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면 잠자는 동안에 생시와 마찬가지로 체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일컫는 것이지만, 외연을 확대시켜 보면 덧없음, 실현시키고 싶은 바람이나 이상,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공상적인 소망, 망상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꿈처럼 애매모호하고 불가사의한 정신 작용도 없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꿈을 신이나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꿈은 하나의 말로서 신이 보여주는 언어로 인식했다. 또한 꿈은 미래를 암시하고 인간에게 영능을 준다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꿈이 신의 메시지로서 인간의 회개를 요구하거나 경고하며 인간의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구약성서나 유대의 탈무드에는 여러 유형의 꿈과 그 해석이 있으며 꿈의 경솔한 해석을 금하였다.
중국인에 있어서 꿈은 잠잘 때에 몸을 떠나 돌아다니는 영혼의 체험이며,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해몽 전문가가 꿈을 해석하였고 후대로 와서는 해몽서에 의지하여 운명을 풀어보려 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꿈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꿈은 사람이 잠들 때 유혼(遊魂)의 변동으로 생긴다. 인상편(人相篇)을 보면 대체로 꿈의 경계는 신(神)이 심상(心上)에 노닐 때 생긴다. 그러나 그 노니는 한계가 멀지 않아 오장육부의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목시청(耳目視聽)의 문을 출입할 뿐이다. 백안선사의 말에 의하면 꿈이란 오경(五境)이 있는데, 영경(靈境), 보경(寶境), 과거경(過去境), 현재경(現在境), 미래경(未來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神)이 조(躁)하면 꿈이 생기고 신이 정(靜)하면 꿈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류의 꿈에 대한 관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긴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비합리적인 것을 경시하는 풍조에 의하여 퇴색된 것도 사실이다.
현대에 와서 초현실주의파나 표현주의파에 의하여 꿈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합리적 세계의 이면에 감추어진 무의식의 여러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드 이후 융의 분석 심리학과 빈서 방거, 보스의 실존 분석 등 그 밖의 많은 정신의학의 학파에 의해 꿈은 인간의 정신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정신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이용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다.
꿈에 대한 학문적 설명은 아무래도 프로이드 이론이 압권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꿈은 대개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한다. 꿈꾼 것을 이야기 할 때 꿈꾼 그대로를 정확히 이야기하기란 어렵고, 이야기하는 중에 조금씩 변경을 시키며 생각나지 않는 것은 적절히 꾸며 맞추어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꿈은 전연 회상할 수 없고 사소한 부스러기 이외는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꿈은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꿈에도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깨어날 때의 기분이 온종일 지속되는 수가 있어 그 날의 기분을 좌우하고, 중대한 사업의 시발을 꿈에서 얻었다는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도 있고 보면 꿈을 경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대의 민족들은 꿈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장래의 징조를 찾아내고 꿈속에서 전조를 찾았던 것이다. 옛날 그리스 인이나 다른 동양인들은 전쟁에 나갈 때는 꼭 꿈을 점치는 사람을 데리고 나갔고,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의 길을 떠날 때에 가장 유명한 해몽가를 동행하였다고 한다. 장래를 점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꿈의 판단은 그리스 로마 시대를 통하여 흔히 사용하고 존중되었던 것이다.
꿈에 대한 관심이 차차 미신으로 타락되어 꿈을 믿는다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무지로 치부되는 오늘이지만 아직도 꿈의 판단을 남용하고 있는 사례는 많다. 복권의 당첨 번호를 꿈으로 미리 알려는 일이나 지난 밤에 꾼 꿈이 그 날의 행동을 제어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꿈의 내용은 음악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열 개의 손가락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경우에 나는 소리와 같다고 하였으니, 무도병(舞蹈病)의 질서 없는 경련에 견줄 만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마음의 흔적 그것이 꿈의 활동이라고 볼 때 마음의 작용, 흔적까지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비록 꿈이 쓸데없는 것일지라도 여하튼 꿈이 존재하는 이상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것을 문제 삼고 설명해 보려는 것은 무방할 것이다.
꿈의 어떤 것은 대단히 짧고 단 한두 개의 이미지를 가지는 꿈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대단히 내용이 풍부하여 한 편의 소설을 전개시키고 오랜 시간 계속되는 꿈도 있다. 또 현실의 경험과 거의 같을 정도로 선명하여 꿈에서 깬 후에도 함참 동안 그것이 꿈이었던가를 의심하게 되는 꿈도 있고 아주 희미하여 애매한 것도 있다. 어떤 꿈은 의미가 심장하고 앞뒤 맥락이 딱 들어맞는 것도 있는가 하면, 기지(機智)가 풍부하고 환상과 같이 아름다운 것도 있다.
꿈은 깬 후에 바로 잊어버린다든가 저녁때까지는 점차 희미해져서 간신히 군데군데 생각이 나는 정도로 하루쯤 머리에 남기도 한다. 어릴 적에 꾼 꿈 같은 것은 몇십 년이 지난 후까지도 역력한 경험같이 기억될 정도로 오래 남는 꿈도 있다. 꿈은 여러 가지 사람 모양이 단 한 번에 나타나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같은 사람이 똑같은 모양이나 좀 다른 모양으로 되풀이 해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요컨대 밤에 나타나는 이 정신 활동의 찌꺼기는 제멋대로 풍부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낮에 정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내는 것이다.
내가 체험한 꿈 중에서 꿈과 현실의 대응 관계로 너무도 선명한 것은 복숭아와 모직 스웨트, 그리고 무당개구리의 꿈이다.
복숭아와 털 스웨타에 관한 꿈은 어렸을 때의 꿈인데, 꿈에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털이 보송보송한 복숭아를 실컷 따 먹고 호주머니에도 집어넣어 집으로 왔는데 그 복숭아 표면의 껄끄러운 털이 옷과 몸에 묻어, 팔이며 특히 목둘레가 어떻게나 가려운지 긁어대다가 잠이 깼다. 복숭아를 따 먹을 계절이 훨씬 지난 초겨울인데 무슨 복숭아 꿈인가. 그리고 목은 어찌 그리도 가려웠던가 싶었는데 그 날 저녁때가 되어서야 꿈에서 그 목둘레가 그렇게 가려웠던 감각이 현실로 나타났다. 다름 아니라 그 날 어머니가 새로 사온 털로 짠 스웨터를 입었는데 새 스웨터가 목에 닿아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 목에 와 닿는 껄끄러운 감촉이 어찌 그리도 꿈에 겪은 복숭아에서 느낀 것과 같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그 복숭아 꿈은 새 스웨터를 얻어 입을 전조로서의 꿈이었던 것이다.
무당개구리의 꿈은 40대 중반 때의 꿈인데, 꿈에서 본 그대로의 현상이 현실에 똑 같이 나타난 일이다. 어쩌다 한번씩 산책삼아 둘러서 내려가는 산속 퇴근길인데 무당개구리 한 마리가 배를 드러내고 넘어져 있어 그 흉물스런 붉은색 뱃바닥이 징그럽다고 몸서리를 치면서 잠을 깨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 이튿날 어쩌면 그렇게 평소에는 잘 안 다니던 그 퇴근길로 퇴근을 하게 되었고 그 퇴근길로 접어들어 물이 질척한 길섶에서 꿈에서 본 그대로의 무당개구리가 배를 뒤집어 흉물스런 배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꿈에서 본 것과 똑 같았던 것이다.
빈번한 일은 아니지만 이같이 꿈과 현실과의 상관성이 존재한다면 꿈에서 미래의 예시를 끌어내고 꿈에서 전조(前兆)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고 신비로운 것이 꿈이다. 믿을 바도 아니면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꿈이다.
현대 과학은 꿈이 대뇌, 즉 신경의 지배를 받는 일종의 실착된 현상, 깨어 있을 때의 심적 활동의 잔재이며 수면을 방해하는 것이라고도 했으니 꿈은 막연히 아무런 정신적 연관 없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해몽을 반드시 비과학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인간은 꿈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꿈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뀌어 나타나는 수가 많다. 이것을 프로이드는 꿈의 왜곡이라고 하는데 무의식적 소원의 어떤 변용인 것이다. 왜곡된 꿈의 내용 즉 꿈의 상징을 알아내는 것이 꿈의 해석이요 해몽이다. 꿈보다는 해몽이라는 말도 있어 해몽을 두고 인간 세상에는 여러 아이러니가 파생된다.
각설하고, 꿈 이야기를 가지고 구상(構想)한 우리의 옛 소설 하나를 이야기 하여야겠다.
필자가 고전문학을 연구하면서 한글 필사본 고소설 하나를 어렵게 입수하여 논문으로도 썼던 것인데 <메기장군 고담>이라는 제목의 고담식 동물우화소설이다. 동물우화이니 만큼 등장 인물은 모두 동물로 의인화되어 있다.
이것은 메기가 꾼 꿈을 두고 고래와 가자미의 상반된 해몽의 양 측면을 대비시켜, 사실과 거리가 멀면서도 비위나 맞추는 아첨이 오히려 대접을 받고 진실을 밝혀 주는 직언(直言)이 통하지 않는 아이러닉한 현실을 풍자한 작품인데 꿈에 관련된 것만을 이야기해 보려한다.
......<중략>......(작품에 대한 좀 상세한 내용은 여강의 글 (B) '동물을 빙자한 세상 이야기'에 있음)
소설에서의 꿈은 작품의 한 요소로서 참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소설 속의 꿈은 우선 이용면에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야기 전개에 있어 불가결의 계기물로서의 꿈이요, 다른 하나는 작품의 전개와는 상관없이 한 윤색적인 수식으로서의 꿈이다.
그런데 <메기장군 고담>에 있어서의 메기의 꿈은 소설의 전개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계기물로서, 이 꿈의 해석의 방향이 곧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관건이 되고 있다.
'하늘로 치친 듯하고 용상에 오른 듯하여 '야'자 금띠 띤 듯하고 옥설(玉雪)이 뿌린 듯하고 한출첨배(汗出沾背)한 듯하고 옥담을 넘어 붉은 고개 넘어 좁고 넓은 골목 휘돌아 돌문 밖에 뚝 떨어져 뵈는 형상의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과제이다. 소설에서는 이 꿈을 두고 고래장군은 용이 될 꿈이라고 해몽하였고 가자미는 어부의 낚시에 걸려 잡아먹혀 똥이 될 꿈이라고 풀이하였다. 어느 쪽이건 모두 그럴싸한 해몽이 되겠지만 문제는 해석하는 이의 시각의 차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메기의 꿈은 그 꿈 자체의 길흉이 문제가 아니라 허황된 속세의 탐욕에 사로잡힌 자의 환상을 풍자하고 허장성세가 대접받고 직언이 홀대를 받는 사회 현상의 부조리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똑 같은 꿈을 두고 이렇게도 해석할 수가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꿈의 애매성 때문이다. 그런 점을 교묘히 활용하여 작품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메기장군 고담>의 소설론을 펴는 것을 피하거니와 소설이 인간사를 표현하고 있다고 볼 때 <메기장군 고담>의 꿈 이야기 역시 인간사의 한 단면이라는 입장에서 메기가 꾼 꿈과 그 꿈에 대한 고래장군의 해몽, 그리고 거기에 상반된 가자미의 해몽은 꿈을 인식하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꿈이 무의식에 도사린 소망의 한 표현이라고 볼 때 그 소망이 무엇이냐에 따라 여러 형태로 꿈이 형성되고 해석의 시각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하늘로 치친 듯하고 남의 걸음 걷는 듯한 메기의 꿈은 용이 되어 하늘을 오르는 것으로 해몽될 수도 있고, 낚시에 달려 올라가 어부의 망태에 담겨 잡아먹혀서 똥이 되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판단하는 주관이 무엇이냐에 있다. 가자미가 정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메기는 고래장군이 해몽한대로 용이 되어도 가자미의 의식이 용납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자미가 인격적 모독을 받은 처지에 있어서 가자미의 의식은 메기가 용이 되기보다는 어부의 낚시에 걸려 잡아먹히는 신세로 전락하기를 바랐던 것이고, 따라서 메기의 꿈은 죽을 꿈으로 해석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같은 꿈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몽될 수 있다는 데 꿈 해석의 문제가 있고, 또 꿈은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니, 믿을 것도 못되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던 무렵에 언짢은 꿈 하나를 꾸면서 아주 슬프게 울다가 잠을 깨어 그게 현실이 아닌, 꿈임을 알고 가슴을 내리쓴 적이 있다.
꿈속에서 금쪽같은 손자가 죽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게 큰놈의 아들인 맏손자였다가 둘째의 딸인 손녀였다가 하고 대상이 엇갈리긴 했지만 아무튼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 대성통곡을 한 꿈이었는데 불길할까 봐 아무에게도 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혼자 언짢은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 전전긍긍을 하다가 가만히 꿈 해몽서를 보니 꿈에 사람이 죽는 것은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고, 큰 소리로 우는 꿈은 잔치에 초대되고 술이 생긴다고 해몽되어 있어 싱긋이 웃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 때 그런 꿈이 꾸어졌나를 생각해 보니, 그 꿈의 기저는 그 이튿날 모처럼 우리 집에 아들 내외와 손자가 오기로 했었는데 못오게 되었던 것이고, 하루를 늦추어 오게 된 손자가 키가 훨씬 크고 몸이 불어나 기뻐했던 것이며, 모처럼 두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이 모여 술을 먹게 된 일련의 가정사의 현몽이었던 것이다. 나는 꿈이란 것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나타났다.
국무조정실 산하 보건위원회의 2004년 조사에 의하면 복권 1등 당첨자의 3분의1 정도는 꿈을 꾸고 당첨되며 이중 25퍼센트가 조상 꿈을 꿨다고 하고, 꿈에서 물을 접하거나 숫자를 보고 대박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마 이것은 복권을 사는 사람들의 의식의 범주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분명 잠자고 있는 도중에서의 정신 생활로서 깨어 있을 때의 정신 생활과 어느 점에서 닮은 데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믿을 수만은 없는 것이, 거기에는 큰 차이도 있음으로 해서이다.
이런 꿈들, 그리고 몽상에 해당하는 꿈들은 불만족에서 나오며, 만족한 인간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허무맹랑한 꿈들이 아닌, 이상(理想)의 꿈, 눈뜨고 있는 희망의 꿈, 젊은이의 달콤한 사랑의 꿈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고갈되어 가고 있는 그런 꿈들을 새삼스럽게 꿈꾸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우리의 삶을 이루어 오던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꿈꾸어야 한다. (2008. 8. 20 동인지 '길' 9호)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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