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에서 고향을 지칭할 때는 군 단위의 명칭을 일컫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안의면 사람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함양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안의라고만 말한다. 안의면은 행정구역상으로 함양군에 속하는 것이니 함양이 아니냐고 따지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수긍하면서도 함양과는 다른, 안의가 고향이라는 잠재적 의식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 안의 사람들의 공통된 고향 의식이다.
군 단위의 향우회인 '함양향우회'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고서도 안의 사람들 대부분의 생각은 '안의향우회'라면 몰라도 왜 우리가 '함양향우회'에 참석해야 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한다.
배타적이고도 편협된 애향심이라고 비판받아도 마땅한 일이지만 아무튼 안의 사람들은 함양-산청-안의-거창을 항상 동렬에 놓고 생각하지 함양에 종속된 안의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하다. 특히 함양에 대해서는 만용에 가까운 상대적 우월감까지 드러내는 경향까지 있고 보면 스스로도 딱한 생각이 들곤 한다. ...(중략)...
이같은 안의 사람의 성향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형성 조장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보면 역사적 지리적으로 안의라는 고을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안의는 역사적으로 행정구역이나 명칭이 여러번 바뀌었다. <花林志>에 기록된 건치연혁(建置沿革)에 의하면 신라 때에는 천령군(天嶺郡)의 이안현(利安縣)이었고 고려 때는 합주(陜州, 지금의 합천), 감음(感陰, 지금의 위천)에 이속(移屬)되었다가 여선(餘善)으로 이름을 바꾸어 합주에 이속되고, 공양왕 때에 이안현(利安縣)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관아를 이안(利安)으로 옮기고 안음(安陰)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고, 일시 거창현을 안음현으로 이속(移屬)시키기도 했다. 영조 때 정희량의 난[戊申亂]으로 함양과 거창에 분속(分屬)되었다가 1736년에 복현(復縣)되었고, 1767년에 안음(安陰)을 안의(安義)로 고쳐 안의현(安義縣)으로 호칭하다가 1895년 안의군(安義郡)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의군이 폐지되면서 오늘의 함양군과 거창군으로 분속되었다.
이안(利安)을 거점으로 한 안의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이름을 이안(利安), 마리(馬利), 감음(感陰), 남내(南內), 여선(餘善), 안음(安陰), 안의(安義)로 바꿔가면서 일시적으로 함양에 또는 거창에, 또는 합천에 분속되기도 했으나, 적어도 1914년 안의군(安義郡)이 폐지되기 이전까지 독립된 군현(郡縣)의 자부심을 가지고 존재하면서 한 때는 거창현을 이속받기도 했으니, 안의 사람의 의식 속에 함양인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리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지리적으로 봐서도 옛 안의의 영역은 함양과는 별개의 고장이다. 맥을 따라 산이 이어지고 그 산맥의 골을 따라 물이 흐르고, 물을 따라 주변에 옥토가 있고 사람이 모여 살아 고을을 이룬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지리가 좋아야 하고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인심이 좋아야 하고 산과 물이 좋아야 한다.
우리 나라 인문 지리서로 이름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안의, 거창, 함양, 산청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고 있다.
"덕유산 동남쪽에 있는 안음현은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고향이며 정온은 관직이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정온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함을 옳지 않은 일이라 주장하였다. 인조께서 항복하려고 성으로부터 내려가자 정온은 할복하여 죽었는데 그의 자제가 창자를 뱃속에 다시 넣고 꿰매었더니 한참 후에 다시 깨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돌아가자 곧 귀향하여 다시는 조정에서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안음의 동쪽과 거창의 남쪽에 함양, 산음이 있는데 지리산 북쪽에 위치한다. 네 마을이 모두 땅이 기름지고 함양은 더구나 산수굴(山水窟)이라 칭하여 거창과 안음과 더불어 이름난 마을로 알려졌다. 그러나 오직 산음(山陰)만은 음침하여 살 곳이 아니다."
그리고, "지리산의 북쪽은 모두 함양 땅이며 영원동(靈源洞), 군자사(君子寺), 유점촌(鍮店村)이 있다. 남사고(南師古)는 그 곳을 복지(福地)라 하였다. 또 벽소운동(碧소雲洞)과 추성동(楸城洞) 모두 명승지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안의(安義)는 덕유산 동남쪽을 근거로 한 생활권이고, 함양(咸陽)은 지리산 이북의 골짜기 물이 합쳐서 흐르는 곳에 자리한 영역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안의 사람으로 지칭되는 정온의 생가가 위천(渭川)에 있으니 안의의 영역은 오늘날 거창군에 병합된 동리(東里), 남리(南里), 고현(古縣), 북상(北上), 북하(北下)의 5개면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파악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안음현 사람의 성향을 '강한투쟁(强悍鬪爭)'이라 하였고, 안의 송장 하나가 다른 곳 산 사람 셋을 당한다는 말도 있다. 서리 아침에 발가벗은 몸으로 삼십리 길을 눈하나 까딱 않고 뛰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기왕의 전적(典籍)에 기록된 '强悍好爭鬪'라는 구절에 사로잡혀 지역민의 기질을 이러쿵저러쿵 논하기를 삼가는 바이지만, 이것이 우리 안의 사람들의 기질에 저류하는 어쩔 수 없는 한 성향(性向)이라면 이를 불의에 대한 정의감이나 용감성으로 환치하여 현실을 타개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는 있으리라고 본다.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여러차례 주변 군현을 이속받거나 거기에 분속되기도 했고, 무신란을 계기로 반란의 고장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연암이 실학을 바탕으로 선정을 베푼 곳, 해방 직후 한국 아나키스트의 본산지이기도 했던 곳, 지방 유지가 중심이 되어 행정구역상 1개 면단위에 지나지 않는 작은 고장에 사학으로서의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던 기질은 그같은 안의 사람들의 진취적 성향을 입증하는 실례라 할 수 있다.
남덕유산에서 동남으로 60여 리를 뻗어내린 산줄기에 둘러싸인 옛 안의 권역은 풍광이 뛰어난 형승지(形勝地)라는 점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남덕유산에서 월봉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월봉산에서 남으로 거망산, 황석산, 동으로 금원산, 기백산, 조두산을 정상으로 하여 산맥을 이룬 옛 안의군 권역에서 특히 금원산 동북편 계곡의 원학동(猿鶴洞), 기백산 서남편 장수(長水) 계곡의 심진동(尋眞洞), 황석산 서쪽 계곡의 화림동(花林洞)은 안의 삼동(安義三洞)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객지에 나와 있는 안의 사람이 모여 향수에 젖으면 대뜸 "원학 심진 화림 삼동 화려한 산수, 삼천리 금수강산 이곳이로세. 이 강산 정기를 타고 받아서 배달민 정신을 이어 받았네..." 하는 노래가 따르고 어느덧 마음은 화림동의 농월정으로, 심진동의 용추폭포로, 황석산 기암괴석의 산정으로 달려 가는 것이다. 옥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월연(月淵), 차일(遮日), 풍류(風流), 욕기암(浴沂巖) 같은 반석이 널브러졌고, 팔정 팔담(八亭八潭)과 명승고적이 역사와 풍류와 전설을 간직한 채 즐비한 곳이 안의이기에 안의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하다.
세월을 따라 흘러간 인물이야 굳이 말해 무엇하리요.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아 삼당이 갖은 곳에 인심나기 제격이다. 숭절상검(崇節尙儉)의 정신으로 안의 사람의 기질을 살리면서 큰 그릇인 함양인의 일원으로 동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예로부터 함양권역은 인물의 고장이다. 경상도는 지리가 아름답다고 했다. 황지(潢池)에서 발원한 물이 강을 이루어 경상도의 중앙을 흘러가니 상주(尙州)의 동쪽이란 뜻으로 낙동강(洛東江)이다. 강의 동쪽을 좌도(左道), 서쪽을 우도(右道)라 했다.
경상도의 인물을 말할 때 좌안동(左安東) 우함양(右咸陽)이라 했으니, 함양은 인물의 고장이다. 이제와서 옛것을 들추어 자랑하는 것은 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함에서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산수의 고장이요 기라성같은 인재가 배출된 인물의 고장을 어머니같은 고향으로 삼고 있는 우리 함양인은 축복받아 마땅할 일이다. (재부안의향우회지 '내고향 안의' 창간호. 2000. 4. 15) 여강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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