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우정어린 격려의 글

如岡園 2009. 1. 30. 13:58

 인터넷의 정보교환 수단도 여러가지이다가 보니 우리같은 컴맹세대에는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e-메일이야 편지 대신 주고받는 통신수단이라 치더라도, 홈페이지 게시판이니 카페니 블로그니 플래닛이니 하는 다양한 통로로 글을 올리고 받고 하다가 보면 헷갈리기가 일쑤다.

 그전에 열어두었던 홈페이지 게시판 글을 정리하다가 아무래도 이것 하나만은 지워 없애버리기가 아쉬운 생각이 들어 여기에 옮겨 싣는다.

 우정어린 격려와 아울러 頂門一鍼의 資가 되기도 하여 나에게는 새삼스러운 정이 배인 글이었기 때문이다.

 

          如岡 님

 如岡의 貴한 著書 <韓國動物寓話小說硏究>를 받고서 고맙다는 인사를 고대 못 한 것이 罪밑이 되어 늘 부끄러웠다. 대구에서 全國同期會가 있을 때, 더구나 우리 집에서 素饌을 함께 할 때도 그에 대한 修人事를 못했으니 辯明의 여지를 잃고 말았다. 每事를 변변히 추스르지 못하는 버릇을 '나이' 탓으로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이런 판국에 다시 如岡이 보내 준 <如岡散藁>가 또 나를 찾아 왔다. 난감했다. 이렇게도 '사람 도리'를 못하다니 될 말인가. 이젠 쥐구멍을 찾아다닐 蠻勇도 나지 않는다. 오직 如岡의 넓은 雅量에 의지할 뿐이다.

 

 나는 如岡이 安義 촌놈이란 것과 安義는 燕巖 先生이 縣監으로 계셨던 곳이란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式으로 말하자면, 如岡의 形相因은 40여 년을 넘게 交友하는 사이에 그런 대로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如岡의 胸襟 속을 안내하는 길라잡이인 <如岡散藁>를 따라다니면서 如岡의 質料因이 무엇이며 그의 作用因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如岡은 否定하거나, 미처 느끼지 못했을 지는 모르지만 如岡의 作用因은 영락없이 祖父 '고자배기 영감' 이다.

 如岡이 耳順을 넘으며 굳이 '외투와 중절모'를 고집하는 衣冠整齊는 愛酒家이신 祖父님께서 아무리 술에 취하셔도 주위의 부축을 물리치시고 몸을 단정하게 바로 가지시는 모습에서 이고, 如岡이란 雅號가 '學行一如 登彼高岡'에서 蒸溜 選字한 것이라고 했는데, '學行一如'하는 황소 같은 끈기와 힘의 作用因은 祖父님의 '부지런하심'에서 遺傳된 것이라 하겠고, 광복 즈음의 땔감은 火木이고 나무꾼의 남벌로 산이란 산은 민둥산이 되었다. 때문에 헐벗은 산에서 땔감이 없어 모두가 고생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고자배기'를 찾아내는 '祖父님의 벤처 정신'이 손자 如岡이 개척해낸 學問 世界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隨筆을 '自我의 世界化'라고 한 趙東一의 말이 <如岡散藁>를 보면서 새삼 수긍된다. 마치 목욕탕에서 만난 친구처럼. 그래서 등밀이를 나누듯이.

 

 現職에 있을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장노'가 되어선 '바쁘지 않으니 서두를 것 없다'는 늑장 症候로, 此日彼日해 왔던 것인데, 朴00 총무의 同期會 모임 소집장을 받고서, 갑자기 如岡이 생각되어 늦었지만 反省文을 쓰고 있다.

 

 요새 同期會에 나가면 모두가 억울하고, 분하고, 한심하고... 그래서 悲憤慷慨 타령이다. 如岡 祖父님의 <寒暄箚錄>에도 이런 타령은 없을 것이다.

 옛사람<稗官雜記>에 '쓸 데 없고 해롭기만 한 것'으로, 돌담 배부른 것, 사기그릇 이 빠진 것, 봄비 잦은 것, 小兒 입싼 것 등은 이해가 갔지만 '노인 부랑한 것(老人潑皮)'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는데, 요즈음 우리 친구들이 世態를 慨歎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젊은이가 제 마음 같지 못하다고 무작정 潑皮만 부리는 노인은 자기 處地가 벌써 이 빠진 호랑이가 된 것임을 모르고 부리는 發惡이라 가련할 뿐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더 이상 돌릴 수 없고 함정에 빠진 호랑이는 아무리 으르렁거려도 토끼마저 깔본다고 했다. 피라미드 안에 落書가 '요새 젊은놈 버릇없다'라고 했다지 않는가.

 如岡은 비록 退職을 해서라도 '學行一如'로 '陟彼高岡 我馬玄黃'(詩經 周南)할 것임을 믿고 있다.

 

 蛇足 ;  '箚錄'은 '태록'이 아니고 '차록'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본디 '책을 읽고 얻은 것을 수시로 적어 모은 것'을 가리키는 말은 '차기(箚記)'이고, '箚記'는 달리 '箚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또 '箚記'를 '답記'로 쓰기도 한다는 것은 民衆書林의 <漢韓大字典>뿐이고  우리말 사전에는 거의가 '차기(箚記)'로만 나온다.

 祖父님께서 '오랜 세월(寒暄)에 걸쳐 많은 책을 읽으시면서 유익한 내용을 발췌 기록해 모으신 것(箚記)'이 곧 <寒暄箚錄>인 것이라 보인다.

 또 冊에서 誤字는 가을 뜰에 낙엽 쓸기라서 다 쓸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 보면 방금 제가 쓸고 지나간 그 자리에 새로운 낙엽은 얄밉게 도사리고 있지 않던가. 24쪽 '姑蘇坮'의 '坮'는 '臺'이고, 25쪽의'宗'은 '曾子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 宗聖'이 아니겠는지(複聖顔子 宗聖曾子 述聖子思 亞聖孟子<明史 - 禮志>). '前工可惜'도 '前功'일 것이고.

 <退溪先生道德歌>라면 그 방면에 관심 있는 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 原文을 보고 정확하게 校正해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난 번 大邱 總會에서 다음 번의 全國 同期會를 釜山에서 갖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釜山에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구나.

 요새 잘 쓰이는 말이 '죽기 전에' 라는 前提語가 아니더냐. 旅行地에 가면 '죽기 전에 여길 또 오겠나' 이고. 친구와 헤어질 때면 '죽기 전에 또 한번 보도록 노력하자' 라는 말을 예사롭게 하더구나. 그런데 이런 우스갯소리가 점점 切實한 느낌으로 가슴 속에 배어드는 것을 如岡은 실감하지 못했는가.

 우리 同期로서 이 00 양은 너무 일찍 가고 말아 喪家에 弔問도 갔지만 머리로 事實 確認만 했을 뿐 '죽음'을 가슴으로 체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00님의 訃音을 들었을 때는 '죽음'이 먼 동네의 남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피부로 느껴지게 되더구나.

 2차 대전 때, 來日에 대한 希望이 不確實한 상황에서 日本의 젊은이 '太陽族'들이 '고기 반찬부터 먼저 먹자'고 한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제 우리 世代는 未來를 위해 아껴야 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몸의 健康이며 運身이, 歲月이기는 壯士 없다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衰殘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조금씩 사위어 가는 모닥불 꼴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오늘'이 그중 나은 편이고,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사윌 것이고, 그 내일 보다도 다음 날 '모레'는 더더욱 못해질 것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다음다음의 글피라고 해서 더 좋아지리란 기대를 가질 수 없고 서서히 사그라져 가는 것이 우리 世代가 아니더냐. '오늘'의 가치를 젊은이에겐 내일을 위한 '投資'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來日이 불확실한 늙은이에게서 '오늘'은 그 오늘을 누리기 위한 '引出'이 더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되는구나.

 나는 釜山 總會가 가슴 설레게 기다려진다. 그리고 그 다음을 약속한 朴00의 강원도 모임까지도 군침을 흘리고 있다.

 

 淸溪 金思燁 先生에게서 배운 杜詩諺解에서 '春日憶李白'의 한 구절이 왜 그렇게 切實한지 모르겠다.

          "어느 제 0 樽ㅅ술로 다시 다  0 야  仔細히 그를 議論 0 려뇨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

         

  如岡과 家族 모두의 健康과 康寧을 빈다.

 

                                            2003년   5월   30일       황   0   0    드림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대학 동과 동기로부터 받은 것이니 정황은 좀 달라졌지만 원론적인데는 변함이 없음을 밝혀둔다.

                    如   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