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문(諺文) 진서(眞書) 섞어 작(作)
조선조 후기 정조 때 무식한 판서로 유명한 이문원이란 분의 글귀이다. 이문원의 양아버지 이천보가 사도세자를 위해 애쓰다가 자결한 때문에 정조는 서로의 아버지 생각을 하고 공부가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중용하였다. 이문원 역시 무식한대로 기지와 배짱으로 진심껏 봉사하여 가지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한번은 간소배들이 그를 과거에 도시관으로 천거했는데, "내가 무어 알겠소? 대감들 요량껏들 하시오" 해 놓고 얼마만에, "집의 애들도 커 가는데 거 글씨 잘 쓰고 글 잘된 거 있거든 몇 장 골라 봐 주시구료" 하였다. 멋모르는 시관들이 골라 주었더니 그것으로 발표를 해 버려 , 조선조 오백년에 전무후무하게 공평한 과거가 되었더라고 한다.
그가 한번은 남산에서 놀이가 있어 나갔더니 시들을 짓는다고 야단들이다.
- 알각달각 등남산(登南山)하니 승지(承旨) 참판(參判) 영감래(令監來)라 언문(諺文) 진서(眞書)를 섞어 작(作)하니 시비자(是非者)는 황견자(黃犬子)라 -
'따지는 놈은 누렁개 아들(是非者 黃犬者)'이라 하였으니, 좋으니 그르니 말도 못하게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또 한번은 모화관(慕華館)에서 중국 들어가는 사신을 송별하는데,
- 동지사 모화관(冬至使慕華館) 상부사 서장관(上副使西狀館)
연경로 삼천리(燕京路三千里) 거평안 내평안(去平安來平安) - 이라고 읊어 이 역시 극진한 우정을 표시한 평명한 글이라 하여 널리 알려진 것이다.
# 여언(汝言)이 시얘(是也)로다.
'네 말이 맞다'라는 뜻의 말이다.
조선조 초의 명 재상으로 널리 알려진 황희 정승의 일화에 이런 것이 있다. 그는 청백하여 살림이 군색하였으나 마음이 너그럽고 통이 커서,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 못할 일을 곧잘 하였다.
하루는 집에서 부리는 두 종년이 서로 싸우고 와서 호소한다. "아무개 년이 이리이리 하여서 쇤네가 이리이리 하였사온데 제 말이 옳습죠?". "오냐 네 말이 맞다(汝言이 是也로다)".
상대방 여자가 달려 와서 제 입장을 발명하며 떠드니까, 또한 "오냐 네말이 맞다(汝言이 是也로다)"였다. 서로 주장하고 싸웠는데 둘다 맞을 리는 없다.
부인이 옆에서 보다가, "아이 참 대감! 딱도 하시오. 아무개 년은 이렇고 요년은 이러니 이 말이 옳지 그래 다 옳다는 말이 어딨어요?". "그래 그래, 당신 말이 옳소" 이렇게 대답하였더라고 한다.
하기야 주장하는 한편 말만 들으면 제각기 다 옳지 않은 바도 아니지만, 이렇게 무능한 분이 어떻게 조정에 섰나 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하루는 대궐에 사진(仕進)하려고 관복을 정제하고 의자에 앉아 떠날 차비 되기를 기다리는데, 부인이 그 방에 들어서다 말고 무리청 하였다. 전신에서 뚝뚝 넘쳐 흐르는 위엄, 찬바람이 휭 돌 지경이다. 황희 정승은 빙그레 웃으며, "우리 마누라가 이제야 정승을 알아 보는 군!" 하였더라니 조정에서의 그의 태도를 미루어 알만하다.
요즘 세상 정치인들의 마음가짐 행동거지와 대비되어 무언가 우리는 근본적인 것을 망각하고 착각을 하고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송도(松都) 삼절(三節)
삼절(三節)이라면 흔히 시서화(詩書畵)를 말한다. 즉 선비의 점잖은 그림인 문인화(文人畵)에서, 그림과, 찬(贊)으로 쓴 글과, 그것을 화면에 써 넣는 글씨, 세가지가 다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런 말(三節)로 호칭한다. 우리 나라로는 정조 때 자하(紫霞) 신위(申緯)같은 이가 그럴 정도다.
그런데 여기 얘기하는 삼절은 이것과 다르다.
조선 중엽에 송도에 황진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인물도 뛰어났으려니와 글도 짓고 속류에 휘말리지 않아 스스로 높이 처하였다.
그래 그 기생이 송도에 다시 없이 뛰어난 것으로 산수 경치에 박연폭포, 남자로는 화담 서경덕, 그리고 자신, 이렇게 셋을 꼽았기 때문에 얘깃거리가 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또 많은 소설가에 의해 윤색된 일이지만, 황진이가 당시에 도학 높다는 사람의 여색에 대한 태도를 시험해 봤더란다.
첫째 유학자인 퇴계 선생은 담담하려고는 하나 무척 고민하는 눈치였고, 둘째 화담 선생은 자기의 요구대로 쓸어안아 주기까지 하는데 마치 물건이나 다루듯 전혀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면벽(面壁) 9년의 생불 스님이라는 지족(知足) 선사(禪師)를 시험해 봤더니 전혀 접근도 못하게 하다가 그만 유혹을 배기지 못하여 파계(破戒)하고 놀아난다. 세상에 이것을 망석중이라 하고, 이것을 제재로 한 야단스런 춤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진이는 자연물로서의 박연폭포, 도학자로서의 서경덕, 그리고 자신을 넣어 이렇게 송도의 삼절(三節)을 꼽았다는 것이다.
# 동상전(東床廛)엘 갔나
이 말은 싱겁게 웃는 사람을 보고 함축성 있게 놀리는 소리다. 혹은 '안동상전(安洞床廛)엘 갔나?'라고도 한다.
옛날 궁중의 나인이라는 여관(女官)들의 생활이란 확실히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래 이 나인들을 다소나마 고적감에서 구해주려는 방편으로 동성끼리 결혼을 시켜 완전히 일반 가정과 같이 영감 마누라를 분명히 하여 무수리라는 하인을 부리며 가정을 이루고 살게 하였다.
그 때에는 상감이 살림제구 일체를 차려 주는데 자개장은 그들의 외 쪽 생활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성생활을 위하여 암소뿔을 깎아 '각신(角신)'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두께 한 푼 정도로 얇게 후벼낸 속을 풀솜으로 채우고 더운 물에 담가서 쓰면 탄력이 있어 제법 쓸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하는 길은 친정을 통하여 전기한 종로의 안동(安洞) 상전(床廛)이라는 일용 잡화상(요즘의 성인용품점)에서 손에 넣는 도리밖에 없다.
그래 장옷을 쓴 여인이 들어와 말 않고 쌩긋이 웃으며 돈뭉치를 내 놓으면 주인은 알아차리고 종이에 싼 그것을 내어 주었더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는 일반으로 왕의 생존 기간이 짧아 교체 퇴역한 나인들이 다량으로 나오게 되어 지금의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희궁에 수용하였었다. 나중 그 궁을 철거할 때 그 진귀한 물건이 수십개나 나타나 외국인 수집가에게 고가로 팔렸다는 얘기조차 있었다.
# 을축(乙丑) 갑자(甲子)
언제나 민중은 자신들의 억울한 심정을 민요에 붙여 토로하게 마련이다.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 산천이 밝아온다
(후렴) 에에 에헤이에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을축 사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일제 - (후렴)
도편수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 한다 - (후렴)
이상은 경복궁타령의 첫머리 부분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동원된 팔도 기술자 일군들 사이에서 퍼진 노동가요다.
그런데 여기 '을축 사월 갑자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실지로 경복궁 역사를 시작한 것이 1865년(고종2년) 4월의 일이다. 사실대로 노래 불렀다면 그만이겠지만 여기 갑자 을축이 뒤집혀 놓인게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은연 중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고 비방하는 소리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또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는 속담은 조선조 말 민중전(閔中殿)의 지나친 발호를 노골적으로 욕한 것이요, '나이나 적은가 갑술생, 키나 작은가 왱이래...' 하는 것은 폐인에 가까운 순종 황제의 무능을 개탄하여 퍼졌던 객담의 일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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