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0월 12일 금요일 맑음.
소슬한 바람 높푸른 하늘, 애잔한 들국화의 향내음을 따라 어느새 가을이 깊었다. 병영 생활! 개성이 말살되고 명령만이 지상(至上)인 규정된 생활이 너무 권태롭고 고달파 스스로 위축되어 가는 자신의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꿈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것. 학문을 하는 상아탑 속의 꿈은 더 그랬던 것 같다. 고달픈 현실에 쫓길수록 그것은 보다 더 아름답게 부각되어 후광을 드리우는가 보다.
젊음이 지선(至善)의 미(美)라면 로맨틱한 꿈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혼에 날개 붙여 줄 멜로디를 타고 한없이 뻗어갈 젊음. 사색의 가을! 코발트색 하늘엔 정녕 그런 숱한 젊음의 전설들이 도사려 있는 것만 같다.
여기 활주로 주변의 잔디밭, 문명을 과시하는 쎄이브 제트기의 폭음이 누리를 뒤엎는 비행장의 소란스런 분위기엔 어울리지 않는 무수한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마다 현실에 걸맞지 않는 꿈을 그리고 있다. 생활인의 주역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설익은 초조감이 엄습한다.
대학 학사에서 공군 이등병의 지위로 굴러 떨어진 가치전도(價値轉倒)의 기막힌 상황에서 열등감에 빠지고, 무엇인가 잘못되어진 것 같은 모순된 느낌으로 혼자 인생에 역정을 내어 보지만 어차피 감수해야 할 과정이라면 인고(忍苦)할 아량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오늘 갈망하는 것이 내일 그 빛을 잃고 마는 허망한 것이 될지라도 체념을 할 수는 없다. 이제 새로이 아름다운 사연이 누비진 가을 하늘을 향해 흩어지고 찢기운 꿈들을 모아 다듬질 해서 날려 보내야겠다. ...(하략)...
이것은 46년 전 10월 12일 자 내 병영일기의 한 토막이다.
대학 강단에 서서 젊은이들을 상대하다 보면 나는 곧장 20대 중반의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시간들이 많았었다. 젊음은 인생이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싶은 도원경(桃源境)이라는 것이 실감된 것도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접어든 후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그 중에서도 20대에 각인된 모든 것은 전 인생의 교과서다. 남자로 태어나서 20대에 겪은 병영 생활은 더욱 그러할지도 모른다.
어렵고 고생스러웠던 일은 더욱 깊이 뇌리 속을 파고들고 관심을 불러일으켜 화제를 꽃피우게 마련이다. 운전 초보자들끼리의 도로 주행 무용담이 그렇고, 병영 생활을 겪은 사람들끼리의 군대 생활 회고담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재학 중에 군문에 입대하여 병역을 마치고 복학을 한 학생들에게서 발견되는 성숙과 달관에, 숙연한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아무래도 병영 생활은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교과서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소중한 걸 방관한 채 회피하고 오점으로 남겨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는 현실의 일단을 볼 때 아무래도 인생의 갈 길은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가을에도 어김없이 하늘은 높고, 곱게 물든 단풍이 산야를 물들이고 있다. 무슨 행운이라도 내릴 듯한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스산한 바람이 일고, 생기를 잃은 풀숲 사이로 들국화, 코스모스가 하느작거린다. 표나게 엷어진 햇빛으로 미루어 보아 또 어느새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다.
살아 온 날들보다 살아 갈 날이 길지 않은 사람에게는 회고의 정이 남다르다. 그 중에서도 젊은 시절에 관한 것은 애착이 더 크다.
젊음은 육체의 모험을 위한 시기이며 노인은 정신의 승리를 위한 때라고 했다. 젊은이들이란 대개 꿈에 도취되어 자기 자신의 이상을 구현시키게 될 때까지 그 값을 모르고 파묻혀 지나게 되기 쉽다.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지나간 날의 애인에게서는 환멸을 느껴도 잃어버린 젊음에서는 안타까운 미련을 갖게 마련이다.
티없이 발랄한 젊은이들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젊은 시절로 돌아가 살아온 세월을 거슬러 반추하며 자신감을 확보하고 싶다.
노령의 나이를 살아가면서도 그 가치전도의 상황에서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던 1962년 10월 12일 그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다.
2008년 10월 12일 일요일 맑음.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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