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관계
인류 가운데 백분의 구십은 부부 관계요, 백분의 백은 사람의 자식이다. 결혼과 가정은 확실히 인류의 생활 가운데 가장 친밀한 부분이다.
우리도 생물이다. 출생이라든가, 모유를 먹는다든가, 결혼을 하고 생식을 하는 등의 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모든 남자는 여자로부터 태어났고, 모든 남자(소수를 제외한)는 한 아내와 일생을 동거하면서 어린아이의 아비가 된다. 모든 여자도 또한 부인에게서 태어났고 모든 부인(소수를 제외한)도 한 남자와 일생을 동거하면서 아이를 낳는다. 그 중에 몇 명은 부모가 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은 꽃이나 나무가 종자를 번식시키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모를 거절하고 태어날 수는 없다. 꽃이나 나무가 종자 없이 생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가운데 가장 긍정해야 할 것이 바로 남자, 여자, 어린아이 이 삼자 사이의 상호 관계라는 사실이다. 생명철학도 이 필수적인 상호 관계를 토론하는 것을 빼면 철학이라 할 수도 없거니와 또 철학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단지 남녀 사이의 관계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한 감이 있다. 이 관계는 반드시 어린 영아로부터 출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떤 시대의 문명이고 간에 남녀가 아이를 낳는 권리를 박탈할 이유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재 나는 우리의 목전에 정말 어려운 일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남녀가 결혼을 회피하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비록 결혼은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남녀가 자녀를 낳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 커다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이 신체 관계라면 그들의 신체는 이미 퇴화했거나 아니면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것이 결혼의 정도가 지나치게 높아서라면, 이 지나치게 높은 결혼의 정도는 불합리한 점이 있다. 만약에 그릇된 개인주의의 철학을 위해서라면 그 개인주의의 철학은 반드시 잘못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그것이 모든 사회조직을 위해서라면, 이 모든 사회조직도 또한 잘못된 것이다. 21세기가 되어 우리의 생활과학이 보다 더 진보해서 우리들이 생물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마 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20세기가 생물학의 세기가 될 것임을 믿는다. 이것은 마치 19세기가 자연과학의 세기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더욱 자신을 잘 이해하게 되고, 또 조물주가 부여한 천성에 대해 투쟁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간단한 지혜를 더욱 중시하게 될 것이다. 스위스의 한 심리학자는 돈 많은 환자에게 시골로 가서 닭과 오리를 치고 어린아이를 키우고, 배추와 무우를 가꿀 것을 권고했는데, 우리는 이러한 생물학과 의학의 지혜가 생장하고 있는 조짐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돈 많은 여자 환자는 그가 저지른 병폐가 바로 생물적인 본능을 따라 발휘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본능의 발휘 정도가 지나치게 낮은 것이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어떻게 여자와 함께 공동의 생활을 할 것인가를 배워 본 일은 없다. 가장 이상한 일은, 바로 사실은 이런데도 한 사람도 완전히 여성을 떠나서 생활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만약 그가 결코 어머니 없이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는 여자를 경멸할 리가 없다.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변에는 하루도 여자가- 어머니, 아내, 또는 딸 등등 -없는 날이없다. 그가 만약 결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인 워즈워드가 그의 누이에게 의탁하여 생활했고, 또 시인 스펜스가 그의 가정부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과 같은 일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그가 어머니나 누이와 상당한 연관을 맺을 수 없었다면 그 어떤 철학도 그의 영혼을 구제 못했을 것이다. 가령 그가 하다못해 가정부와 상당한 연관을 맺지 못했다면 그는 사람이라 칠 수 없다. 여자와 상당한 연관을 맺지 못하고 도덕의 갈림길로 걸어가는 모든 사람, 예를 들면 오스카 와일드 같은 사람은 정말 어딘가 불쌍한 데가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남자들이 여인과 공동의 생활을 하는 것을 매우 어렵다고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또 남자는 여자 없이 생활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렇게 보면 <리그 베다>의 저자로부터 20세기의 와일드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비록 4천여 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인류의 지혜는 조금도 진보한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인도의 저자는 와일드와 같은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말한 것을 본다면 하느님이 여자를 만들 때, 꽃의 아름다움과 새의 노래 소리, 무지개의 색채, 바람의 부드러움, 이리의 웃는 얼굴, 양의 온유(溫柔), 여우의 교활, 구름처럼 잡기 어려운 점과 비처럼 변덕스러운 것 들을 뽑아 이것들을 섞어 여자를 만든 다음 이를 남자에게 보내 아내로 삼게 했다. 인도의 아담은 너무나 즐거웠다. 그들 두 사람은 이 아름다운 속에서 마음대로 떠돌아 다녔다. 며칠이 지난 후, 아담은 하느님 앞으로 달려갔다. "이 여자를 데려가 주십시오. 저는 정말 그녀와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청을 듣고 이브를 데려갔다. 그런데 아담은 외로운 생각이 들어 옛날과 같이 즐거울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하느님 앞에 달려갔다. " 그 여인을 제게 돌려주십시오. 저는 그 여자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그의 말에 따라 이브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또 하느님에게 달려가 부탁했다. "당신이 창조한 이 이브를 도로 데려가 주십시오. 맹세컨대 이 여자와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지혜 가운데 순순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네번째로 아담이 찾아와 그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하소연을 하자, 하느님은 그의 요구를 다시 들어주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마음을 변치 말고, 쓰건 달건 그 여자와 영원히 함께 살며, 두 사람의 지혜를 합쳐 이 세상을 살도록 하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이 한 폭의 그림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별로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林語堂의 吾見吾聞 중 男女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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