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점득이 이모

如岡園 2009. 11. 1. 13:11

 나에게는 누님도 많고 고모도 많고 이모도 많다. 따라서 내 가족 주변은 모계(母系)가 절대 다수로 우세한 집안이었다. 상대적으로 열세인 남성으로 태어나 그 존재 가치가 돋보여 이득을 본 것이 나인 셈이다. 친가나 외가 쪽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이모님 한 분이 '점득이 이모'이다. 나보다 꼭 열 살 위이니 지금은 82세의 할머니이다. 내 어머니가 맏딸이고 그 밑으로 또 딸만 내리 셋에 다섯 번째로 나은 딸이었으니, 남아선호 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절에 아들이 아니어서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다.

 이름을 '끝딸' 쯤으로 해서 마감을 했어야 하는데 혈통을 이어가는 데는 아들이 꼭 있어야 했으니까 아들 동생에 터를 팔아라 하고 이을 '承'자 사내 '男'자, '승남'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호적에나 얹혀 있는 것이고, 통상적으로 불리는 이름은 '점득이'이다. 미간에서부터 콧잔등에 이르기까지 흉하게도 검은 점이 있어 '점득이'인 것이다. 신체적 약점을 들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어서 요즘 세상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그 시절엔 응당 그렇게 되기도 하였다.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고 인식하고 있고, 또 이름은 실체의 그림자로서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운명처럼 따라 다닌다고 볼 때, 적어도 점득이 이모의 이름은 그렇게 좋은 이름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이모는 '점득이'라는 이름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승남(承男)'이라는 본 이름에 값하여 비록 배다른 동생이긴 하지만 남동생을 하나 얻기는 하여 이름값을 톡톡히 하기도 했지만, 점득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못마땅하다.

 내 외삼촌이기도 한 점득이 이모의 동생은 종절(宗哲)이라는 본 이름이 있는데도 바위처럼 튼튼하게 자라라고 '바우' 였는데 손재주가 있어 어린 나에게 수수깡으로 동물모형이며 인형을 잘 만들어 주었고 소나무껍질을 깎아 빚어 장난감 배를 만들어 주기도 하던 것이었다.

 윗사람에게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가장 처음으로 배운 것은 이 외삼촌의 무서운 눈빛에서인데, 어느날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는 외삼촌을 뒤따라 오르면서 늘 그렇게 불러왔듯이 '바우야!'하고 불렀더니 응대도 안 하고 무서운 도끼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면서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니래도 자신이 서출(庶出)임을 알아가던 사춘기였던 데다가 큰누님이 되는 우리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나를 끔직이 아껴주는 판인데, 거북하고 촌스런 '바우'라는 이름을 어린 생질에게서 들었으니 기분이 매우 언짢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내가 아는 점득이 이모는 미간에 점이 있는 결점을 제하고는 총명하기도 하여 왜정 때 보통학교에서 공부도 잘 하였고, 깔끔하고 민첩하여 책상머리에 석유상자를 문종이로 곱게 발라 예쁜 그림들을 붙여 두고 책꽂이를 겸한 서고로 이용도 하고 있어서, 나는 보통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에 어깨너머로 그 당시 일본어로 된 교과서를 앞질러 익혀 칭찬을 받던 기억이 새롭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도 우리 예쁜 이모가 '점득이'라는 촌스런 이름으로 불린 것은 참 잘못된 일이다. 그 당시에도 그 흉한 점을 없애려고 온갖 노력을 했던 것이지만 치료를 한다고 해도 도리어 얼굴에 흉터를 남겼을 뿐으로 허사였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안타까웠던 일이었으니 하물며 당신께서는 어떠했으랴!

 그런 점득이 이모가 모진 세상을 살면서 남다른 인생행로를 헤쳐 가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阿Q정전'을 쓴 노신이나 서민을 모델로 한 여러 전(傳)문학을 완성한 연암의 재질을 타고 나지 못한 내가 감히 점득이 이모의 인생을 글로 쓴다는 것이 송구할 그런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점득이 이모는 좋은 가정에서 명민한 처녀로 자랐지만 얼굴에 흉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혼기를 맞아 배우자 선택에 여간한 핸디캡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같은 동네 같은 학교 동창과 결혼을 하였다.

 어릴 때 내가 보기에도 이모부는 멋진 사람이었다.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장구 잘 치는 한량 기질에 사교성이 있어 사람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래도 결혼 초기에는 처가 쪽 사람들을 공경하고 외모에 약점이 있는 이모를 끔찍이 위하는 흠없는 사람이었다. 결점으로 비친 것이 있었다면 사람이 좀 진중한 데가 없는데다가 신뢰감을 느낄 수 없는 경박함과 사기성이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논 몇 마지기를 팔아 장삿길로 접어든 것은 생업을 위해 잘한 일이라 쳐도 줄줄이 내리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낳고 한창 돈을 벌어도 한 가족 건사하기가 어려운 판에 첩을 얻어 딴살림을 살다가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줄행랑을 치고 말았으니 참 몹쓸 사람이었다.

 얼굴에 점(點)이 있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애시 당초 결혼을 말았어야 될 일이었다. 한 여인을 돈 한 푼 없이 자기가 낳은 여섯 자녀를 맡겨, 모성의 올가미에 꼭꼭 묶어놓은 채 나 몰라라 하고 달아나버린 한 마리 짐승이었다.

 나는 성년이 되어가면서 점득이 이모의 눈물겨운 인생행로를 내 어머니의 한숨이나 외할머니의 눈물 속에서 읽어왔다. 첩을 얻어 간 이모부는 그 쪽에서도 또 딸만 내리 다섯에 그 귀한 아들 하나를 더하여 육남매를 더 낳았으니 도합 열두 자녀를 둔 허울 좋은 가장이다.

 나중에 점득이 이모 쪽에서 부자가 되고 그쪽 아이들 건사에 살림밑천까지 밀어주었다니 이모부는 영 사회생활을 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 결정적인 결점은 아무래도 인간적 신뢰가 없는 불성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형편의 이모는 억척의 화신이 되어 장삿길에 나서서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몇 백만 달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개념이나 덩치의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피땀으로 일구어 온 아주 작은 돈인데 그냥 부자라고 하고 싶은 그런 부자다.

 또 어쩜 이모의 장사 수단이나 부의 축적은 허생전의 허생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무일푼의 허생이 장사밑천으로 변 부자에게 만냥 빚을 얻었다면 점득이 이모는 촌부(村富)에게서 비싼 장리 쌀을 얻어 팔아 장사밑천을 하였다는 것이 다르다. 매점매석(買占賣惜)으로 폭리를 취한 것은 더욱 아니다.

 남자로 태어날 운명이었든지 통 큰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시골에서 농산물을 차떼기로 몰아다가 서울 가락동 시장 같은 데다가 내어놓는 식이었다. 4,5십년 전 일이니 대단한 모험인 셈이다. 물론 처음에는 나약한 여자의 신분이라 첩 얻어 달아난 남자를 그래도 남편이라고 의지하여 서울 쪽으로 머리를 둘러 장삿길을 텄는데, 이제는 또 사기를 쳐 돈을 떼먹는 것이었다. 점득이 이모의 말을 빌자면 한마디로 죽일 놈인 것이다.

 몇 차례 돈을 떼이고는 경기도 시흥 군자로 자리를 옮겨 자립으로 장사를 하였다. 동해안의 미역을 사서 모아 서해 쪽으로 운반하여 팔기도 하고 서하 골짜기 감을 차떼기로 사다가 경기지방에 풀어먹였다. 먼 거리 운송은 차를 세내어 운반했지만 물건을 사 들이고 풀어먹일 때의 일손은 목이 휘도록 머리에 이고 날랐단다. 지금에 와서 보면 당자가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단다. 몸이 쇳덩이였다는 것이다.

 그 많은 새끼들은 거처(居處)도 제대로 없었던 외할머니가 달고 다니면서 거두고 있었는데, 시골 우리 집에도 더러 의지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 외할머니는 여섯 외손 중 한 아들인 수봉이를 끔직이도 챙기던 것이었다. 그 시절 어려운 사정에서도 '수봉이'를 '쓰봉이 쓰봉이'하면서 금지옥엽으로 돌보시던 외할머니! 아들 선호사상에 멍이 든 외할머니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때부터 점득이 이모는 '군자 이모'라고 부를 만큼 군자를 거점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워낙 열성으로 움직이니 운도 따르기 마련이어서 돈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논도 사고 집도 샀다. 그 때 사놓은 논이, 집이 대도시가 되면서 금덩이가 된 것이다.

 그 어렵게 키운 자식들도 하나같이 착실하고 자립심이 강했다. 중학교까지만 시켜놓은 맏딸이 제가 벌어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피아노 학원도 차려 돈을 벌어 그 밑의 동생을 거두었다. 미장원에 들어가서 미용사 보조를 하다가 어느덧 일류 미용사가 되는 딸이 있는가 하면, 그 밑 또 그 밑 동생들은 자기네들이 못다한 대학공부까지를 시켜 의젓한 사회진출을 시키기도 했다. 이런 이모의 인생살이 과정을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벌써 남이 되어 원수같이 살아 온 이름만의 남편이지만,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남편의 위상을 다치지 않게 자녀들의 혼사 자리에도 앉혀, 아버지로서 위신을 지켜주는 배려까지 하는 여장부다.

 점득이 이모에게서 딸 다섯 아들 하나를 낳고, 또 얻어간 첩에서 딸 다섯 아들 하나를 퍼뜨려 도합 열두 자녀를 거느린 우리 이모부 같은 사람! 자기는 뚜렷한 생업도 없이, 팽개친 명색상의 본처로부터 생계비를 뜯어가는 남자! 참 어처구니없는 사람이다. 운명의 고리에 얽혀 어쩌지도 못하고 미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무척 관대하여 처조카에 대한 애정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적 체면을 잃은 상태에서 접근을 피했던 그 이모부는, 벌써 오래 전 어느 장례식장에서 한 번 모습을 드러낸 후 소식을 끊었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먼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 어릴 적, 점득이 이모의 신혼 초 외갓집 식구들의 야유회에서, 멋진 장구춤과 구성진 민요가락으로 좌중을 매료시켰던 그 이모부의 모습을 떠올리고 연민의 정을 느낀 것도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책읽기를 좋아하여 웬만한 교양서적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을 수 있는 독서인이기도 한 점득이 이모, 아니 군자 이모는 나를 무척 사랑하고 기특해 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멀리 군자에서 부산까지 내려와 축하하면서, 다른 박사는 돈으로 사는 박사도 있다는데 문학박사는 진짜 박사라면서 하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일이 부끄러우면서도 그 나름대로 학문을 존중하는 관심과 배려에 경의를 표했다.

 내가 경기도로 이사를 오고 점득이 이모가 팔순이 되던 해, 팔순잔치를 겸한 자리에 초대를 받아갔다. 소설 같은 점득이 이모의 삶의 현장, 말로만 들어 짐작만 하고 있었던 생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 만감이 교차했다.

 안산시 00동 신축 빌딩의 최상층 전부를 자택공간으로 확보하고 스물다섯 간 원룸을 세놓아 살고 있었다. 장사해서 번 돈으로 두세 곳에 사 둔 논밭은 대도시가 되어버린 시가지의 어느 부분에 섬처럼 살아 농토로 존재할 고집을 부리고 있어 아이러니하다.

 가시밭길을 헤치고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온 자랑스러운 여성, 그런 장한 어머니에게 주는 이름 있는 상장도 표창장도 더러 받았다.

 아이들은 모두 시집 장가를 보내어 독립하여 살고 있었으니, 지금은 그 강철 같은 삶의 투지도 과녁을 잃고 허허롭기만 하단다. 책이나 보려니 노안에 피곤만 겹치고 당위성도 없으면서 논밭으로 가서 일을 한단다. 일을 하면 아픈 데도 없어지고 그런 낙원이 없단다.

 실로 몇십 년 만에 만나게 되는 코흘리개 이종사촌 동생들이 이제 모두 시집 장가를 들어 딸린 가족을 거느리고 모여 팔순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니, 이것이 바로 고달팠던 점득이 이모의 열매구나 싶어 감개가 무량했다.

 불행하고 고생스러웠지만 세상을 그렇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온 점득이 이모는 인간승리의 한 모델이다.

 큰 형부가 되는 내 아버지 제사에는 꼭 한번 이천을 다녀오겠노라면서, 칠십 고개를 넘긴 나에게 여비를 겸한 용돈을 두둑이 쥐어주는 점득이 이모의 콧잔등을 덮은 검은 점을 새삼스레 들여다 보았다.

 그 흉한 검은 색 얼굴의 점(點)이야말로 단순한 복점(福點)이 아니라, 한 여인이 불행했던 운명의 길을 헤쳐 열어가기 위한 칼을 간 숫돌과도 같은 것, 한 인생을 승리로 이끈 훈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인지 '길'10호. 2009.7.15)   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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