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줄거리
이[蝨]는 빈대나 벼룩, 파리와는 유(類)가 다르다고 뻐긴다. 전생의 인연도 있지만 태생부터가 특출하다는 것이다.
벼룩이란 작자는 미친개의 사타구니에서 태어나 주제넘게 문턱을 넘어 식모방에 들어와서 판을 치다가 요새 와서는 대감님 방까지 침범해 들어왔으니 아니꼽다는 것이고, 빈대란 놈도 온돌방 장판지가 찢어진 지저분한 틈바구니에서 나온 똥같이 너저분한 것이, 밝을 때는 숨어 있다가 어둡기만 하면 허깨비같이 나타나는 비겁한 놈이란 것이다.
이[蝨] 자기로 말하자면 우선 출생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동물치고는 영장(靈長)이라고 뻐기는 인간, 그 중에서도 백계 러시아 여인의 국부(局部) 음모(淫毛) 기슭에서 태어나 인간의 파종 과정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사도(斯道)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였고, 여러 인간군상을 샅샅이 들여다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蝨]가 오랜 세월을 두고 겪은 풍파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이루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중공군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는 바람에 백녀(白女)인 모체와 더불어 홍콩에 도착하고부터는 쿠리들의 등살에 못견뎌 백녀(白女)를 떠날 결심을 하고 쿠리의 옷갈피에 숨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여러번 위기를 맞이했는데 간신히 술취한 작자의 목덜미로 피신하게 되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으로 날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 몸으로 옮겨 다니며 문란한 성의 풍속도를 목도하고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김대감 댁에 기식하게 되었는데, 불쌍한 식모의 살은 적게 뜯어 먹고 김대감 댁 애새끼들을 뜯어 먹으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죽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손님 접대로 커피를 끓여 내가는 식모의 소맷자락에 붙어 나갔다가 커피잔을 내려 놓는 상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뭐냐는 대감의 벼락같은 호통에 식모가 자기(이,蝨)를 덥썩 잡았고 그바람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습게 보았던 손님으로 왔던 관상쟁이가 대감에게, 복록(福祿)이 무진하고 만사형통할 길조(吉兆)이니 소중히 기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蝨]는 대감이 거처하는 방 벽장 구석의 특별한 함(檻)에서 부드러운 솜자리와 무진장의 먹을 것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이 방에서 엮어지는 역사는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고, 빈대와 벼룩이 못나게 굴어서 일대 풍파가 일기도 했다는 것이다.
評說
<풍파>는 이[蝨]의 눈에 비친 인간추(人間醜)의 파노라마이다. 차원높은 관념의 문제를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저속하고 야비한 인간사를 그리려고 하였다.
고등한 인간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기엔 낯간지러운 매음, 간통, 춤바람, 허풍, 권세가의 오만이, 추한 미물로 대변되는 이[蝨]의 눈을 통하여 샅샅이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동물우화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따른다.
동물이 전적으로 의인화 되어 인간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시점으로 인간 그 자체의 작태를 그리고 있는 것이니 김성한의 다른 작품 <개구리>나 <衆生>과는 우화소설의 조건 면에서 거리가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동물의인 내지는 동물상징의 매력을 문학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우화의 수법을 적용한 소설로 값을 쳐 줄 만하다.
흔히 김성한은 비속한 존재를 통해 차원 높은 관념의 문제를 제시하려다 보니까 작자 자신도 모르게 내용이 지저분하게 되고 작품이 지향하는 의미의 차원도 수준 이하로 떨어뜨린다고 평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衆生>이나 <개구리>에서도 그랬지만 <風波>에서는 더욱 비속하고 유치한 언어, 저속한 어투를 남발하여 자칫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상실하고 마는 경향으로 치우치는 느낌마저 던져 준다.
그러나 김성한의 이와같은 비속하고 유치한 언어나 쌍소리의 사용은 동물우화소설인 한에서는 불쾌감을 던져주기보다는 통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인간의 비속성을 우유화(寓喩化)하는 방편이기도 하며 해학과 풍자의 효과까지 가미되어 현실 문제를 고발하는 데는 제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대의 동물우화소설에 있어서도 비속어(卑俗語)의 사용은 보편적이었다.
김성한의 작품 세계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그가 풍자작가라는 점에 있다. 그는 풍자의 촛점을 인간악(人間惡)에 맞추어 인간의 속악성(俗惡性), 사회적 가면, 속물적 근성, 이중적 인격, 위선, 허세 등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우화 형식을 취한 김성한의 작품 중 <風波>가 시사하는 바는 이[蝨]라는 미물(微物)이 일정한 세월을 두고 겪는 풍파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상해 공동조계에서 매소부(賣笑婦)의 사타구니에 기식하면서 일본군 대장의 벌거벗은 모습, 순검의 때가 덕실덕실한 볼기짝, 똥내 나는 쿠리[苦力]의 엉덩이에 이르기까지 인간군상을 샅샅이 들여다 보면서 살았고, 걸핏하면 남을 해치려는 한국사람, 이빨로 깨물어서 피를 빨아먹는 중국사람도 겪었다.
한국으로 귀환해서는 무역회사 서기의 방탕, 여자 대학생의 부정(不貞)을 목격하고, 춤바람 식량난도 겪었다.
권세의 힘으로 적산(敵産)을 차지하고 귀속 재산을 빼앗고, 대부나 승진이 야밤중에 방구석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을 이[蝨]의 눈으로 그려내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을 겪으며, 상해에서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귀환해 혼란한 시대에 처하게 되는 이[蝨]가 더듬어 온 가시밭길은 세계사가 더듬은 길과 일치한다.
<衆生>이나 <風波>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이, 빈대, 벼룩, 파리 등 흔히 <蒼蠅賦> 같은 데서 풍자되던 것들이다.
이렇게 사람이나 해치고 쓰잘데 없는 비속한 존재들을 내세움으로써 시류(時流)에 편승하여 부침(浮沈)하는 인간군상(人間群像)들의 최소한의 인격적인 품위마저 떨어뜨리고 인간사회의 혼란과 무질서, 부도덕성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생>과 <풍파>는 사건의 전개나 서술 시점이 상이하지만, 다같이 인체에 기생하는 이, 빈대, 벼룩을 의인화하여 혼돈의 시대에 부조리하게 자생한 권력자의 무상을 풍자하고 오만과 허세, 인간추(人間醜)가 횡행하는 시대상을 폭로하려 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1957년 <신태양>에 '달팽이', <문학예술>에 '귀환', <새벽>에 '방황'을 발표하던 무렵에 중앙일보 지면을 빌어 연재된 '풍파'는 그의 단편소설 원숙기의 작품에 해당한다.
소극적이며 순응적인 인간상을 배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의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간형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던 김성한은 현실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화의 풍유나 우화의 형식을 빌려 작품을 썼던 것인데, <풍파>에서는 인간의 비속성을 알레고리화하기 위하여 하잘것 없는 이[蝨]라는 비속한 존재의 눈에 비쳐진 인간추(人間醜)를 여과없이 원색적으로 그려내어 왜곡된 사회 현상을 고발했던 것이다. (김재환 저. <우화소설의 세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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