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단란이 지상에 있어서의 가장 빛나는 기쁨이며 자녀를 보는 즐거움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한다. 이런 기쁨 이런 즐거움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보금자리라 할 만하다. 늙어서 안주할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은 또 색다른 데가 있다. 삶의 공간이 가정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가정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라면 단연 'Home Sweet Home'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세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애창하는 이 노래의 작자 존 하워드 펜은 한 번도 가정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이 노래를 지은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 그야말로 엽전 한 푼 없는 처량한 신세에 놓여 있을 때였는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정 이상한 얘기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바른 말이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하고 말 것이오."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말대로 이 편지를 쓴 지 1년 뒤 튀니스에서 사는 집도 없이 거의 길가에 쓰러지듯 이 세상을 떠났고, 그 뒤 그의 시체는 다시 고향인 오크 언덕 공동묘지에 이장되어 비로소 안주의 땅을 얻었다고 한다.
만물이 태어나고 만물이 돌아가는 흙으로 사람 역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부모를 모시고 처자식을 거두어 살아가던 젊은 시절이야 또 그에 걸맞은 주택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왔지만 정년퇴직을 하고 모두가 떠나버린 빈 둥지에는 적막감이 감돌아 거주지의 공간이나 주거의 형태 양식이 바뀌게 마련이다.
고향 땅에서 나고 자라 일하다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혹여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공명을 떨쳤던 이들도 늙어서는 낙향하여 만년의 삶을 고향에서 기약하던 전통적 관념을 벗어나 이제는 자신의 삶이 뿌리내린 곳, 아니면 자식들이 사는 곳이 고향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20년을 고향에 몸 붙여 살고 객지를 떠돈 세월이 52년! 72년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인 오늘에 내가 안주할 보금자리의 현주소를 한 번 생각해 본다.
정들었던 부산 땅을 떠나 이곳 경기도 00땅에 눌러 앉은 지도 만 4년을 넘어서면서 나는 종신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들었다.
자식들과 가까이 있지만 한집에서 사는 세상이 아니니 따로 살 수밖에 없다. 스물 여덟 평형 작은 아파트와, 농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에는 좀 뭣하지만 면적은 한 천 평은 되는 근처에 있는 농경지가 이른바 우리 부부가 새로 둥지를 튼 보금자리이다.
복거(卜居)를 한 것도 아닌데 읍사무소 바로 옆, 800세대 규모의 서민 아파트 단지 내 제일 앞 동 00층 0000호 확 트인 시야에 정남향이어서 마음에 쏙 든다. 고향이 아니면서도 고향을 연상할 수 있는 곳, 지명마저도 내가 자란 동네 이름 그대로인 마0리 죽0리가 바로 이웃에 있다.
애장하던 도서를 추리고 또 추려 줄여서 서재를 꾸리고 오래된 전축과 음반을 고집 부려 컴퓨터와 함께 서재에 채웠다. 마음이 평온하다.
피천득의 수필 <晩年>과 <長壽>가 어찌 그리도 지금의 내 속내를 이렇게도 고스란히 드러내는가 싶었다.
"어려서 잃었으나 기억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계시고, 멀리 있어도 자주 편지를 해 주는 아들딸이 있고, 지금까지 한결같이 지내온 친구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쫓아와 반기는 제자들이 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비록 오막살이라도 누추하지 않다.' 는 옛글이 있다. 늙은 아내 탓을 하지만, 기름 때는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분에 넘치는 노릇이다. 그리고 긴긴 시간을 혼자 가질 수 있는 사치가 있다. 젊어서 읽었던 <좁은문> 같은 소설을 다시 읽어도 보고 오래된 전축으로 '쇼팽'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평온을 송구스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하늘의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 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晩年>의 전문 그대로인데, 이사를 해 온 지금의 내 정황과 어찌 그리 같은지 싶어 깜짝 놀랄 일인데다가, 마침 지난 스승의 날에는 학문하는 후배 교수와 제자 몇몇이 이사한 새 집을 방문해 주어, '有朋而自遠方來'한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다. 꼭이 '쇼팽'이나 <좁은문>은 아닐지라도, 나 역시 오래된 전축으로 클래식을 듣고 소설을 즐겨 읽기도 한다.
'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 라는 고시의 귀절처럼 나는 늙음이나 죽음에 다다를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를 저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심정을 달래는 방법이 고향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 그래서 마음의 고향이다. 나는 고향 소재지 전경을 담은 대형 사진을 표구하여 걸어두고 보면서 어린 시절의 고향 정경을 마음속으로 회상하기를 좋아한다.
만년의 보금자리라는 게 어찌 거주 공간 하나만일 수 있겠는가. 타고난 천성으로 무언가 심고 가꾸고, 만들고 다듬고 하는 근로를 본질로 하는 취미생활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인데, 참으로 운이 좋게도 만년에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까지 한 천 평쯤 아파트 지근의 거리에 생겼으니 천복이 아닐 수 없다. 문서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대로 경작하고 활용할 수 있는 땅이 있다는 것은 보금자리의 요건으로서 소중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가옥이라는 물체와 인간 문화가 조화를 이룬 둥지며 보금자리이고, 안빈낙도의 공간인 것이다.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여건이 허락지 않아 뜻 같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긴긴 시간을 혼자 가질 수 있는 사치가 있는 만년은 염치를 차리지 않는다면 그러한 안빈낙도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거주는 아파트에서일지라도 여가생활은 전원에서 이루어진다면 만년을 살아가는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나는 정년퇴직을 하고서 정원과 텃밭이 있는 다소 넓은 집에서 과목을 거두고 과채류를 가꾸면서 농사를 짓고, 관상용 화초를 골고루 심어 도심 속 전원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이름하여 '如岡園 시절'이다. 초목이 움트고 꽃피고 잎 피고 자라, 열매 맺고 낙엽 지는 모습을 무시로 가까이서 지켜보며 살아가는 즐거움을 실감하고 누려본다는 것은 안빈낙도의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세계에는 '如岡園'이 있고, 그것을 구축하는 데다가 열정을 바치는 것으로 보람을 찾고 있었는데, 멀리 수도권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일시 포기를 하고 말았던 것을 이제 새로이 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새로이 열어갈 나의 '如岡園'은 '전원농장'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는 없을 정도로 개발되지 않은 아주 소박한 일터를 말한다. 텃밭 같은 정원, 정원 같은 텃밭의 개념이다. 시설로는 농자재 기구와 간단한 취사도구를 넣어둘 만한 컨테이너 박스 한 채, 비 가림 시설이 있는 옥외 휴게 공간에 야외용 원탁 테이블 그리고 의자 몇 개면 족하다. 나는 아주 젊은 시절에 이런 원탁 테이블을 펼쳐놓고 소설 같은 작품을 쓰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것도 현실에 처하고 보니 역시 꿈같은 일일 따름이다.
과수원으로 얼개가 잡혀진 터전에는 유실수며 관상수를 보충하여 심어 관리를 하면 되고, 그러고도 남아나는 공간에는 흙을 갈아 뒤져 곡식을 심고 작은 도랑을 따라 미나리를 심고, 습지의 고인 물웅덩이에는 미꾸라지를 방사하면 되는 것이다. 작은 도랑 고인 물에 엿쟁이, 맹근쟁이, 소금쟁이 같은 물 속 곤충이 떠 다녀서 원시적 전원 환경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금송아지 전설', '화살 맞은 사슴의 은혜' 같은 역사적 설화를 간직한 효양산 동쪽 기슭의 이 터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내 만년의 보금자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읍 소재지 주택가 지근의 거리임에도 숲이 우거진 산자락에 접하여 있어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야생 동물의 천국이기도 하다.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나오는 서신일이 살려 준 그 사슴은 아닐지라도 고라니 노루 토끼가 뛰논다. 산꿩이 알을 품고 비둘기 뻐꾸기가 구구구 뻐꾹뻐꾹 울부짖는다. 다르르 하는 딱다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 버엉버엉 부엉이의 울음소리, 계절 따라 울어대는 여남은 산새들은 그야말로 이름 모를 산새이다.
농장 주변에서 조우한 동물 중 특이한 것은 살쾡이와 고라니에 관한 것이다. 농장옆을 끼고 흐르는 아주 작은 계곡 물가에 닭을 잡아다 먹은 흔적이 있었고, 과수밭 풀섶에도 까투리를 살육한 현장이 발견되곤 하여 의아했던 터에 새로 다듬어 놓은 옥외 휴게실 근처에서 먹다 남은 오소리의 뒷다리 같은 것이 있어 언짢은 기분이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산으로 이어진 건너편 밭두렁을 고양이를 닮은 작은 산짐승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들고양이인가 했는데 덩치가 좀 크고 암갈색의 줄무늬가 수상하여 조사하여 보았더니 '삵'이라고도 하는 살쾡이였다. 호랑이, 표범, 시라소니가 사라진 우리나라 생태계에서 고양이 과 동물 중 유일하게 먹이사슬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야생 맹수, 숲속에 숨어 있다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꿩이나 다람쥐 오소리 너구리를 낚아채 잡아먹기도 하고, 야간에는 인가 닭장에도 침범하여 닭을 잡아가는 닭서리의 명수, 그나마 지금은 환경부지정 멸종위기2급 야생동물로 보호받고 있는 귀한 손님을 목전에서 발견한 것인데 이즈음은 내가 이 터전을 자주 드나들면서 예초기로 풀을 깎는 소음 때문에 좀처럼 자취를 드러내지 않아 서운하다.
고라니는 사슴 과의 짐승이어서 귀족같은 손님이지만 채소밭에 무시로 내려와서 무, 배추, 고구마 잎을 뜯어 먹고 송아지 발굽만한 발자국을 찍어놓고 가서 골치를 앓았는데, 참으로 기묘한 장소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조우하여 가슴이 철렁하였다. 지난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허벅지까지 잠기는 눈 속에 고라니의 발자국이 딱 한 번 찍혀 있어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으면 이 겨울 텅 빈 밭에까지 내려왔겠는가 싶어 마음이 짠하기도 했었는데 그것이 이 고라니의 일생의 끝이었다.
늦게까지 오던 봄눈이 녹아내린 어느 날 농장에서 효양산으로 통하는 내 나름의 등산로를 개척하고 싶어 효양산에서 농장 경계선을 들어서는 계곡 좁은 길목에서 그 예의 송아지만한 고라니와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계곡 길을 통해 산으로 오르고 그 길을 통해 농장으로 내려가야 하는 외통수 길, 기겁을 하고 놀랐지만 아뿔사! 고라니는 산을 오르는 자세에서 영롱한 눈빛 그대로 죽어 박제가 되었던 것이다. 추리컨대 평지에서도 허벅지까지 눈이 쌓였던 지난 겨울 산골짜기 계곡 길 깊은 눈 속에 빠진 고라니는 눈 속에 파묻혀 얼어 죽고 눈은 녹아 그 모습 그대로 박제가 된 것이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 앞에 희비애환을 가려서 무엇하겠는가.
내 만년의 보금자리! 건강과 정서를 가다듬을 내 나름의 농장 여강원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근원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 내가 자란 유년기의 농촌 정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데 있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세월이 많은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했다면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내가 정을 붙여 가꾸게 된 천 평 전후의 토지가 있는 환경은 산 쪽이 아닌 개울물과 밭 언덕으로 시야를 돌리고 보면 영락없이 그 옛날 유년 시절 내가 살던 고향 우리 밭의 풍경이다. 붉은 진달래, 하얀 조팝나무 소박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산꿩이 푸드덕거리는 소리, 두견이 피를 토하며 우는 소리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온 착각에 사로잡힌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추어진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라고 피천득은 말하였다.
자연이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착한 일을 하면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 집에 있어 심심하면 길들여 온 버릇대로 예전에 보았던 영화의 스크랩을 뒤지어 그 영화 장면을 회상하고, 책갈피에 끼워 둔 옛날 사진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지도를 펴놓고 여행하던 곳을 찾아서 보기도 하는 것이 즐겁다. 노년에 찾아든 이 보금자리에서...... (김재환, 2010.7, 동인지 <길>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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