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수필

청란몽(靑蘭夢)/이육사

如岡園 2009. 7. 10. 10:23

 거리의 마로니에가 활짝 피기는 아직도 한참 있어야 할 것 같다. 젖구름 사이로 길다란 한 줄 빛깔이 흘러내려온 것은 마치 바이올린의 한 줄같이 부드럽고도 날카롭게 내 심금의 어느 한 줄에라도 닿기만 하면 그만 곧 신묘한 멜로디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정녕 봄이 온 것이다.

 이 가벼운 게으름을 어째서 꼭 이겨야만 될 턱이 있느냐.

 대웅성좌(큰곰별자리)가 보이는 내 침대는 바다 속보다도 고요할 수 있는 것이 남모르는 자랑이었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표류기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날씬한 놈, 몽땅한 놈, 기는 놈, 달리는 놈, 수없이 많은 어족들이 세상을 찾았는가 하면 어느 때는 불에 타는 열사(熱沙)의 나라 철수화(鐵樹花)나 선인장들이 가시성 같이 무성한 위에 황금자국같이 재겨붙인 작은 꽃들, 그것은 죽음에의 유혹같이 사람의 영혼을 할퀴곤 하였다.

 소낙비가 지나가고 무지개가 서는 곳은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계류(溪流)를 따라 올라가면 자운영 꽃이 들로 하나 다복이 핀 두렁길로 하늘에 닿을 듯한 전나무 숲 사이로 들어가면 살짐맥이들은 잎풀을 뜯어먹다간 벗말을 불러 소리치곤 뛰어가는 곳, 하이얀 목책이 죽 둘린 너머로 수정궁같이 깨끗한 집들이 즐비한 곳에 화강암으로 깎아박은 돌계단이 길다랗게 하양(夏陽)의 옅은 햇살을 받아 진주가루라도 흩뿌리는 듯 눈이 부시다.   

 마치 어느 나라의 왕궁인 듯 호화스럽다. 그렇다면 왕은 수렵이라도 가고 궁전만은 비어 있는 것일까 하고 돌축을 하나하나 밟아가면 또다시 길다란 줄 행랑(行廊)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오른편으로 돌아들어 왼편으로 보이는 별실은 서재인 듯 조용한 목에 뜰앞에는 조롱들 속에서 빛깔 다른 새들이 시스마금 낯선 손님을 맞아 아는 체하고 재재거리고 그 아래로 화단에는 저마다 다른 제 고향의 향기를 뽑아 멀리서 온 에트랑제는 취하면 혼혼하게 잠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가벼운 바람과 함께 앞창이 슬쩍 열리고는 공주보다 교만해 보이는 젊은 여자 손에는 새파란 줄기에 양호필(羊毫筆)같이 하얀 봉오리가 달린 난화(蘭花)를 한다발 안고 와서는 뒤를 돌아보며 시비(侍婢)를 물리치곤 내 책상 위에 은으로 만든 화병에다 한 대를 골라 꽂아두곤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가는 그만 부끄러운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심조심 물러가고  만 것이다.

 달빛이 창백하게 흐르면 유리창을 넘어서 내 방안은 추워졌다.

 병든 마음이었고 피곤한 몸이었다.

 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나는 모든 것을 내 혼자 병들어온다. 병도 나에게는 한 개의 향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무덤 같은 방 안에서 혼자서 꿈을 꿀 수가 있지 않은가. 잠이 깨면 또 달이 밝지 않는가. 그 꿈만은 아니었다. 그 여자가 화병에 꽂아주고 간 난꽃이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복욱하고 청렬한 향기가 몇천만 개의 단어보다도 더 힘차게 더 힘차게 더 따사롭게 내 영혼에 속삭이는 말 아닌 말이 보다 더 큰, 더 행복된 위안이 어디 있으므로 이것을 꿈이라 헛되다고 누가 말하리오.

 진정 헛된 꿈이라고 말하면 꿈 그대로 살아보는 것도 또한 쾌하지 않은가.

 나는 때로 거리를 걸어보기도 하나 그 꿈 속에서 걸어 본 거리와 그 여자의 모습은 영영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때로 꽃집을 들러도 보고 난꽃을 찾아도 보았으나 내 머리 속에 태워 붙인 그것처럼 사라질 줄 모르는 향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꿈은 유쾌한 것, 영원한 것이기도 하다.       - 이육사 -

 

 

이육사를 흔히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서만 알기 쉽지만 정작 이육사가 지녔던 예술적 天質은 시에서는 다만 빙산의 일각과 같이 그 片面만이 나타났을 뿐이고 그의 문학가적 天稟은 수필 중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수필 13편은 그 어느 작품을 읽어도 육사의 그윽한 서정이 스며나와 읽기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평범한 작품이면서도 문장의 구석구석과 센텐스의 대목대목에 육사만이 가진 시인적 섬광이 밤바다의 야광충처럼 隱現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2백자 원고용지 열장도 미처 되지 않는 이 <靑蘭夢>은 전편이 상연하고도 아담한 정회에 넘쳐 읽는 사람의 가슴에 아련한 물결을 펼쳐 놓는다. 그 아련한 물결은 고향과 육친과 친구와 자연풍물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연상의 실꾸러미에 얽히면서 멈출 줄을 모른다. 육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인간세상의 온갖 萬象이 그을은 백금빛 같은 회고의 음영을 벗하면서 육사의 서정 속에서 순화되어 읽는 이의 가슴에다 끝없는 여운을 떨쳐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