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決訟
이야기 줄거리
옛날 경상도 땅에 일년 추수가 만석이 넘는 큰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일가 친척이기도 한 패악무도한 자가 찾아 와서는 같은 자손으로 혼자만 잘 사는 것을 비난하며, 만일 재산의 반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살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을 한다. 동리 사람들은 그의 몹쓸 심사를 익히 아는지라, 관가, 감영에 소송을 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부자에게 권한다. 부자는 이를 옳게 여겨 그를 데리고 함께 서울로 올라 와 형조에 위와 같은 사연을 올린다. 그러나 관원은 일후 재판 시에 처결하리라 한다.
부자는 자신의 옳음을 믿고 요령 없이 전혀 아무도 찾아보지 않고 있는 반면에, 그 무거불칙(無據不測)한 자는 여러 수단을 써서 자기에게 판국이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형조에 손을 써 두었다.
이에 재판 날을 당하여 부자는 봉욕(逢辱)과 함께 패악무도한 친척에게 그가 달라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라는 판결을 받는다.
억울하게 패소를 당한 부자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짐짓 한마디 이야기를 꾸며 들려 주겠다고 하며 이번 송사의 일을 짐승들의 일에 가탁하여 자기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한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뻐꾸기, 꾀꼬리, 따오기가 서로 우는 소리가 좋다고 다투었으나 결판을 내리지 못하다가 송사(訟事)를 하기로 하였다. 황장군이란 별명을 가진 황새를 찾아 판결을 받도록 합의했는데, 질 것이 뻔한 따오기가 황새에게 청을 넣기로 하고 개구리, 우렁이, 두꺼비, 올챙이 등속을 잡아 가지고 황새를 찾아갔다. 뇌물을 살펴본 황새는 반색을 하면서, '네 밤중에 왔으니 무슨 긴급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내게 이르면 무슨 일이라도 어루만져 무사하게 해 준다' 고 하였다. 이에 따오기는 찾아 온 내력을 털어 놓았고, 황새는 반승락을 했다. 이튿날 재판이 벌어져 황새는 대청에 앉고 무수한 날짐승들이 좌우에 열립한 가운데 가각 소리를 내어 보도록 분부하였다. 먼저 꾀꼬리가 고운 소리로 울면서 제 자랑을 늘어 놓으니, 비록 소리는 아름다우나 애잔하여 쓸데 없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뻐꾸기가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묘하게 내면서 제 자랑을 했지만 황새는 역시 '네 소리는 비록 쇄락(灑落)하나 궁수(窮愁)하니 전정을 생각하면 불쌍하다' 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따오기가 고개를 나즉이 하고 '소인의 소리는 다만 따옥성 뿐이옵고 달리 풀어 고할 일 없사오니 사또 처분만 바란다' 고 하였다. 미리 뇌물을 먹은 황새는 무릎을 탕탕 치며, '네 소리가 가장 웅장하다. 짐짓 대장부의 기상이로다' 하고 따옥성을 상성으로 처결하여 주었다."
이야기를 끝낸 부자의 말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그런 짐승이라도 뇌물을 먹은 즉 집의오결(執義誤決)하여 그 꾀꼬리와 뻐꾹새에게 못할 노릇 하였으니 어찌 앙급자손(殃及子孫) 아니 하오리까. 이러므로 짐승들도 물욕에 잠겨 틀린 노릇을 잘하기로 그 놈을 개아들 쇠자식이라 하고 우셨으니, 이제 서울 법관도 여차하오니 소인의 일은 벌써 판(判)이 났으매 부질없는 말하여 쓸데 없으니 이제 물러가나이다. 하니 형조 관원들이 대답할 말이 없어 크게 부끄러워 하더란다는 이야기다.
評說
재산을 노리는 친척에게 괴로움을 당하다 못견딘 어떤 부자가 관청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뇌물을 받은 관원은 부자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으므로 억울하게 패소한 부자가 소송 사건을 소재로 한 동물우화를 들려주어 관원을 낯부끄럽게 했다는 줄거리로 짜여진 이 작품은 빈부로 대립되는 하층민끼리 벌리는 송사(訟事)를 다룬 동물우화소설로 조류(鳥類)의 의인화를 통하여 부자와 불량배의 성격을 대조시키는데 성공한 단편이며 '뻐꾸기와 따오기의 목청자랑'이라는 민담 성격의 동물우화를 화중화(話中話)로 끌어들인 액자소설(額字小說, Rehmennovelle)이다.
이 작품에서 모두(冒頭)의 도입액자는 부자의 패소라는 사건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패소가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라면 내부소설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할 재판이 뇌물 거래로 흐려졌지만 부자에게는 재판 그 자체를 부인할 힘도 없었던 것이다. 부당한 패소에 항거하는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동물우화를 빌린 내부소설이다. 이 내부소설은 도입액자에서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내린 판관에게 확실한 방법으로 도덕적 징계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황새결송>은 길이가 좀 길고 개성적인 창조가 강하여 구체적인 특성을 지녔을 뿐 설화의 형식을 근근히 벗어난 작품으로 직업적인 이야기꾼[傳奇수, story-teller]이, 전승 유포된 구비 설화에 자신의 창작을 가미하여 긴 이야기로 발전시키고 세련된 문장체로 개작하였음을 짐작케 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이 쓰여졌던 당시의 조선사회, 송사의 부패된 양상과 한국 씨족사회의 병폐를 파혜쳤다는 의미에서 사회소설의 성격을 띤 우화적 풍자소설로서 고소설 작품의 한 걸작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
(金在煥 著. 寓話小說의 世界. 도서출판 박이정. 1999.12.15.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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