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턴을 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찬란한 존재다. 그러나 토스카니니 같은 지휘자 밑에서 플루트를 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다 지휘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 콘서트 마스트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같이 하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에 있어서는 멤버가 된다는 것만도 참으로 행복된 일이다. 그리고 각자의 맡은 바 기능이 전체 효과에 종합적으로 기여된다는 것은 의의 깊은 일이다. 서로 없어서는 안 된다는 신뢰감이 거기에 있고, 칭찬이거나 혹평이거나 '내'가 아니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자기의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이 얼마 아니 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독주하는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서운할 것은 없다.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무음(無音)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스볼 팀의 야외수와 같이 무대 뒤에 서 있는 콘트라베이스를 나는 좋아한다. 베토벤 교항곡 5번 <스케르초(Scherzo)>의 악장 속에 있는 트리오 섹션에는 둔한 콘트라베이스를 쩔쩔매게 하는 빠른 대목이 있다. 나는 이런 유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스 플레이어를 부러워한다.
<전원교향악> 제 3악장에는 농부의 춤과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서투른 바순이 제때 나오지를 못하고 뒤늦게야 따라나오는 대목이 몇 번 있다. 이 우스운 음절을 연주할 때의 바순 플레이어의 기쁨을 나는 안다. 팀파니스트가 되는 것도 좋다. 하이든 교향곡 94번의 서두가 연주되는 동안은 카운터 뒤에 있는 약방 주인같이 서 있다가, 청중이 경악하도록 갑자기 북을 두들기는 순간이 오면 그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자기를 향하여 힘차게 손을 흔드는 지휘자를 쳐다볼 때, 그는 자못 무상의 환희를 느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공책에 줄치는 작은 자로 교향악단을 지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토스카니니가 아니라도 어떤 존경받는 지휘자 밑에 무명의 플루트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때는 가끔 있었다.
皮千得(1910-2007) : 시인. 수필가. 호는 琴兒. 서울 출생으로 1940년 상하이 후장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사범대 교수. 서울대 대학원 영문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했다. 1930년 신동아에 '서정소곡'을 처음으로 발표하고 뒤이어 시 '소곡'과 수필 '눈보라치는 밤의 추억' 등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저서로 수필의 본질을 파고든 대표작 <수필>과 <서정시집> <금아시문선> <산호와 진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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