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월(古月)의 추억 - 요절한 奇才 시인
요절한 시인 고월 이장희 군은 <금성> 동인 중 출색(出色)의 시인이었고, 나의 젊은 시절의 단 하나의 지심(知心)의 벗이었다. 군은 28세의 젊은 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내가 초하였던 다음의 절록(節錄)하는 애사(哀詞 - 落月哀想)는 그와 나와의 교분을 대강 적은 것이어니와, 나는 더구나 지금에도 잊지 못하는 몇 가지 애달픈 추억을 갖고 있다. 첫째는 그가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우리 주당 동인들을 늘 따라다니다가 안주만 많이 집어먹는다고 주로 웅군에게 몹시 핀잔을 받으며 심지어 모자를 벗겨 땅에 굴려도 그저 빙그레 고운 미소만 띄우던 얼굴 - 둘째는 내가 동경으로 떠날 때 혼자 역에 전송 나와서 끝내 말이 없이 홀로 플랫홈 구내를 왔다갔다 거닐다가 급기야 발차 벨이 울자 문득 내가 앉은 자리 창밖에 와서 그 뒷포켓 속에서 1원짜리 얇은 위스키 한 병을 꺼내어 창으로 들이밀고 말없이 돌아서 역으로 나가던 그 쓸쓸한 뒷모습 - 그 맥고모, 짤막한 키, 성큼성큼한 걸음걸이. 셋째는 내가 마지막 그를 그의 장사동 집 앞채 어두운 방에 찾았을 때 그가 마지 못하여 보여주었던 '연'이라 제(題)한 절필의 시 - 그 시는 뒤에 연몰되어 전치 않으나, 대강 내용만은 지금에도 기억한다. -
어느 아이가 띄우다가 날린 것인가
전선줄에 한들한들 걸려 있는 연 -
바람, 비, 눈에 시달려
종이는 찢어지고 꼬리는 잘리고
살만이 앙상히 남아 있고나
이런 뜻을 노래하고 나서, 끝으로 다시 한 줄 -
아아, 그것은 나의 '영(靈)'이런가
내가 그 시를 읽고 너무나 소름이 끼치기에 그의 손을 잡고 그에게 재삼 간곡히 '든든한 삶'을 강조하고 종용했건만, 이 보잘것없는 친구의 '말'은 드디어 그에게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하고 그는 마침내 자기가 선택한 절대의 길을 가고 말았다......
낙월애상(落月哀想) - 고월 이장희 군을 곡함
...군과 나와 처음 교분을 맺기는 지금부터 6년 전 - 분명히 동경에 대지진이 있던 그 해 가을이다. 내가 그때 진재로 말미암아 도일하지 못하고 서울에 두류하던 중 어느 날 현빙거(현진건) 댁에서 백군의 소개로 군과 인사를 교환하였다. 당시 군과 나는 모두 예술을 동경하는, 더구나 시가(詩歌)에 정진하는 천진 다감한 청년들이었다. 무론 두 사람의 성격상의 차이는 현저치 않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군이 겸손하고 침착하고 단아한 성격임에 반하여, 나는 오만하고 조로(粗鹵)하고 호방한 듯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두 사람 사이에는 성격상 일치되는 바도 적지 않았다. 군은 수줍어하는 성질 때문에, 또는 그 철저한 결벽 때문에 어디까지나 비사교적이었고, 나는 워낙 교제의 사령(辭令)이 졸하고 스스로 초연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또한 비사교적이었다. 사교를 싫어하고 피하던 이 두 외로운 청년이 예술을 통하여 친교를 맺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우리는 모두 예술지상주의적 예술관을 가졌으며, 말하자면 기품과 운치와 음영(陰影)을 좋아하는 동양예술적 내지 상징주의적 예술관에 헤매고 있던 때라, 두 사람은 글자 그대로 시우(詩友)가 되었고 예술상의 공명자(共鳴者)가 되었다.
군과 나와의 친교는 날이 갈수록 밀이(密邇)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에 묵으며 <금성>을 간행하는 동안 주야로 나를 찾아서 간담(肝膽)을 비춘 이는 실로 군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분을 융합하였고 피차의 사상을 탁마하였고 상호의 에술을 비평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가 날마다 황혼에 나의 여사(旅舍)를 찾아와서 들창문을 가벼이 두드리며 "양형!'하고 잔잔히 부르던 소리를 기억한다. 또한 나는 어느 쓸쓸한 저녁 내가 다리 위에서 혼자 명상할 때에 가만히 뒤에 와서 나의 어깨를 치며 미소하던 군의 다정한 얼굴을 회상한다.
...생각하면 군과 나와의 최후의 봉별(逢別)은 지난 6월 하순이다. 나는 <문예공론>의 발간을 위하여 상경한 후 약 1주일간을 군의 집에 체류하였다. 원고 수집과 인쇄, 기타에 망쇄(忙殺)되어 군과 조용히 말을 사귈 기회는 오직 밤에 자기 전 몇 분간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짧은 대화 중에서도 그의 최근 생활이 극히 단조로움과 그의 지병인 신경쇠약이 거의 극도에 달해 있음을 보고 그윽히 염려하였다. 내가 잡지 간행을 위하여 주야로 고심함을 보고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자자(孜孜)하는가 하는 듯한 태도로 미소하였고, 내가 누누히 기고를 간청하여도 그는 끝내 시고(詩稿)를 내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기의 모든 시작(詩作)의 초고를 감추기까지 하였다.
내가 총총히 퇴경(退京)하던 날, 군은 전과 같이 나를 역까지 전송하였다. 두 사람은 차시간까지 역 구내 밖의 어두운 길을 소요하며 오랫동안 무언에 싸여 있었다. ...아지 못할래라, 군은 그때 이미 흉중에 죽음의 암영(暗影)을 감추었던가. 그러나 나는 둔감스럽게도 아무런 예감을 가지지 못했음이 한이다.
...군의 시는 과연 일자 일구가 정련(精練)과 조탁(彫琢)으로 된 완벽이다. 군의 예술상 태도는 언제나 정관적(靜觀的)이요, 명상적 상징적이었다. 시단의 경향이 도도히 현실적 사회적으로 흘러갈 때에 군만은 오직 상아탑에 굳게 들어앉아서 비속한 시풍을 혼자 냉소하고 있었다. 군과 나와는 다 같이 예술지상주의에서 출발했으되, 나는 중간에 점차 색채를 달리하여 여러가지 시재(詩材)와 시풍을 시험하였다. 그러나 군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도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나의 비속화의 경향과 예술 이반(離反)의 태도에 대하여 다소의 불만과 미소를 가졌었다.
... 시인 이장희 군의 예술은 결국 남을대로 남을 것이요, 오직 아는 자라야 알 것이요, 아낄 이라야 아낄 것이다. 도도한 시대적 경향이나 현실의 입장으로 보아서는 군의 예술 - 그 초현실적 시풍은 시대적 한 고도(孤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노니, 이 시인의 작품은 그 순수 때문에, 그 자기에의 충실 때문에 오래 남으리라고. 사람이 뉘 절대의 경지에서 고적이 없으랴. 염담(恬淡)과 고결에의 동경이 없으랴. 비속과 혼돈의 세계를 떠나서 눈과 같이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에 생활코자 하는 마음이 없으랴. 더구나 황홀한 예술적 삼매(三昧) 중에서 세속의 번뇌를 망각하는 척촌(尺寸)의 여유를 갖고자 원치 않으랴. 만일 그러할진댄 나는 거듭 말하려 한다 - 군의 예술은 길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리라고...... (无涯 梁柱東)
李章熙(1900-1929)
시인. 호 古月. 경북 대구 출생. 일본 교토중학 졸업.
시 '靑天의 유방' '실바람 지난 뒤'(金星 3호 1924. 5) 등으로 등단. 이어 <조선문단> 등에 시 발표.
당시의 시단 풍토의 주조는 서구적 문예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낭만주의 퇴폐주의 상징주의 릴리시즘이 혼류를 이룰 때였으나
그는 즉물적인 감각의 수사법으로 심미적 이미지를 엮어내는 특이한 작품을 씀으로써 문단을 놀라게 했다.
대표작으로 '봄은 고양이로소이다'(1923), '憧憬'(1923), '夏日小景'(1926) 등.
지나친 쇠약과 고독의 회의 끝에 28세를 일기로 음독 자살.
梁柱東(1903-1977)
국문학자. 영문학자. 시인. 호는 无涯. 경기도 개성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1928).
1923년 詩誌 <금성>과 1929년 <문예공론> 발간.
동국대 교수, 연세대 교수 역임.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우리나라 고가 연구에 뜻을 두어 <조선고가연구> <麗謠箋注> 등의 대저를 남겨 국문학계에 크게 공헌함.
시집으로 <조선의 맥박> <무애시문선> 등이 있음.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 장 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조용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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