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熟語 神話傳說

식지/ 빙탄불상용/ 수서양단/ 오십보백보

如岡園 2009. 8. 13. 10:32

          # 식지(食指)

 사람의 다섯손가락 이름은 엄지손가락으로부터 차례로, 거지(巨指,엄지손가락), 식지(食指,집게손가락), 장지(將指,長指,가운뎃손가락), 무명지(無名指,약손가락), 소지(小指,새끼손가락)이다.

 이 중에서 둘째 손가락을 식지(食指)라 한 것은 식사할  때 쓰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식지가 동한다'고 하면 식욕이나 혹은 사물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는 말이다.

 옛날의 중국 정(鄭)나라 영공(靈公)에게, 초나라 사람이 커다란 거북을 진상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공(子公), 자가(子家) 두 공자가 입궐하려 하는데 자공의 둘째 손가락이 움직거렸다. 자공은 자가에게 그 손가락을 보이면서 "항상 이렇게 내 식지가 동하면 맛있는 것을 먹게 되거든".

 아니나 다를까 입궐해 보니 거북 요리를 먹을 판이었다. 그런데 두 공자가 식탁을 대했을 때 자공은 불려 나가게 되었다. 아까 식지가 동한 노릇을 무효가 되게 해보려는 조롱이었는데 자공은 노하여 식지에다 솥의 요리를 묻혀 가지고 빨며 나갔다.

 영공은 노하여 자공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공은 제가 선수를 써서 영공을 죽이기로 마음 먹고 자가에게 의논하였다. 자가는 불응했으나 자공의 위협에 못이겨서 수긍하였다. 그래 영공은 마침내 죽었다.

 <춘추(春秋)>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식사에 관한 원한이란 이렇게 심각한 것이다.

 

          #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얼음과 숯은 서로 성질이 다르고 용납되지 않듯이 결코 어우러질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

 한나라 무제를 섬긴 신하에 동방삭이라는 별난 명신(名臣)이 있었다. 매우 박식하여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는 법이 없어 무제는 늘 그를 말벗으로 삼았다.

 어전에서 식사를 하면 남는 고기는 아내를 위해 가지고 돌아가고 옷이 베풀어지면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가곤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으나 본인은 흔연하게, "난 궁중에서 숨어 사는 사람이라네. 심산초야(深山草野)에서만 숨어 사나?"

 이렇게 이죽거리면서도 정확한 관찰력으로 풍자적인 시문을 썼다.

 "심사가 끓어올라 뜨겁기가 탕물 같으니, 얼음과 숯은 서로 용납되지 않는 법(氷炭不相容)"이라 한 그의 글귀는 충신과 아첨배가 공존할 수 없다는 비유였다.

 

          # 수서양단(首鼠兩端)

 쥐는 의심이 많으므로 구멍에서 목만 내놓고 나올까 말까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서린다. 이것처럼 태도 결정이 확실하지 못함을 두고 '수서양단'이라 말한다.

 전한(前漢) 제4대 경제(景帝)에서 제5대 무제 연간에 위기후(魏其後)와 무안후(武安後) 두 사람은 좋은 적수였다. 무안후가 아직 어렸을 때 위기후는 대장군이었는데 경제 만년에는 무안후도 상당한 자리에 있었고 경제가 죽은 후로는 거꾸로 무안후가 재상이요 위기후는 차츰 몰락해 가는 과정이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된 것은 위기후의 친구인 강직한 장군 관부(灌夫)가 사소한 사고를 일으킨 것이 동기였는데, 그 사고를 가지고 두 사람이 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상대방을 헐뜯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기가 난감해져서, 관리의 죄를 규명하는 구실인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에게 물었더니, "양쪽의 주장에 각기 일리가 있어서 판단키 어려우니 폐하께서 몸소 가름하소서". 하였다.

 그래 이번에는 내사(內史.長官)에게 물었다. 그는 본시 위기후 쪽 사람이었으나 형세가 무안후에게 유리할 듯 싶어서 뚜렷한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한편 무안후는 어사대부를 꾸짖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쥐가 구멍에서 목만 내놓고 나올까 말까를 망서리고 있는 것처럼(首鼠兩端) 흑백을 뚜렷이 가리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거요".

 어사는 이윽히 궁리하던 끝에 "명안(名案)이 있습니다. 먼저 대감께서 재상 자리를 하직하시겠다면서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린데 대해서 사과하십시오. 황제께서는 그것을 대감의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여기고 결코 대감을 물러 앉히시지는 않을 것이 올시다. 그러노라면 위기후는 내심 부끄럽게 여겨 자살을 하겠지요. 지금처럼 두분이 서로 비난해대는 건 참으로 위신 문제올시다".

 무안후는 그 말대로 했더니 과연 황제의 신임이 도리어 두터워졌다.

 위기후는 지금까지의 일들이 철저히 조사되어 먼저 문제의 중심이었던 관부 장군네에 일족이 처형되었고 위기후도 이윽고 처형되고 말았다.

 그런데 무안후도 미구에 병석에 눕게 되어 꿈결에 외쳐대는 것이었다. "용서해 다오! 내가 잘못이었어."

 무당에게 보였더니 이 병환은 위기후와 관부 장군의 원혼이 무안후를 죽이려는 것이라 했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두 사람의 원혼은 떠나지를 않다가 무안후는 한 주일쯤 후에 죽고 말았다.

 

          # 오십보 백보(五十步百步)

 조그마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큰 차이는 없음을 말한다.

 맹자는 철저한 이상주의자로서 남에게 자기의 사상을 설득할 때는 기백이 넘쳤다.

 당시의 사상가나 책략가들은 여러 나라의 왕을 찾아다니며 유세(遊說)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맹자가 위나라의 혜왕에게 초대되었을 때 얘기다. 당시 위나라는 서쪽에선 진(秦)나라의 압력을 받고 동쪽의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선 여러번 크게 져서 심한 역경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 혜왕은 이름높은 현사(賢士) 일재(逸材)를 청해다가 의견을 들어 국운을 만회하려고 꾀하는 터였다.

 그는 맹자더러, "짐은 흉년에도 백성을 위하여 극진히 돌봤건만 이웃 나라에 비해서 백성이 불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대왕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관한 비유를 한마디 여쭙겠습니다. 싸움터에서 진격의 북소리가 들려오자 병사 하나가 겁을 집어먹고 투구를 벗어던지고 칼을 이끌며 백 걸음쯤 도망쳐 왔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런데 뒤에서 오십 걸음쯤 도망치던 병사가 그를 비웃으며 비겁쟁이라고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치도 않소. 오십보나 백보나 도망치기는 매일반이오."

 "네, 바로 그 점이올시다. 비단 흉년에만 백성을 돌보실 게 아니라 평소부터 백성들의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 예의와 교육이 도저한 문화 국가를 지향하실 일이요. 그 밖의 아무 것도 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