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어원
J. 조이스는 <소년예술가의 초상>에서,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내 이름이 스티이븐인 것처럼 Dieu는 하나님이라는 프랑스 말이며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Dieu라고 부르면 기도하는 사람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곧 아신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가지 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서로 다르고 그리고 하나님은 온갖가지 말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뜻을 아시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정말 이름은 하나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하느님'이란 단어는 중세 국어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 말이다. 근대 국어 시기에 들어서 박인로의 가사 <태평가>와 명성 왕후의 언간(諺簡) 등에 '하나님'이란 말이 보인다. '하날'(天)에 접미사 '-님'이 붙어서 된 파생 명사이다.
신화에서의 하느님
한국 신화에서의 하느님(天帝)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신화에 따라 각기 달리 표현되며, 그 기능에도 미세하게나마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단군신화에서 환인(桓因)이 있는데, 그 행위가 구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주몽 신화에서의 천제(天帝) 또한 이와 같다. 지상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하늘의 명으로 인간을 제어하는 초월적 존재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주관하는 고귀하고도 신성한 존재이다. 단군 신화나 가락국 건국 신화 등에 나타나는 하느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하느님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이끌어 주는 주재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곧,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이 세상을 통치할 군왕을 땅으로 보내며, 그러한 능력이 있음도 아울러 보여 준다.
무속 신화와 구전 신화에서의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여 인간에게 자신의 위력을 구체적으로 과시한다. 그러나 불교나 도교의 영향으로 인해 그 명칭이나 외형이 변모되어 표현되는데, 창세 신화에서의 미륵님이나 천지왕, 옥황상제와 같은 이칭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하느님이라는 구체적인 호칭은 구전 신화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구전 신화는 문헌 신화와는 달리, 하느님의 위엄이나 창세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그 창세적 직능이나 상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러한 하느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만든 초역사적 절대자를 상징한다.
무속, 민속에서의 하느님
여기에서는 인간의 본질인 얼(魂)을 하늘이 준 생명의 알맹이로 여기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되돌아간다(歸天)고 믿는다.
하늘을 주재하는 존재는 한울님, 하늘님, 한얼님, 하느님 등으로 불린다. 하느님은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며, 하늘을 주재함으로써 인간 세계를 주관하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늘의 신을 천제(天帝, 하느님)라고 하는 데 비하여, 땅을 주관하는 신은 지신(地神), 바다의 신은 해신(海神), 강의 신을 하백(河伯)이라 한다. 곧, 모든 차원의 세계를 주관하는 초인간적인 존재들을 하늘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 체계 또는 관료적인 서열 체계에 두었다. 여기에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에 왕과 봉건 제후, 그리고 하급 귀족과 관리가 있는 세속 차원의 세계관이 반영되었다.
흔히 하늘의 최고신을 옥황(玉皇)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도교의 세계관을 답습한 것이다.
우리 고유의 세계관은 하늘 자체가 신앙의 대상으로서 경천 사상(敬天思想)을 이룬다. 특정 대상으로 형상화하지도 않았고, 또 특별한 명칭도 없다. 그냥 '하느님'이거나 '하늘이시여!'라고 우러러 불릴 뿐이다.
모든 명칭과 직위의 신들은 하늘의 일부분 또는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우리의 하늘관 또는 세계관이다. 예부터 5월 파종 때와 10월 추수 후에 제천 의식(祭天儀式)을 행한 것은 하늘 자체에 대한 의식이다.
제천은 농경 민족의 풍요에 대한 소망을 천신에게 호소하고 기원한 것이라기보다 하늘이라는 우주 자체에 대한 제의로 보인다.
풍습에서의 하느님
우리 민족의 세계관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사회의 모든 사건을 하늘의 뜻을 인간이 받들어 실천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국가 통치자는 하늘이 보낸 하늘, 즉 우주 섭리의 대행자로서의 천자(天子)로 불리며, 또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 땅에 왔음을 만인에게 증명하게 된다. 박혁거세나 김알지, 김수로 왕 등의 출생 신화는 모두 하늘에서 왔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비상한 자연 현상이나 꿈, 특이한 사건 등은 모두 하늘의 뜻이 현현(顯現)한 것으로 해석된다. 풍요를 위한 의식이나 전쟁, 질병, 가뭄과 홍수, 흉년 등의 천재 지변에 대해서도 왕은 하늘의 뜻을 구하기 위해 특별한 의식을 행했다. 혁명의 원리도 하늘의 뜻이 새로운 지도자에게 이전되었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부계 사회에서의 가부장의 권위는 종종 하늘에 비견되었다. 그리하여 상주는 아버지가 죽으면 하늘을 의미하는 둥근 막대기를 상장으로 짚고, 어머니가 죽으면 땅을 의미하는 네모난 지팡이를 짚는다.
제천의 대상은 하느님이고, 그 제천 의식을 행하는 단(壇)은 원구(圓丘)이다. 원구의 엄격한 의미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이지만, 천제(天帝)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왕이 제주가 됨으로써 왕권과 하늘을 결부시키는 정치적인 상징 의례이다.
하늘에 대한 우리의 고유 신앙은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과 같은 제천 의식과 삼한의 솟대 등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이것이 조선 시대에는 유교 의식의 형태로 변하였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하느님
유교에서는 하느님을 천제(天帝) 또는 상제(上帝)로 일컫는다. 권근(權近)은 '하늘(天)'을 절대성의 이치와 영속성의 운행을 의미하는 '일(一)'과 극대성이라는 실체와 창조의 무한성을 의미하는 '대(大)'의 두 요소로 이뤄졌다고 하였다.
또, 하늘과 인간 사이의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의 일치를 중심으로 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구조를 도상화하기도 하였다. 정약용도 하늘은 상제가 계시는 장소이며 신으로 하강하여 인간을 감시하니 두려워해야 할 신앙적 대상이라 하였다.
유교의 전통에는 천제나 상제에게 제사하는 신앙 의례로 교사가 있다. 삼국 시대 이래 우리 민족은 하늘에 제사 지냈는데, 고려 때부터 천지(天地)를 제사 지내던 제천 제당인 원구단은 지금도 서울 중구 명동에 남아 있다.
단군신화에서 일연은 환인을 제석천(帝釋天)으로 보았다. 이것은 고대의 하느님 개념이 불교의 천신(天神) 개념과 일치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고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가 하늘 위로 오르는 33천(天)을 상징한다면, 범영루는 수미산을 상징하여 천상의 세계로서 제석천이 사는 곳이 된다.
도교에서는 하늘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신의 존재로서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를 신봉해 왔다. 옥황상제는 인격신적인 성격이 강하여 그림이나 소상(塑像)으로 전해 오고 있다.
동학(東學)은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신앙인 하늘님(하느님)을 최고의 신으로 모신다. 창시자인 최제우는 "하늘님을 네 마음에 모시라(侍天主)"고 했고,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사람 섬기기를 하늘님 섬기듯이 하라(事人如天)"고 하였다. 제3대 교주 손병희는 "사람이 곧 하늘님이다(人乃天)" 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동학이 초월적 주재자인 하늘님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내재화하고, 인간 속에서 하늘님을 발견하는 인간 존중의 사상으로까지 전개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서양에서의 하느님
고대의 철인들은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절대자, 완전한 자, 유일자 등의 뜻으로 테오스(그리스어 theos)와 데우스(라틴어 deus)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이 훨씬 전부터 섬긴 유일신인 야훼(여호와), 아도나이 또는 엘로힘을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사용한 이래, 철학과 종교에서 확정된 명칭이다. 중세에 앵글로 색슨 족을 비롯한 게르만 족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일 때, 토속어인 '고드(God, Gott)'를 데우스의 번역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이 단어가 크리스트교의 유일신을 뜻하게 되었다.(19세기 말에 크리스트교에서는 우리말로 '하나님(하느님)'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일본은 '신'으로 옮겼으며, 우리도 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철학에서의 하느님(흔히 '신'으로 번역하는 존재)은 인간이 이상으로 삼는 모든 가치의 절대적 구현자로서, 추상적 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쟁 대상이 된다.
그러나 종교에서의 하느님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소유하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되, 그 삶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앙과 불신, 또는 의심의 대상이다. 논리가 아닌 개인적 또는 공동체의 체험에 의해 그 존재가 확신될 뿐이다.
유대교나 크리스트교의 전통상 하느님은 그림이나 조각으로 형상화 될 수 없다. 모세 시대부터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의 하느님은 주로 '말씀'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다. 이 점은 이집트나 그리스, 중동 지역, 크리스트교 이전의 유럽 제 민족이 남긴 신기한 모습의 신상(神像)들과 비추어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블레이크의 그림에서 보듯이, 환상적 시인이나 화가의 그림에서 하느님은 흰 옷을 걸친 건장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韓國文化象徵辭典 참조)
......인간 능력의 한계외적 절대자로 인식되어 온 하늘은 畏敬心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적으로는 神格視되었고 도덕적으로는 理法이나 君王을 표상하며 형체적으로는 無限, 光明, 風雨를 상징하고 있다.
흔히 우리들은 여러 경우의 인간살이에 처하면서, '하늘도 무심하지', '하늘이 알고 있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하늘이 무너졌다', '至誠이면 感天이다'하는 말들을 관용적으로 써 오고 있다.
이런 慣用句의 含意에 내재한 한국인의 하늘 의식은 우주를 창조한 초월적 존재, 신들이 거처하는 신성한 공간, 오곡 생산을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 왕권을 부여하는 권능의 소유자, 도덕성의 감시자 및 비판자, 禍福의 主宰者, 민심의 所在, 밝음의 표상 등이다. ...... (김재환, "韓國敍事文學의 天思想", 인문연구논집3 <天과 人間>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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