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의 황고집
평양 외성에 황순성이라는 진사가 한 분 있었다. 연대도 과히 오래지 않은 분이다. 성정이 고지식하고 곧아 남이 고집이라고 별명 지으니, 또 그리 싫어하지 않고 집암(執菴)이라고 스스로 호(號)하였다.
한 번은 나귀를 타고 지나는데 도둑의 떼가 나와 가진 것을 모두 빼았는다. 그래 그는 선선히 내려서서 고삐까지 내어 주며 하는 말이, "하 쇠약해서 때리질 않으면 가질 않습니다" 하였다. 도둑놈 대장이 한참 보더니, "댁이 외성 황고집 황진사 아니오?" 하고 도로 주고 갔다 한다. 도둑들도 그런 분의 물건 뺏기에는 마음이 꺼렸던 모양이다.
또 한 번은 서울을 왔다가 평양에 벼슬 살러 왔던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행들이 같이 조상(弔喪)을 가자고 하니까, "그 사람하고 나 사이에 볼 일 보러 왔던 끝에 조상 한대서야 말이 되느냐?"고 그 길로 평양 5백 5십리 길을 부지런히 내려가 다시 되짚어 올라와서 조문을 하였다 한다.
이것이 어떻게 와전되었는지 <황꼽배기>라고, 인색한 사람의 대명사처럼 전하는 이가 있으나 근엄하고 규모가 있었을 뿐 그에게는 가당치 않은 얘기다.
# 할 말이 없다
조선조 때 재상으로, 초기에 황희(黃喜)요 말기에 김재찬(金載瓚)이라 하여, 황금 마구리라는 말까지 생기게 한 김재찬 재상에 관해 이런 얘기가 있다.
그가 처음 문과에 급제하자, 무신 이창운의 눈여긴 바 되어 그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있어 불러도 잘 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창운이 대노하여 군령으로 베이겠다고 곧 잡아 들이란다.
그제사 크게 놀라 아버지 욱(역시 대신을 지낸 분)께 들어가 살려 달라고 비니, "네가 방자하여 체례(體禮)를 없신 여겨 저지른 일이니 낸들 어찌하랴" 하고 꾸짖고는 편지 한 장을 들려 보냈다.
이창운이 잡아 들여 꿇려 놓고 노대감의 편지가 있다기에 받아 뜯어 보니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백지가 있을 뿐이다. 할 말이 없노라는 뜻.
이에 이창운이, "내 너를 죽일 것이로되 대감 낯을 보아 살려 준다" 하고는 한 곳에 가두고 평안도 지리와 군비에 대하여 상세히 가르쳐 주고는 강을 받는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일 만에 타이르기를, "일후에 반드시 쓸 기회가 있으리라. 내 그대를 그릇으로 보고 부탁하는 것이니 부디 잊지 말라" 하였다.
김재찬이 나중 대신의 반열에 오른 뒤 홍경래의 난이 터졌는데 온 조정이 오직 창황할 뿐이라, 공이 일부러 행차를 천천히 하여 대로를 지나 민심을 가라앉히고 손에서 바람이 일도록 지휘하여 이를 평정하니, 이것은 모두 이십 여년 전 이창운의 교시한 바를 활용한 것이었다.
# 청기와쟁이 심사
우리는 고려청자의 훌륭한 기술을 열었으면서도 그것을 이어서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건만 그 기술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좋은 기술이 있어도 그 비법을 일러 주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다가 죽어가서 그리 된 것이라 하여 이를 '청기와쟁이 심사'라고 한다.
또 '청개구리 심사' 라는 것도 있다. 청개구리 이야기는 이웃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독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밭일을 하다가도 청개구리가 울면, "이크 저녁 상식(喪食)올리는군!" 유의 말은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이 밖에 '모과나무 심사'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과나무 밑둥이 뒤뒤 틀렸대서 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워낙 늦게서야 열매가 여는 때문에 나온 소리이기도 하다.
심술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심사라든지 변강쇠타령에 나오는 심술들을 보면 가히 심술이 가관일 정도로 대단한 민족이다.
# 삼(蔘) 서근 찾았군
조선왕조 선조 때의 일이다. 난리가 나리라는 등 소문이 뒤숭숭하던 판국이라 임금은 지인 지감이 있는 어떤 명사에게 사람 하나를 천거하라고 부탁하였단다.
그랬더니 얼마만에 들어와 복명하기를, "어명대로 하나 구하긴 했습니다마는 워낙 쇠약해 있으니 삼 서근만 하사해 주시면 소복도 되려니와 특히 역량을 발휘하여 봉사할 것입니다."
그래 어련하랴 하고 삼(蔘)을 내보내 주었는데 그뒤 데리고 들어온 것을 보니, 자 세치 관복이 끌린다고 하는 작은 체수에 얼굴은 흐르고 도무지 볼품이 없다. 임금은 어이가 없어 내뱉듯이 말했다. "삼 서근 버렸군!"
이 사람이 다른 이 아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다.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임금 선조는 팔자에 없는 피난길에 오르게 됐는데 아무리 초초한 몽진(蒙塵)길이라도 수라가 번번이 늦어 시장해 배길 길이 없다. 그래 담당자를 불러 나무라니까, "다름 아니라 이원익이 와서 먼저 한가지씩 줏어 먹고는 뙤약볕에 한참씩 드러누웠다가라야 들여보내기 때문에 늘 이렇게 늦습니다." 하는 대답이라 그를 불러 탄했더니, "이 분란 중에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 신(臣)이 먼저 한가지씩 먹어 본 것이고, 만약에 독이 들었더라도 볕에 누웠으면 빨리 퍼질 것이라, 그래서 신의 소견껏 하였을 뿐이옵니다."
그제사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삼 서근 찾았군." 하였단다.
이원익은 뒤에 수 팔십을 넘기고 원로대신으로서 광해군 때 여주로 귀양가 있다가 인조반정엔 은연중 고문 구실을 하여 세상이 바로잡히는 것을 보고야 세상을 떠났다.
삼 서근이 문제가 아니다.
# 구렁이 제 몸 추듯 한다
이 말은 사람이 제 자랑을 늘어놓든지 할 때 하는 소린데, 구렁이가 어쨌다는 얘기는 없다.
다만, 중국 고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자기의 회포를 읊은 어부사(漁父辭)에 擧世皆濁이어늘 我獨淸하고 衆人이 皆醉어늘 我獨淸이라(온 세상이 모두 썩었건만 나 혼자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건만 나 홀로 깨어 있다)한 대목이 있어, 본시 '굴원이 제 몸 추듯 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굴원이가 특별히 심청이 사나웠을 리도 없건만 어느 결에 음이 비슷한 구렁이로 화해 버린 것이다.
그 굴원이가 자기 주장이 통과 안되자 양자강 중류 멱라수에 투신자살을 한 때문에 고사(故事) 좋아하는 사람은 이 방면의 대표 인물로 친다.
표연수(表沿洙)라는 사람이 있어 연산군 때 벼슬을 했는데, 한강에 놀이 나간 자리에서 왕이 배로 내려가자는 것을 노를 끌어안고 간(諫)하여 말리다가 그것을 뺏는 바람에 물에 떨어졌다. 모두가 건져서 나왔을 때 물었다.
"물엔 왜 들어갔더냐?".
"들어가 굴원일 만나고 왔습니다".
"그래 굴원이가 뭐라고 하더냐?".
"나는 어두운 임금을 만나 물에 던져 죽었거니와(我逢暗君投江死) 너는 밝은 임금을 모셨는데 무슨 일로 왔느냐(爾遇明君底事來)고 시로 대답합디다."
이렇게 풍자를 잘 하였는데 결국 귀양가서 죽었다.
예나 이제나 거짓이 판을 치고 진실이 홀대받는 세상이란 참 살맛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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