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연인기(戀印記)/이육사

如岡園 2009. 2. 21. 20:01

    연인기(戀印記)

 

 옛날 글에 '仁者는 樂山하고 智者는 樂水'라 하였으니, 내 일찍이 인자도 못되고 지자도 못되었으니 어찌 산수를 즐길 수 있는 풍격을 갖추었으리요만, 무릇 사람이란 제각기 분수에 따라 기호나 애완하는 바 다르니 나 또한 어찌 애완하는 바 없으리오. 그러나 연기(年紀) 장자(丈者)에 이르지 못하고 덕이 고인에 미치지 못함에 항상 신변쇄사(身邊鎖事)를 들어 사람에게 말하길 삼갔더니, 이에 외람되게 내가 인(印)을 사랑하는 이유를 말하면 거기엔 남과 다른 한 가지 곡절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印)이라 해도, 요즘사람들이나 관청이나 회사엘 다닐 때 아침시간을 맞춰서 현관에 썩 들어서면 수위장 앞에서 꼭 찍고 들어가는 목각 도장이나, 그렇지 않고 그보담은 한결 행세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약속수형(約束手形)에나 소절수(小切手)쯤에 찍어내는 상아나 수정에 새긴 도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사람들같이 제법 수령방백(守令方伯)을 다녀서 통인 놈을 데리고 다니던 인궤(印櫃)쪽이 나에게 있을 리도 만무한 것이라 적지 않게 고이하기도 하다. 그보다도 이놈 인(印)이란 데 대한 풍속 습관도 또한 여러가지가 있었으니, 우선 먼 데 사람들을 쳐보면 서양사람들은 사인(sign)이란 것이 진작부터 유행이 되었는 모양인데, 그것이 심하게 발달된 결과는 소위 사인 매니어가 생겨서 유수한 음악가, 무용가, 배우, 운동선수까지도 거리에 나서면 완전히 한 개 우상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본의가 처음부터 그런 난폭한 아희(兒戱)가 아니라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처럼 국제간에 조약을 맺고 '첨자(籤子)'를 한다는 과도히 정중한 것도 역시 아니다.

 

 일찍이 이 땅에는 '수결(手決)'이란 형식으로 왼편 손에 먹을 묻혀서 찍은 일도 있고, '착함(着艦)'이라는 것보다도 매우 발전된 양식으로 성자 밑에 자기 이름자를 대개는 어조(魚鳥)의 모양으로 상형화해서 그리는 법이 있었다. 이것은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고 장구하게 쓰였으나 이것보다도 앞에 쓰이고 또는 문한(文翰)하는 사람들에게만 쓰인 것 중에 '도서(圖書)'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씨나 그림이나 쓰고 그리면 그 밑에 아호를 쓰고 찍었고 친우간에 시를 지어 보낼 때도 찍는 것이며 때로는 장서표(藏書票)로도 찍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도서는 각수(刻手)나 도장장이에게 돈을 주고 새기는 게 아니라 시서화(詩書畵)를 잘하는 사람들이면 자기 자신이 조각을 한 개인의 여기(餘技)로 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정교한 조탁(彫琢)을 하는 이도 있었고 또 이런 것이라야 진품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시대에는 이런 풍습이 유행하기를 마치 구주(歐洲)의 시인들이 한 가지 여기(餘技)로써 데생 같은 것을 그리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성행하게 되면 될수록 인재(印材)의 선택이 매우 까다로왔다. 흔히는 박옥이라는 것이 많이 쓰였으나 상아나 수정도 좋은 것이고 아주 사치를 하려면 비취나 계혈석이나 분황석 같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인데, 이것들 중에도 분황석은 가장 귀한 것으로 조선에서는 잘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시골 살던 때 우리집 사랑 문갑 속에는 항상 몇 봉의 인재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우 수산(水山)군과 여천(黎泉)군은 그것을 제각기 제호를 새겨서 제 것을 만들 욕심을 가지고 한바탕씩 법석을 치면 할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장래에 어느 놈이든 글 잘하고 서화(書畵) 잘하는 놈에게 준다"고 하여서 놀고 싶은 마음은 불현듯 하면서도 뻔히 아는 글을 한번 더 읽고 글씨도 써보곤 했으나, 나와 여천은 글씨를 쓰면 수산을 당치 못하고 인재(印材)는 장래에 수산에게 돌아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 잘 쓰길 단념하고 화가가 되려고 장방에 있는 당화(唐畵)를 모조리 내놓고 실로 열심으로 그림을 배워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12세의 소년으로 하여금 그 인재(印材)에 대한 연연한 마음을 팽개치게 하였으니 내가 배우던 '중용' '대학'은 '물리'이니 '화학'이니 하는 것으로 바뀌고 하는 동안 그야말로 살풍경의 10년이 지나갔다. 

 

 그 때 봄비 잘 오기로 유명한 남경의 여관살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나는 도서관을 가지  않으면 고책사(古冊肆)나 골동점에 드나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얻은 것이 비취인장(翡翠印章) 한 개였다. 그다지 크지도 않았건만 거기에다가 모시 칠월장(毛詩  七月章) 한  편을  새겼으니 상당히 섬세하면서도 자획이 매우  아담스럽고 해서  일견 명장(名匠)의 수법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그것이  사랑스럽던지 밤에 잘 때도 그것을 손에 들고 자기도 했고, 그뒤 어느 지방을 여행할 때도 꼭 그것만은 몸에 지니고 다녔다. 대개는 여행을 다니면 그  때는 간 곳마다 말썽을 부리는 게 세관리(稅官吏)들인데, 모든 서적과 하다 못해  그림엽서 한 장도 그냥 보지 않는 녀석들이건만 나의 귀여운 인장만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내 고향이 그리울 때나 부모형제를 보고 싶을 때는 이 인장을 들고 보고 모시 칠월장을 한번 외워도 보면 속이 시원하였다. 아마도 그  비취인에는  내 향수와 혈맥이 통해 있으리라.

 그뒤 나는 상해를 떠나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언제 다시 만날는지도 모르는 길이라 그곳의 몇몇 문우들과  특별히 친한 관계에 있는  몇 사람이 모여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을 같이하게 되었는데, 그 중 S에게는 나로부터 무엇이나 기념품을 주고 와야 할 처지였다. 금품을 준다 해도 받지도 않으려니와  진정을 고백하면 그 때 나에게 금품의 여유란 별로 없었고, 꼭 목숨 이외에 사랑하는 물품이라야만  예의에  어그러지지 않을 경우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귀여운 비취인(翡翠印) 한 면에다 '贈 S. 1933. 9. 10 . 陸史' 라고 새겨서 내 평생에 잊지 못할 하루를 기념하고 이 땅으로 돌아왔다. 

 

 몇 해 전  시골을 가서 어릴 때 문갑 속에 있던 인재(印材)를 찾으니 내 사백(舍伯)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너희들 중에 누구나 시서화(詩書畵)를 잘하는 놈에게 주라 하셨으나 너희들이  모두 유촉(遺囑)을 저버렸기에 할 수 없이 장서인(藏書印)을 새겨서 할아버지가  끼쳐주신 서적을 정리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아우 수산은  그  동안 늘 서도에 게으르지 않아 '도서(圖書)'를 여러 봉 장만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이 조각한 것도 있고 인면(印面)도 '山高水長'이라고 새긴 것과 '五車書一爐香'이라고 새긴 큰 인(印)은 거의 진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여천이 가졌다는 몇 개 안되는 인은 보잘것 없어  때로 내형(乃兄)의 것을 흠선은 해도 여간해서는 제 소유로 만들 가망은 없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을 흠선도 않으려니와 여간한 도서개(圖書個)쯤은 사실로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나, 화가 H군이 가지고 있는 계혈석에 반야경(般若經)을 새긴 것은 여간 탐스러운 바 아니었다. H군으로 보면 그것은 세전지보(世傳之寶)라 나에게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나는 상해에서 S에게 주고 온 비취인을 S가 생각날 때마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금  S가 어디 있는지 십 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없건마는, 그래도 S는 나의 귀여운 인(印)을 제 몸에 간직하고 천태산(天台山) 한 모퉁이를 돌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고만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나는 오늘밤도 이불 속에서 모시 칠월장(毛詩 七月章)이나 한 편 외워보리라. 나의 비취인과 S의 무강(無疆)을 빌면서.     

                             陸史 李源綠

 

광야(曠野)

                                                           이   육   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우는 소리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李陸史(1904-1944) : 시인. 독립운동가. 경북 안동 출생. 본관은 진성(眞城). 본명은 원록(源綠)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 수감번호 '264'에서     딴 것.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백학서원(白鶴書院)인 백학학교와 보문의숙, 교남학교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원기, 아우 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1927년에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북경감옥에서 죽었다. 문단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 작품 '말'과, 별건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조선, 조광, 문장, 인문평론, 자오선 등에 30여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수필, 문학평론,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생존시 작품집이 발간되지는 않았고, 1946년 아우 원조(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청포도(문장, 1939.8), 절정(문장, 1940.1), 광야, 꽃(자유신문,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超人意志)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