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10호를 내면서 처음으로 책머리에 작품 아닌 글을 싣기로 했다. 창간호를 낼 때 '동인의 말'이란 글을 필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실은 적이 있다. 말하자면 창간사인 셈이었다. 그 때 그 글의 끝에 이런 말을 한 기억이 새롭다.
"......분명한 것은 대명천지 큰길이다. 큰길을 걷는 데는 걸음걸이 하나 차림새 하나에도 마음을 써야 할 터. 스스로 떳떳한 마음 가짐새로 염양(廉讓)을 중히 여기면서 가야 할 길.
함께 갈 길에 작은 깃발 하나 만들어, 거기에 '길' 자를 새겨 높이 세운다."
이렇게 '길'은 출발했다. 그게 2003년 이른 봄이었고, 창간호가 나온 것은 8월 15일이었다. 그동안 동인 여러분이 얼마나 염양을 중시하면서 바른 자세로 걸어왔는지는 우리 스스로 평가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염양을 망각한 채 남의 손가락질이나 받으면서 사시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는 생각이다.
우리 '길 동인들은 처음부터 작품 외는 어떤 것도 동인지에 싣지 않기로 했다. 동인 소개도 아예 없애기로 했다가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차원에서 필자가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했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정도만 밝혀 왔다. 필자의 사진은 물론, 과거의 사회 활동이나 연구물, 저서, 수상 경력 같은 것도 일절 밝히지 않았다. 다만 동인 서로의 편의를 위해서 책 뒤에 주소(전자주소)와 전화 번호를 밝힌 정도였는데 그것도 2호부터였다.
왜 그랬을까. 지금 이 시대가 지나치게 자기 홍보 내지는 자아 광고의 시대라는 데 어떤 혐오감 같은 걸 느끼고, 진작부터 이런 풍조를 조금 경원해 왔기 때문이다. 정치가나 연예인이라면 몰라도 글을 쓰면서 자기를 알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가만히 있는 점잖음이 훨씬 미덥고 마음 놓이지 아니한가. 이 시대에 군자 운운하는 것부터가 가당찮은 소린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군자가 그립지 아니한가.
무엇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어떤 강렬한 욕구에 의해 글을 쓰는 게 아니고,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할 수단으로써, 아니면 심심풀이의 한 방법으로써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자 불행이다. 그런 사람들을 일러 어떻게 문인, 서사라고 하겠는가.
우리는 자기를 알리지 못해 안달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인 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속의 허명에서 어느 정도 초탈한 분들과 더불어 동인회를 만들기로 했다. 서로가 그렇다고 인정하는 분들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동인 창립의 뜻을 세운 날부터 책이 나오기까지 좀 오래 걸렸던 것이다. 준비 기간이 길었던 만큼 '길'은 결속력이 강했고, 동인들은 처음부터 10년은 함께한 것 같은 우의로 출발하여 오늘 10호에 이르렀다.
우리는 책에 광고를 실어 출판비를 해결해 보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끝내 그것마저 하지 않기로 의논을 모았고, 우리 회비로만 책을 내기로 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물론 시청에서 지원하는 문예지원금은 몇 번 받은 적이 있지만 이번 호에는 그것마저 없다.
그동안 10호를 내기까지 매호 옥고를 주신 동인님들, 어려운 형편인데도 회비(출판비)를 착실히 내 주신 동인님들, 특히 가끔씩 성금을 더 보태 내 주신 동인님과 몇몇 뜻있는 분들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경의를 표하며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사이 모진 병환을 앓으신 동인, 값진 작품집을 내신 동인, 또 권위 있는 상을 받으신 동인 등이 계시다. 투병하신 분은 승리하시어 건강을 되찾으셨는데, 위로와 축하의 인사를, 책을 내셨거나 상을 받으신 분들에게는 다시 한 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격려의 박수를 드린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고 영광을 돌리고 싶다.
새삼 정답고 존경스러운 동인 열일곱 분의 면면들을 살펴본다. 여성이 네 분, 나머지가 남성이다. 문인이 열한 분이고 비문인이 여섯 분이다. 문인을 다시 장르별로 살펴보면 시인이 여섯 분이고 소설가는 두 분, 수필가가 다섯 분, 평론가가 한 분이다. 교육계에 종사했거나 종사하고 계신 분이 열 분인데, 이를 다시 보면 교수 출신이 여섯 분이고, 현직 교수가 한 분이다. 그리고 언론계 출신이 두 분이고, 자치단체장이 한 분, 카톨릭 수도자가 한 분이다.
그러나 이런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역시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보채지도 나부대지도 않는 분들이란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동인이요, 마음 맞는 친구들이다. 글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보다 사람을 더 중시한다는 게 모든 동인의 공통된 생각이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아마 이 뒤에는 책머리에 실리는 글은 없을 것이다. 그러다 20호에나 다시 실릴지 모르겠다. 이러한 묵계는 오래오래 지켜질 것이다.
'길' 동인 여러분 만세, 동인지 '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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