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껄선생'이란 말은, 조선 후기 실학의 학자이자 문인이며 지방 수령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별칭이다.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 중에 있는 '答大邱判官李侯端亨論賑政書' 말미에, "이제 나는 즐거울 '樂' 한 자를 쓰니 무수한 웃음 '笑' 자가 뒤따릅니다. 이것을 미루어 나갈 것 같으면, 백세라도 동거할 수 있을 것이오. 이 편지를 개봉해 보는 날에 그대도 반드시 입 안에 머금은 밥알을 내뿜을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니, 나를 '笑笑先生'이라 불러 준대도 역시 마다하지 않겠소" 에서, '笑笑先生'이라 한 것을 북한의 국어학자 홍기문이 연암집을 번역하면서 '껄껄선생'이라 번역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이 연암의 별칭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북한의 문예출판사에서 1991년에 펴낸 <박지원 작품집 1>을 남한의 보리출판사가 <겨레고전문학선집 4>에 <나는 껄껄선생이라오> 라는 책명으로 펴냄으로써이다. 번역자 홍기문의 뜻을 존중한다는 원칙에서 그대로 옮긴 말이다.
공리공론과 현학을 일삼는 유학자들을 우언 풍자소설로써 풍자하고, 허례허식의 폐풍을 공격하였으며 위정자들의 무능과 위선을 통박하기도 하고, 실학을 통해 사회개혁의 의지를 이론화하고 시속에 알맞은 문장으로 작품화한 풍자적 실학문학파인 연암이 스스로 수용한 '껄껄선생(笑笑先生)'이란 별칭은 어쩌면 연암의 사상적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칭호일 것이다.
연암의 풍자는 음담패설의 단순한 해학이 아니라, 기지(機智)에 찬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풍자이며 우매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질타하며 껄껄 웃을 수 있는 풍자이다. 그래서 박지원의 별칭을 '껄껄선생'이라 한 것은 그의 호 연암(燕巖)보다 한층더 멋스럽다.
고전문학을 전공하면서 실학파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연암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과정에서 그가 안의 현감으로 재직한 사실을 발견하고, 안의가 고향인 나는 그가 안의라는 향토의 기질에 걸맞다 싶어 쾌재를 발한 적이 있다.
연암 박지원은 1791년 겨울부터 1796년 봄까지 만 4년여에 걸쳐 안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많은 치적과 글을 남겼다.
56세 때인 1792년에는 안음현 이웃의 함양군 둑 공사에 장정들을 징발할 때, 관아에서 식량을 대고 고을별로 장정을 나누게 해서 대엿새 걸리던 일을 하루 만에 끝내게 해 그 뒤 5년 동안 둑 공사 부역으로 힘든 일을 없앴으며, 안의 현감으로 있는 동안, 현풍 사람 유복재를 죽인 범인에 대해 논한 글과, 밀양 사람 김귀삼 살인 사건을 논한 글과, 함양 사람 장수원의 살인 사건을 논한 글과, 밀양 사람 윤양준의 살인 사건, 함양 사람 조판열의 죽음을 논한 글 등을 썼다.
삼종질 박종악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취임을 축하하면서 '천하 사람의 근심을 앞질러 근심하시오'를 썼고, 벗 김이소가 임명되자, '화폐가 흔한가 귀한가'를 써서 축하했다. 이 편지에는 화폐 유통을 바로잡고 은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에 대한 의견을 썼다.
그 이듬해인 1793년에 이르러서는 <열하일기>로 그릇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고, 답남직각공철서(答南直閣公轍書)를 썼다. 임금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이덕무가 53세로 죽자, 정조가 이덕무의 행장을 짓도록 하여 형암행장(炯菴行狀)을 썼다.
흉년이 들자 자기 녹봉을 덜어 백성을 구했으며, 공진 설치를 거절하는 답순사론진정서(答巡使論賑政書)와 다른 고을 수령들과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길에 대해 의논한 '굶주린 백성이 살 길(答丹城縣監李侯論賑政書)'을 썼고, '나는 껄껄선생이라오(答大邱判官李侯論賑政書)'도 이 때 썼다.
연경을 갔을 때 보고 온 벽돌을 구워 관아(안음현 관아)에 새로 정각들을 지었는데, 백척오동각기(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孔雀館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등을 쓴 것도 안의 현감 시절이다.
고을 아전들이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순사(殉死)한 현감 곽준의 제사를 지내는 일을 칭찬한 안의현현사사곽후기(安義縣縣司祀郭侯記)를 썼는데, 이미 곽준은 고향인 현풍에 예원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고 안의현에는 황암사(黃巖祠)로 사액 되었으니 두 고을이 모두 제사를 올려 받들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제사를 받들게 된 본말을 써서 벽에 간수하였음을 밝혀 적은 것이다.
거창읍 이술원에게 정려가 내린 일을 기록한 글(忠臣贈大司憲李公述原旌閭陰記)과, 지나친 수절 풍습을 비판한 <열녀함양박씨전>을 쓴 것도 이 때이다.
연암이 58세가 되던 1794년에 접어들어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원래대로 채워, 창고에 곡식을 10만 휘(스무 말 혹은 열 다섯 말. 斛)나 쌓아두게 되었는데, 호조판서가 그것을 팔 것을 제안하나 수입이 생길 것을 꺼려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겨 버렸다 한다.
함양군수의 부탁으로, 천년 전의 최치원을 기려 학사루를 수축한 전말을 기록한 함양군 학사루기(學士樓記)를 썼고, 함양군에 새로 지은 학교 흥학재에 부치는 흥학재기(興學齋記)도 이 무렵에 썼다.
1795년, 전라감사 이서구가 천주교를 비호한다고 유배를 가자, 답이감사적중서(答李監司謫中書)를 보내 위로했고,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와 장편시 '해인사(海印寺)'를 썼다.
연암의 나이 60세가 되던 1796년 봄, 안의 현감의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갔는데 안의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자기 뜻을 몰라서 하는 일이라며 크게 꾸짖고, 세우지 못하게 했다 한다. 인근 함양군수로 있었던 조병갑의 송덕비가 지금까지 남아 이 지방 유명공원에 의젓이 자리잡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예나 이제나 지방수령들이 남기고 간 선정비나 송덕비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된다.
연암의 화려한 행적 중 안의현감 시절의 행적만을 정리하여 보았는데, 연암의 묘소가 임진강 북녘 연암협(燕巖峽)에 있고 그 밖의 유적이 아무 데도 없는 현실에서 안의현감 재직시 치적과 작문이 눈에 띄어 이 고장이 나의 태향(胎鄕)인 처지에서 새겨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이다.
아무튼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에 선정(善政)에 힘쓰는 한편으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주옥 같은 작품들을 지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이 중에서 음양오행설을 비판한 <洪範羽翼序>, 과부의 순절 풍속을 문제삼은 <열녀함양박씨전>, 장편 한시 <해인사> 등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그런데 이 무렵에 그는 뜻밖에 <열하일기>로 인해 곤경을 겪기도 했다.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통 고문에서 벗어난 점을 질책하면서 속죄하는 글을 지어 바치라는 정조의 어명이 내려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년 뒤에는 <열하일기>가 오랑캐인 청나라의 연호를 쓴 글이라는 비방 여론이 일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암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5세까지 공부를 못하고 있다가 16세에 이씨와 결혼했다. 처숙(妻叔)인 이군문(李君文)이 준 <信陵君傳>을 숙독, 발분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통하고 천문지리와 병농전곡(兵農錢穀)의 경세요무까지 정독하게 되었으며, 그 절륜한 정력과 재능으로 19세에는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다.
홍대용과 서구의 지구자전공전설(地球自轉公轉說)을 주장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었으며, 당대 북학의 거두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세칭 실학의 사가(四家)와 지우지간(知友之間)으로, 선진적인 외국문화의 섭취를 주장하는 북학파의 1인이 되었으며, 정약용 등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인 실학의 연구에 힘썼다.
44세 때 이명원(李明源)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그 곳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기 <열하일기>를 내놓아 당시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50 세가 넘어 처음으로 벼슬하였으니,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한성부 판관, 안의 현감 등을 거쳐 면천 군수가 되어 정조가 구하는 <과농소초(課農小抄)>라는 농서(農書)를 써서 토지 소유의 제한과 농정 개혁을 강조, 크게 신임을 얻었으나, 그가 영양 군수로 있을 때 정조가 죽고 연암도 그 후 5년 만에 세상을 마쳤다.
연암의 업적 가운데 무엇보다도 괄목할 만한 일은, <호질>, <허생전>,<양반전>을 비롯한 12편의 한문소설일 것이다. 독특한 해학으로써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고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을 보여 준 일이야말로 국문학사상의 획기적 성과라 할 수 있다.
연암에 관심하여 연암이 문필로 남긴 족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더니, <열하일기>를 별도로 하고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의 저술의 특이점은 논설을 중심한 문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시는 각 체를 합하여 42 수가 전부라는 통계이다.
연암의 문집은 선집 또는 전집의 형태로 활자본과 필사본을 모두 합쳐 십수 종이 전하고 있지만 가장 정통적이고, 대중적으로도 널리 보급된 것은 1932년, 활자본으로 간행된 6책 19권의 박영철(朴榮喆)이 간(刊)한 <燕巖集>일 것이다. 이것은 후손가(後孫家)의 필사본을 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신뢰를 할 수 있을 뿐더러 작품을 가장 광범하게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찍부터 이것의 영인본을 구입하여 소설 관련 부분을 연구할 때 참고하곤 했는데, 시속의 말을 문장화했다곤 해도 한문 문장이란 소화를 하기가 힘이 들어 마땅한 국역본이 없나 하던 차에 근래에 와서 출판사 '돌벼개'에서 박영철의 <연암집>에 수록된 연암의 산문 237편과 한시 42수를 처음으로 완역한 책이 나와 독서하게 된 것이다.
어느 직장보다도 정년이 길게 보장된 직장을 나와 백수로 떠돈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지만, 제 버릇 개 못 주고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듯이 어쩌다 교보문고나 반디 앤 루니스 같은 매머드서점 근처를 지나는 일이 있을라치면 그냥 지나치기가 서운하여 자연히 한 번 들르게 되고, 책을 열람하다가 보면 작정도 없는 책을 사게 되어 내자로부터 핀잔을 듣기가 일쑤다. 그런 일련의 행각 중에 내 손에 들어온 책 하나가 <나는 껄껄선생이라오>라는 책 한 권이다.
이 책은 북한의 문예출판사에서 1991년에 펴낸 박지원 작품집이기 때문에 박영철의 연암집에도 모두 수록되어 있는 글들의 모음이라,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에 관심한 것은, 번역을 한 사람이 벽초 홍명희의 아들로 1947년에 북으로 가 김일성대학 교수와 사회과학원 원장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던 사람이란 점에서의 호기심도 있었지만, 같은 작품을 남과 북이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느냐 하는 관심 때문이다.
아무래도 북한의 것은 원본의 내용에 충실하기보다 쉽게 전달되도록 하려는 노력을 앞세우다 보니 부실한 점도 있지만 흔히 쓰는 입말들을 잘 구사하여 친근감이 드는 글로 재탄생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값을 쳐 줄만도 하였다. 그 단적인 예라고 할 만한 것이 '소소선생(笑笑先生)'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껄껄선생'이라 번역한 것이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연암의 행적이나 문적이 파다한 데도 불구하고 정작 4년여를 현감으로 있었던 우리네 고장의 기록물이나 유적에서는 이렇다 할 흔적을 남겨 둔 것이 없어 유감이다. 그 흔한 선정비(善政碑) 하나 남기기를 극구 사양했던 연암은, 공명심에 들떠 허명이나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20 수년 전에 관련 학계에서 연암의 연고를 찾아 옛날 연암이 현감으로 있던 현청 자리가 되는 안의초등학교 뜰에 사적비 하나를 세워 둔 것은, 안의현감으로서 선정을 베풀고 문필활동을 했던 연암을 재조명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지금도 이 향토에는 역대로 지방 아전이나 이방을 지낸 후손들도 있어 200년 전 지방 수령과 관련된 자료를 더듬어 챙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정년을 한 두 해 앞둔 어느 해 학술조사라는 명목으로 내가 봉직하던 대학의 학생들을 데리고 답사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다만 안음현 이방의 후손 종가집 종손을 통해 연암이 벽돌을 구웠다는 곳의 대강의 위치를 전해 듣고, 安義縣題名記를 비롯한 芝溪先生稿의 寄燕巖 2수의 시문과 咸陽學士樓記, 與燕巖書, 祭燕巖文, 郭將軍遺墟記 등을 수록한, 책명이 불분명한 필사본 문집 하나를 접할 수 있었다. ...<중략>...
이 문집 가운데서 '연암에 준 글(與燕巖書)'과 '연암을 제사한 글(祭燕巖書)'은 연암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글이어서 복사하여 자료로 가지고 있다. 특히 '與燕巖書'는 <열하일기>의 문체 문제로 연암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글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지방자치를 표방하고 여러가지 문화행사를 벌이기도 하고, 향토의 역사유적이나 선현들의 치적을 선양하여 자랑하고, 또 관광 상품화하려는 노력들이 파다한 현실이다.
내가 자란 고향과 관련하여 두고 보더라도 황석산성 싸움이 어떠했으니까 이를 새로 써야 한다느니, 문화축제의 이름이 낡았으니 어떻게 바꾸어야겠다느니 하고 알맹이 없는 허상을 쫓고 있음을 상기할 때 공연한 울분이 앞선다. 무지에서 비롯된 역사적 사실의 오도도 문제겠지만 그것의 불순한 동기가 배신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중략>...
안의 현감을 지냈던 연암이 연경을 다녀 오면서 중국의 물레방아를 보고 와서, 현감 시절 물레방아 기술을 우리 나라에 보급하는 선진 정책을 베풀었으니 함양은 물레방아 고을이라는 논리를 펴는 모양이지만, 연암의 열하일기나 실학사상을 편 그의 글 어디에도 벽돌을 구워 관아에 여러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은 있어도 물레방아를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다.
연암이 안의현 현사에서 곽후를 제사한 기록(安義縣縣司祀郭侯記)은 황석산성 싸움에서 순국한 선현을 추모하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전략...사옥(司屋)이 겨우 두 칸 뿐이라 비좁아서 곽후를 모시는 묘당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 금년 봄 조정의 명을 받들어 고을의 성황당을 여단의 오른 쪽에 신축하였는데, 이 고을의 백성과 서리들이 그 남은 재목을 요청하여 사옥을 보수하면서 옛 규모보다 조금 넓히고 단청을 덧칠하였다. 나는 고을의 서리들이 곽 후에 대하여 세월이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소홀히 대하지 아니하여 예의가 엄하고 또 정성스러우며, 현사(縣司)에서 제사를 받들면서도 잘못된 인습을 따르지 아니하여 그 칭호와 명분이 분명하며, 나라 안에 소문이 나게 하고, 이웃 고을에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한 점을 가상하게 여기는 바다. 다만 해가 오래됨에 따라 사모함이 갈수록 약해지게 되면 예의가 혹 전날만 못할 수 있고, 명호(名號)가 습속으로 인하여 어긋나기가 쉬워서 사람들이 이 사당이 현사에 있음을 보고 의심을 둘까 걱정스럽다. 그래서 후(侯)의 휘(諱) 준과 자(字) 양정(養靜) 및 그 제사를 받들게 된 본말을 써서 사당의 벽에 간수하였다.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계축년(1793), 성상 17년 통훈대부 행 안의현감 진주진관병마절도제위 반남 박지원이 기록하다."
연암이 물레방아를 고안하여 퍼뜨렸다고 잘못 알아 멀쩡한 문화제 명칭을 바꾸어 놓고, 비싼 돈 들여 군데군데 씨도 안먹히는 물레방아를 만들어 전시하는가 하면, 고증 하나 제대로 못한 채 황암사(黃巖祠)의 이름만 빌려 허울좋은 사당을 지어 놓고 공적을 자랑하는 작금의 민선 지방관리 내지는 자칭 향토사학자, 허울좋은 지역문화인을 보고, 200년 전 이 고장 수령이었던 껄껄선생 박지원은 저승에서 어떤 웃음을 날릴까를 한 번 생각해 본다.
- 그 흐드러진 송덕비 하나도 굳이 만류한 연암이었기에, 答大邱判官李侯端亨論賑政書에서처럼, 즐거울 '樂' 자를 써 놓고 즐거워 웃는 파안대소(破顔大笑)가 아니라, 괴로울 '苦' 자에 웃음 '笑' 자를 더하여 낄낄거리며 고소(苦笑)를 날릴 것이나 아닐지...... (동인지 <길> 10호 ) 如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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