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정월 대보름의 풍속

如岡園 2009. 2. 9. 00:46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은 설날 추석날과 같이 우리 겨레가 즐겨온 큰 명절의 하나이다.

 한자말로는 상원(上元), 상원절(上元節), 원소(元宵), 원소절(元宵節)이라고 하며, 보통 줄여서 대보름 혹은 대보름날이라고 한다. 보름, 보름날이라 하면 음력 초하룻날부터 열 다섯째 날을 가리키는데, 대보름의 '대'는 그 해에 맨 처음으로 제일 큰 달이 뜨기에 붙인 말이다. 이 날은 1년의 첫보름이라 특히 중요시하고, 그 해의 풍흉(豊凶)과 신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쳤다. 또 새벽에 귀밝이 술을 마시고 부럼을 깨물며, 약밥, 오곡밥, 복쌈, 나물 등을 먹는다. 또 더위팔기, 달맞이, 줄다리기, 석전(石戰), 차전놀이, 원노름, 기세배, 달집태우기, 지신밟기, 놋다리밟기, 사자놀음 등 여러가지 민속놀음이 있다.

 보름은 새해 농사의 시점이라 하여 농사일과 관계있는 일들을 한다. 15일은 보름 명절이고 16일은 귀신날로 일손을 놓게 되어 있으므로 농사의 시발행사는 14일에 한다. 14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자기 집 퇴비장에서 퇴비 한 짐을 져다 자기네 논에 갖다 붓는다. 이것은 금년 농사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신호이며, 이렇게 부지런하니 금년 농사가 풍년이 되게 해달라는 기원의 뜻도 있다. 14일 낮에 남자는 나무를 아홉 짐 해야하고 부인들은 삼베를 아홉 광주리를 삼아야 한다고 한다. 또 1년간 집에서 쓸, 수수비를 매는 날이다. 수수는 가을에 추수하여 수수알을 털고 남은 비 맬 거리를 쥐를 피하기 위해 나무 위에 높이 매달아 두었다가 14일에 내려 비를 맨다. 이날 밤에 복토훔치기도 있어 이 날을 '여름날'이라고도 한다. 대보름달을 보고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달빛이 희면 비가 많고 붉으면 한발이 있으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에 풍년이 들 징조이고 북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정조 때 서울의 세시 풍속을 그린 <경도잡지 京都雜志>의 기록에 나타난 보름날의 풍속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찰밥에다 대추의 살, 시병(枾餠), 삶은 밤, 잣을 넣어 비빈 다음 꿀, 참기름, 진간장을 곁드린 것을 약밥이라 한다. 이는 상원(정월보름)의 좋은 음식으로 신라 때부터 내려온 옛 풍속이다. 

 생각컨대 <東京雜記>에 "신라 소지왕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주사(天柱寺)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가 왕에게 경고하여 반역을 꾀하는 중을 사살하였으므로 우리 나라 풍속에 보름날 찰밥을 만들어 까마귀에게 먹임으로써 신세를 갚는 것이다"고 했다. 

 14일 밤에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처용(處容)이라고 한다. 그 머리 속에는 동전을 감춘다. 그러면 아이들이 밤새워 문을 두드리며 처용을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처용 주인이 문을 열고 던지면 여러 아이들은 서로 잡아당기며 머리 부분을 파헤쳐 다투어 돈을 꺼낸다.

 생각컨대 <文獻備考>에 "신라 헌강왕이 학성(현 울산)에 노닐 때 동해의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와 가무를 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는데 그를 처용(處容)이라고 한다" 고 했다. 지금 장악원(掌樂院) 향악부(鄕樂部)의 처용무(處容舞)가 바로 이것이다.

 풍속에 판수의 점을 믿어 판수가 일직성(日直星), 월직성(月直星), 수직성(水直星)이 명궁(命宮, 사람의 生年月日時의 方位)에 든 사람은 모두 재액을 만난다고 해서 그 사람은 종이를 잘라 해와 달의 모양을 만들어 나무에 끼워 지붕의 용마루에 꽂는다. 또 종이에 밥을 싸서 밤중에 우물 속에 던져 재액을 막는다. 가장 꺼리는 것은 처용직성(處容直星)으로 이에 해당하는 자는 제웅을 만들어 길에 버림으로써 재액을 면한다.

 계집아이들은 나무로 작은 호로(胡蘆, 호로병박)를 만들어 청색 홍색 황색으로 각각 한 개씩 칠을 하여 채색실로 끈을 만들어 차고 다니다가 보름날 밤에 몰래 길에 버림으로써 액을 면한다.

 새벽에 밤이나 무우를 깨물면서 축원하기를, 일년 열두 달 동안 무사 태평하게 해달라고 한다. 이것을 작절(嚼癤, 부름깨기)이라 한다.

 또 소주 한 잔을 마셔 사람의 귀를 밝게 한다. 생각컨대 섭정규(葉廷珪)의 <海錄碎事>에, "사일(社日)에 치롱주(治聾酒)를 마신다" 고 했다. 그러나 지금 풍속에는 정월 보름날로 옮겨졌다.

 남녀들은 꼭두새벽에 갑자기 서로 부른다.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 고 한다. 그리하여 온갖 계교로 불러도 여간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생각컨대 육방옹(陸放翁)의 시에 [주사위를 던지면서 정원에서 신년을 축하하는데 곤함을 사라고 아이들은 새벽에 일어나네] 라고 했다. 그리고 그 주(註)에, "입춘날 새벽에 서로 불러 봄의 노곤함(春困)을 판다" 고 했다. 지금 풍속의 더위 파는 것도 이런 종류다.

 서울 성의 북문을 숙청문(肅淸門: 肅靖門)이라 한다. 항상 닫아 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곳의 시내와 골짜기가 깨끗하고 그윽하여 정월 보름 전에 여항(閭巷)의 부녀들이 세 번 이곳에 가서 논다. 이 문이 액을 막는다고 하여 그리하는 것이다.

 무명실을 자아 옷을 지으면 길한 징조가 나타난다 하여 부인들은 정월 보름날 만든 실을 서로 선물한다.

 새벽에 종각(鐘閣; 現鐘路) 네거리의 흙을 파다가 부뚜막을 바르면 재물이 모인다고 한다. 

 나물을 먹는 사람은 대개 외꼭지, 말린 가지, 무우잎을 모두 버리지 않고 천천히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정월 보름에 삶아 먹는다.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먹는다.

 이날만은 개를 먹이지 않는다. 개에게 먹을것을 주면 파리가 많이 꾀고 마른다고 한다. 그래서 속담에, 굶는 것을 '개 보름 쇠듯한다' 고 한다. 

 어린이로서 봄을 타서 살빛이 검어지고 야위는 아이들은 상원(上元)에 백 집의 밥을 빌어다가 절구를 타고 개하고 마주앉아 개에게 한 숟갈 먹이고 자기도 한 숟갈 먹으면 그런 병이 도지지 않는다고 한다. 

 짚을 묶어 깃대 모양을 만들고 장대 끝에 붙들어 매어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내려뜨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화적(禾積)이라 한다. 이조 고사(故事)에 정월 보름날 궁궐 안에서는 빈풍(빈風)7월의 경작, 수확의 형상을 모방하여 좌우로 나누어 힘을 겨룬다. 이것 또한 풍년 들기를 비는 뜻이다. 여항(閭巷)의 화간(禾竿)도 이런 일일 따름이다.

 과일나무의 갈라진 가지에 돌을 끼워 두면 과일이 풍성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을 가수(嫁樹: 과목 시집보내기)라 한다.

 생각컨대 서광계(徐光啓)의 <農政全書>에는, '오직 오얏나무만 이런 법을 쓴다' 고 하였다.

 삼문(三門; 東, 西, 南大門)밖과 아현(阿峴) 사람들이 만리현(萬里峴)에서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웠다. 속담에 말하기를, 삼문밖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 안에 풍년이 들고 아현 사람들이 이기면 다른 도에서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용산, 마포의 불량소년들이 결당하여 아현 쪽을 도왔다고 한다. 이 돌싸움이 한창 심할 때는 함성이 천지를 울리는 것 같고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으며 당국에서 왕왕 못하게도 했다. 장안의 아이들이 이를 모방하기도 하고 행인이 돌을 무서워하여 피하기도 했다.

 생각컨대 <新唐書> 고려전(高麗傳; 고구려전)에 '매년 초에 패수(浿水; 대동강) 가에 모여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며 두세 차례 밀었다 밀려갔다 하다가 멈춘다' 고 했다. 이것이 우리 나라 풍속의 석전(石戰)의 시초다.

 아이들이 '厄'자를 연에 써서 해질 무렵에 줄을 끊어 날려 보낸다. 연 만드는 법은 대를 뼈로 하고 종이를 풀로 발라 마치 키의 모양 같다. 오색연(五色鳶), 기반연(碁斑鳶), 묘안연(猫眼鳶), 작령연(鵲翎鳶), 어린연(魚鱗鳶), 용미연(龍尾鳶) 등 명색이 특히 번잡하다. 중국의 연놀이는 늦은 봄의 유희인데 우리 나라 풍속은 겨울부터 정월 보름날까지 날린다. 그 날리는 법도 한곳에 국한되지 않고 종횡으로 휩쓸어 남의 연과 마주쳐 남의 연줄을 많이 끊음으로써 쾌락을 삼는다. 실을 겹치고 아교를 문질러 매끈하기가 흰 말의 꼬리 같다. 혹은 누런 치자물을 들여 바람을 거슬러 쨍쨍 울리는 줄이 가장 남의 줄을 잘 자른다. 심한 사람은 자석 가루나 구리 가루를 바르기도 한다. 그러나 연줄을 잘 교차시키는 능력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 서울 장안 소년 중에 연싸움을 잘하기로 이름이 난 자는 부귀한 집에 왕왕 불려가기도 한다. 매년 정월 보름 전 하루이틀은, 수표교(水標橋) 연변 상하를 따라 연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쌓듯이 모여 선다. 여러 아이들은 기다렸다가 연줄을 끊는데 혹은 패하는 연을 따라 담을 넘고 집을 뛰어넘기도 하므로 사람들은 대개 두려워하고 놀란다. 그러나 보름날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 연을 날리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한 가닥으로 된 생명주실로 거위의 솜털을 붙들어 매어 바람을 따라 날린다. 이것을 고고매(苦苦妹)라 한다. 몽고어로 봉황(鳳凰)이란 뜻이다.

 황혼에 횃불을 들고 높은 데로 오른다. 이것을 영월(迎月; 望月, 달맞이)이라 한다. 달을 먼저 보는 사람이 길하다.

 달이 뜬 후 서울 사람들은 모두 종가(鐘街; 現 종로)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헤어져 여러 다리(橋)를 밟는다. 이렇게 하면 다리(脚)에 병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광통교(大廣通橋), 소광통교(小廣通橋) 및 수표교에 가장 많이 모인다. 이날 저녁은 예(例)에 따라 통행금지를 완화한다. 따라서 인산인해를 이루어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떠들썩한다.

 생각컨대 육계굉(陸啓굉)의 <北京歲華記>에,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들이 모두 집에서 나와 다리를 거닐었다"고 했다. 그리고 우혁정(于奕正)의 <帝京景物略>에는,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들이 서로 이끌고 밤에 나와 다님으로써 질병을 없애는 것을 주백병(走百病; 모든 병을 다라나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고 했다. 또 심방(沈榜)의 <宛署雜記>에는, "16일 밤 부녀들이 떼를 지어 대체로 다리 가에서 노는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리를 건너는 것을 도액(度厄; 액막이)이라 한다"고 했다. 이것이 곧 우리 나라 풍속의 다리밟기의 근원이다. <芝峯類說>에는, "보름날 밤 답교의 놀이는 전조(前朝)로부터 시작했는데, 태평세대에는 매우 성하여 남녀들이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으므로, 법관들이 엄금하여 위법자는 체포하도록까지 하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경도잡지 저작당시) 풍속에는 부녀들은 다시 답교하는 일이 없다.

 

<京都雜志>는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 행사를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왕조 정조때 實學者 柳得恭(1749년 정조 25 출생 卒年 미상)이다. 모두 1,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에는 우리나라의 의복 음식 주택 시화 등 제반 문물제도를 19항목으로 나누어 약술하고, 제2권에서는 서울의 세시 풍속을 19항목으로 분류 약술하고 있는데, 특히 제2권은 <東國歲時記>의 모태가 되고 있다. 이 책이 완성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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