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칠순의 사모곡(思母曲)

如岡園 2008. 8. 28. 09:48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과 희생은 이 세상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임신에서부터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긴 기간과 고통에 이어 영아에서 성인이 되기까지의 희생적인 양육과 보살핌, 그리고 일생을 두고 지속되는 사랑은 이 세상의 사랑 중 최상의 사랑이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모든 생명의 기원이며 양육자이고, 보호자이며, 따뜻함과 은신처이고, 생명의 창조자이자 육성자이다.

 <부모은중경>에서는 어머니의 은혜 열 가지를, "아이를 배어 지키고 호위하는 은혜, 해산에 임하여 고통받는 은혜,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토하는 은혜, 마른 데를 피하고 젖은 데로 나아가는 은혜, 젖 먹여 기르는 은혜, 좋지 않은 것을 씻고 가시는 은혜, 멀리 출타하면 생각하고 염려하는 은혜, 몹쓸 업을 짓는 은혜, 끝까지 어여뻐하며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들고 있다.

 동양에서는 주실삼모(周室三母)를 현모양처의 거울로 삼고 있는데, 태강 태임 태사가 그들이다. 그 중에서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은 왕을 잉태했을 때, 눈으로는 악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에는 교만한 말을 담지 않는 태교(胎敎)로 문왕을 거두어 낳았고, 무왕의 어머니 태사는 인자하고 도리가 밝아 열 아들을 낳아 기르되 어려서부터 성장하는 동안에 한 번도 사벽한 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문왕이 그 아들들을 가르쳐 이른바 무왕과 주공의 덕을 이루게 하였다. 특히 무왕은 선대의 유업을 이어 천하를 통일하고 사해(四海)를 풍요롭게 했는데 이에는 주(周)의 세 어머니 덕이 컸다고 한다.

 자녀교육의 귀감으로 삼고 있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모단기(孟母斷機),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썰기 일화는 모성이 자녀 양육에 어느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입증하는 실례다.

  자식이 험지(險地)에 빠질까 염려하고 경계하는 것도 모정(母情)이며 아들의 정진을 위한 따끔한 충고도 모정의 영향이 크다. 자식에 대한 모성의 영향력은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있어서 어머니는 생명적 정신적 고향이요, 영원한 안식처요, 낙원이다. 생명을 부여하고 그 생명에 영양을 제공하고 성장시킨 어머니야말로 인간의 원천적 고향이다. 

 

 미수(米壽)의 나이로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긴 긴 세월 동안 나에게 무시로 무상으로 무한정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공기와 물과 햇빛의 혜택처럼 그 소중함을 깨달을 여지가 없었고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그 은혜조차 마음에 새겨두지를 못했던 것 같다. 어쩌다 글을 쓰는 기회에도, 은혜나 사랑의 당연함 이외에 필설로 모두 말못할 무한량의 그 무엇이기에 불감당함을 이유로 자꾸만 회피되던 것이었던 것인데 그 자친(慈親)이 돌아가신지도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 내 나이도 일흔의 문턱을 올라서고 보니, 새삼스레 나를 길러주셨던 어머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1910년 당시 반촌(班村)의 중인계급이었던 파평 윤씨 가문에서 딸만 내리 여섯을 낳은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18세가 되던 해에 역시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인 외동 맏아들과 결혼하여 또 딸만 내리 셋을 낳은 후에 가까스로 아들 셋을 낳아 칠거지악(七去之惡)의 무자(無子)를 면한 셈이다. 

 자라났던 친정집보다는 생활이 풍족하지 않았고 일거리는 많았던 집안으로 시집을 들었으니 살림을 살아가기에도 영일이 없었던 세월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로서 현명하고 아내로서 어진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의식한 입지에 바탕하였다기보다, 순종을 미덕으로 알고 부창부수(夫唱婦隨) 여필종부(女必從夫)를 부도(婦道)의 지상 과제로 삼았던 것이 통상적인 어머니 상(像)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도 그런 어머니였다.

 요즈음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시부모나 남편에게 대립각을 세워 쟁취하고 앞장서서 리드하는 여성상이 아니라, 속 끓여 인내하고 기다리고, 눈물이 응축된 한을 마음에 새겨 안고, 그것을 자식에 대한 무한량의 사랑으로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그런 어머니였다.

 자식에 대한 모성적인 사랑이 하나의 파장으로 가정에 퍼져 나간다는 것은 순기능에서거나 역기능에서거나 간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영향하는 바가 크다.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집중된 운명이었다. 친가 쪽으로나 외가 쪽으로나 여자 투성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고 넘쳐나는 사랑, 그것은 또한 어떤 면으로는 큰 짐이 되기도 했다.

 응석받이로 떼쓰는 아이로, 나약한 어린이로, 숫기없는 남성으로 자라나기 십상이었다. 유년시절의 나는 어머니의 애를 태워 나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즐거워하기도 하였다. 사소한 일에도 비위가 거슬리기만 하면 자취를 숨겨, 걱정하는 모습으로 찾아나서는 어머니를 골탕먹이는 악동적 기질도 있었다. 순진한 어머니의 사랑을 역이용한 영악성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어머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모두 채워 주었다. 아이의 세계에서 욕구라는 것이 별게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적어도 어머니는 희생적이었다. 가난한 시골 중학교 저학년 시절, 하모니카를 갖고 싶어 안달하던 나에게 보리쌀 한 가마니를 장문에 내어다 팔아 그 번쩍거리는 하모니카를 사주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란 생각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가난한 시골 농촌 경제에서 일제 '야마하' 하모니카라는 물건은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는 먹성이 까다로와 어머니의 속깨나 썩인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 집 아이들, 손자들이 음식을 덥석덥석 먹어치우지 않는 걸 보고 애타는 심정을 생각하면 그 시절 어머니의 마음이 읽어진다.

 그 때는 여름나기가 문제였다. 꽁보리밥은 너무 거칠어서 문제고, 쌀을 얹어 섞은 여름철 쌀밥에는 응당 쌀벌레가 밥알 속에 섞여 있으니 질겁할 일이다. 숫제 참외나 토마토 밭으로 달려가 끼니를 따지는 아들이 안쓰러워 수제비며 칼국수를 마련하는 정성이 지금도 눈에 아련하다.

 모계(母系)의 내림으로 사육(四肉)을 못 먹어내어 두드러기가 일고 배를 굽틀면, 그것마저 안달이시다. 영양공급이 제대로 안될까 봐 곡식으로 맞바꾼 인삼과 씨암탉을 비틀어 허한 몸의 원기를 도우려 했던 정성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던 것은 자아가 눈뜨기 시작한 스무 살 고개를 넘어설 무렵이었다.

 객지의 자취생활에서 부실해진 영양을 보충해 준다는 뜻에서 특별 마련한 보신용 별식을 매정하게 거절하여 눈물을 머금게 한 불효를 실감한 것도 내가 부모의 입장이 되고 난 후였다.

 자식을 위해 무한량 쏟아 붓고 싶은 본능적 사랑에 제동을 거는 아들의 배반의 논리였고, 출산의 고통과 희생적인 자녀 양육, 그리고 이를 통한 끝없는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이 모성의 생리였던 것이다.

 며느리가 자신의 몫을 대신하게 되면서부터 당신의 관심은 아들인 나로부터 다소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슬하에 7남매를 두었고 백년해로 하는 부군도 있었으니 특별히 나에게만 편집될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간절히 바랐던 상황에서 낳은 아들이고 아들로서는 맏이였으니 다른 자녀들에게 쏟아 붓는 사랑의 온도보다 특별히 강한 열기로 다가왔던 게 아닌가 싶다.

 어느 어머니고 자식 사랑만은 극복할 수 없는 지고(至高) 지대(至大) 지순(至純)한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어머니의 피가 자기의 피와 살을 나눈 자녀에게 대한 사랑,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원시적인 굳센 힘인 것이니, 목숨이 끊어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변할 수 없는 자애(慈愛)인 것이다. 

 아버지의 의미는 인간의 문명 속에서 자라난 하나의 배양된 감정이지만, 어머니로서의 의의는 천성불멸(天性不滅)의 것이라고 하는데, 내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모든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힘을 갖기에는 너무도 천사처럼 순진했던 게 아닌가 싶다.

 

 자모유패자(慈母有悖子)라고 했던가? 기실 나는 내 스스로를 평가해 볼 때, 인자한 어머니에게 있어, 불효하고 버릇없는 자식이었음이 분명하다.

 내 어머니는 현모(賢母)라기 보다는 자모(慈母)에 가깝다고 판단되어, 자식이 귀여우면 때로는 사랑의 채찍을 들어 옳게 가르칠 줄도 아는 명(明)과 용(勇)을 가진 현모가 아니라는 점에서 저항했던, 심리적 기저(基底)를 감안한다 해도 불효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사랑과 미움은 동일한 심리의 양면이라고 하면 또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만년에 접어들어 돌아가시기까지 몇 년 동안 어머니를 미워하였다. 불효의 극치인 것이다. 사실 나는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룬 뒤까지 사뭇 부모님을 한집에서 모시고 여든 여덟에 돌아가실 때까지 살아온, 요즘 시대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이기도 했으니 어머니에 관한 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의 논리로 살아간 셈이다. 거기에는 집사람의 내조의 공이 절대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은 나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의 힘이 모든 악조건을 녹여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굳이 가훈(家訓) 같은 걸 내걸고 모토(motto) 있는 생활 설계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우리 가정의 가훈은 저절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된 셈이다.

 같이 사니까 효도할 것도 따로 없다. 어버이날 꽃을 달아 드리는 것도 열적어서 그만 두고, 찾아뵙고 용돈 드리고 문안 드리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서로 불편함이 없도록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남들은 어찌 그렇게 서로 불편하게 사느냐고 의아해 하지만, 호불호(好不好) 편불편(便不便)의 기준이 어디에 있냐 싶어 도리어 의아스러울 정도로 극히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자제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도 통제되지 않으면 마찰이 빚어지게 마련이다. 로고스적인 성향의 사람과 파도스적인 성향의 사람 간에 차이야 있겠지만 이성으로 통어되지 않는 정서의 분출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마그마(magma)와도 같은 것이다.

 어린 아들을 양육할 때의 본성적인 사랑이 승화되지 않은 상태로 80노모에게서 재연되는 상황을 목전에 당면할 때 어쩔 것인가!

 모정(母情)은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항상 어머니의 일방적 자식 사랑에 대립각을 세워 저항하고 급기야는 모정을 미워하는 불효를 자행하게 된 것이다.

 "경(敬)으로써 효도하기는 쉽고 사랑으로써 효도하기는 어렵다. 사랑으로써 효도하기는 쉬워도 부모를 잊기는 어렵다. 부모를 잊기는 쉬워도 부모 때문에 나를 잊기는 어렵다."고 장자(莊子)는 말했다.

 효도의 실체는 부모의 뜻을 받아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고령에 접어든 어버이의 안을 모두 받아줄 장사가 어디 있겠나 하는 것이 만년에 어머니에게 자행된 불효의 면죄부라면 면죄부일 수도 있다. 노부모를 모시는 자식에게 극단의 폐를 던져 주고 이승을 떠나는 경우를 두고, 흔히 정을 끊으려는 행위로 미화되고 있지만 사람이 너무 오래 살다가 보면 본의 아닌 폐단으로 작용하는 수도 있는 것을 어찌하랴.

 아무튼 나는 자모(慈母)의 무한량의 사랑에 질식할 것 같은 사랑 속에서 그것을 수용하기보단 저항하며 살아왔고, 그러한 어머니는 10년 전 여든 여덟의 춘추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칠순을 목전에 두고 모정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벅차오름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에 대하여 무한한 사모와 감격을 가진다. 일생에 변함없는 사모(思母),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욱 간절해지는 사모, 부처가 일신이라 하여도, 애인이 생명같이 중하다 하여도, 그것은 조건적인 것이며, 변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어머니에 대한 사모는 조건이 있을 수 없는 구원의 그리움이다.

 "호매도 날히언 마라난 낟가티 들리도 업스니이다 / 아바님도 어이어신 마라난 위 덩더둥셩 / 어마님 가티 괴시리 업셰라 / 아소 님하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셰라."

 고려 속가의 사모곡을 되뇌이며, 지금은 황천에 계신, 나를 길러 주셨던 어머니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 동인지 <길> 6호.  김재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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