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추억의 고장 晉州

如岡園 2009. 3. 10. 09:20

 노랫말에 얹혀 고장이 유명해지기도 하고 거꾸로 유명 고장의 이름으로 인해 노래가 유명해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진주라 하면 대뜸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아 타향살이 신세를 이러할 줄 내몰랐네......" 하는 노래가 생각난다.

 나는 안의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했었다. 1954년 당시 산간 벽지 시골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으로서는 대단한 외지 유학인 셈이다. 내가 진주까지 외지 유학을 시도한 동기는 가정 경제사정이 허용되어서가 아니라 한군데 믿는 곳이 있어서였다. 진주 덕산에서 문의사(文醫師)로 통하던 이모부께서 진주시 대안동에 집을 마련해 두고 내 이종사촌이 되는 두 아들을 공부시키면서 외할머니가 보살피고 있었던 탓에 나 하나 정도는 덤으로 끼워 두어도 됐을 법한 형편이었던 것이다.

 만만치  않은 입학시험 경쟁을 뚫고 진주고등학교에 합격했다는 일은 내 능력의 바탕을 가늠한 잣대가 되기도 하여 그 후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감을 획득했던 계기도 된다. 그 때 영어시험 문제였던 'It ...... that......'의 문장에서 진주어(眞主語) 가주어(假主語)를 자신만만하게 찾아 답하였던 통쾌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54년 4월의 진주 시가지는 6.25 전쟁 때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상태였다. 전통이 있는 명문의 학교라고 했지만 불타버린 학교 교사 뒷편에 신축도 덜 된 건물의 콘크리트 벽면에 칠판을 걸고 흙바닥에 책상을 뒤뚱거리며 <춘향전> 수업을 받는 형편이었다.

 여러 교과목 가운데서 내가 가장 콤프렉스를 느끼고 있는 수학 과목의 교과서 내용을 예습으로 앞질러 수업시간에 배우기도 전에 휑하니 깨치고 있는 수학의 천재도 있었다. 유독 그 친구가 나를 동무로 하여, 우리는 비봉산으로, 진주성의 서장대로 입안이 벌도록 큰 아메다마 눈깔사탕을 볼을 불룩여 녹이면서 곧잘 산책을 하며 그 시절 그 나름대로의 인생을 말하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 수학의 천재가 어떤 인생길을 걸어 갔을까 하고 일생을 통하여 궁금해 하고 있지만 그 후 소식을 끊어 버려 알 길이 없었다. 동갑내기 이제하의 습작시절의 시 '청솔 그늘에 앉아'가 <학원>지에 실려, 별것 아닌 시로구나 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워하며 읽던 무렵이기도 하다.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시가지, 남강다리로 이어지는 중앙통 대로를 겨우 확장하여 정리하고 있던 시기였다. 무슨 행사가 있으면 우리 학교의 취주악대를 앞세워 신나게 시가행진을 하곤 하던 거리였는데 그때만 해도 이렇게 넓은 길이 무엇에 필요하냐 싶었다. 가로 옆 진주극장 확성기에서는 남인수의 '내고향 진주'와 '페르샤 왕자'가 고을이 떠나가도록 신명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젊은 시절 직장생활에서 '페르샤 왕자'가 18번의 노래가 되어 곧잘 불렀는데 감수성이 예민했을 때의 사상(事象)에 대한 반응 내지는 흡수력이라는 게 무서운 것인가 싶기도 했다.

 내고향 안의에서 진주까지는 천리가 아니라 고작 180리 길이다. 지금같은 교통사정에서라면 승용차로 30분이 미처 걸리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머나먼 거리였다. 정기 노선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걸어서 가노라면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다. 유일한 교통편이 있었다면 용추계곡이나 서상 골짜기의 목재를 진주, 마산, 부산 방면으로 실어나르는 트럭의 짐 위에 얹혀 타고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에 공인된 교통 수단도 아니었다. 그나마 일반 사람들은 언감생심이었고 학생이라면 멀리 공부하러 다니는 입장을 생각하여 일정 거리를 타고 가는 것을 눈감아 주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부친께서는 진주에 유학한 아들을 보기 위하여 안의에서 진주까지 이틀을 걸어, 집에서 가꾼 미나리, 파, 마늘을 가지고 내가 얹혀 공부하는 이모부께서 마련한 대안동 집으로 오셨다. 초라한 행색이 부끄럽기만 했다. 그깟 것을 가지고 올 수밖에 없는 가정형편인가 싶어 나는 그때부터 자존심이 상하였다. 이런 사정에서 내가 진주에까지 와서 유학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싶었다. 남의 도움으로 유학하여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일거에 나의 1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었던 수학 선생님, 다리도 불편하셨던 이 아무개 선생님(나중에 확인하였더니 이 무수 선생님이었다)에게 상담을 요청하여 자퇴를 해야겠노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노발대발이시었다. "이누무 아야. 진주고등학교가 얼마나 좋고 입학하기도 어려운 학굔데 이런 학교를 그만 두고 어디를 가겠단 게냐. 안 된다." 추상같은 호령이셨다.

 그런 꾸지람을 듣고 겁이 난 나는 전학이나 자퇴의 절차도 밟지 않고 1학기가 끝날 무렵 내 고향 안의고등학교로 와버렸다. 뜻을 두고 공부를 한다면 굳이 그깟 왜정때부터 있었던 진주고등학교에서라고 별 수 있겠느냐 싶었던 오기도 있었고, 대학 진학이라는 더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경제적 여력의 확보가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 이모부께서로부터 맏동서가 되는 우리 부친에게 하신 말씀이셨다. "형님! 재환이 그놈을 내가 학비를 대어 공부시키고 싶었는데 왜 고향으로 데려가셨어요." 하셨더란다. 그 소식을 늦게야 알아차린 나는 부친께도 이모부님께도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때 진주고등학교를 그대로 졸업하였더라면 내 인생의 그림이 또 어떻게 그려졌을지 모르긴 하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분수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如岡散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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