지한 내 입장에서 평창무이예술관 야외 조각공원에 전시된 150여 점의 작품 하나하나를 평가할 능력은 없다. 그러면서도 유독 그 제트 엔진 잔해를 소재로 활용한 작품 하나에 관심하였던 것은, 그것이 젊은 시절 내 마음 속 깊이 각인된 제트 엔진에 대한 상념 하나를 촉발하였으므로 해서이다.
나는 그 조형물 앞에서 고막이 찢어질 듯한 제트 엔진의 굉음과 '찌이-' 하고 울어대는 여름날 한낮의 왕매미 소리의 환청을 들으며, 마음은 타임머신을 타고 46년 전의 대구 동촌비행장 K2공군기지 제트 엔진 테스트 셀(Zet engine Test cell)로 가고 있었다. (2008.8.20 동인지<길>9호)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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