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초꽃은 하지를 전후한 장마전의 보리고개 때, 척박한 산야 노변에 소금을 뿌린 듯 흐드러지게 피는 꽃이다.
뻐꾹새 소리 멎고 녹음 우거진 숲 속엔 청아한 꾀꼬리 울음소리, 밤꽃이 피어 역겨운 향내를 품기며 궁핍을 부채질하는 계절이어서 망초꽃은 더욱 가난을 연상시키는 꽃이다.
산 아래 밭 주변이나 길가, 도심의 공터 등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들 중 하나로서 모든 잡초가 그렇듯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면 제멋대로 자라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인 망할 놈의 망초인 것이다.
쌍떡잎식물 초롱꽃 목 국화과의 두해살이 풀로 높이 30~100센티미터 크기의 망초는 6~9월에 걸쳐 흰색 또는 연한 자줏빛 두상화가 산방꽃차례를 이루어 가지 끝과 줄기 끝에 가지런하게 달린다. 총포는 반구형으로 줄 모양 바소꼴이고 긴 털이 난다. 화관은 혀 모양으로 길이 7~8밀리 나비 1밀리 정도, 열매는 수과로 익는다.
망초꽃의 이런 신상명세서를 제쳐두고 이 풀이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모든 것이 세계화 되고 국제화가 되어 가다가 보니 외래 귀화식물이 어찌 망초꽃 뿐이며 또 어찌 하찮은 식물에만 국한될 뿐이겠느냐?
단일 민족임을 자랑하던 이 땅에 다문화 가정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대중교통 수단의 차 안, 오가는 길거리, 작업장의 궂은 일터에 외래 인종마저 넘쳐나고 있으니 토종의 것을 따지고 찾아내기가 도리어 어려울 지경이다.
굳이 배타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질적인 것에는 거부감이 들고, 배척하거나 그냥 신기한 것으로 돌려 이단시 하는 것이 문화적 정서적 감성이다. 신라 때 처용이 그러한 존재였고, 해방 후 코 큰 미국사람을 보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모두 그러한 감성적 발현에서 기인된 것이다.
물 속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황소개구리, 물자라 등의 양서류, 어패류가 모두 그러하다.
근래에 와서는 더욱 이름 모를 식물류가 무제한으로 유입되어 원색적인 색깔, 위압적인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산야를 잠식하고 있으니 공포감마저 들 지경인데, 이젠 코스모스, 망초꽃이라면 외래식물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친숙한 꽃이 되고 만 것이다.
북아메리카 원산의 망초가 하필이면 을사조약이 맺어지던 해에 유난히 많이 번졌다 하여 망국초(亡國草), 망초(亡草)이라니 풀꽃 이름 치고는 고약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면 어느 곳이고 제멋대로 자라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인 망할 놈의 망초이지만, 묵정밭, 언덕배기, 한적한 산길, 뙤약볕이 내리쏘는 들녘 먼지 길가에 군락으로 피어 있는 망초꽃은 이쁜 구석도 있고,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마력도 지니고 있다.
망초꽃/ 바람에 한들거리던 그 길// 하얀 꽃잎 속에/ 묻어둔 어릴 적 우리 사랑// 긴긴 세월을 등에 지고/ 다시 가본 그 길// 회룡사 계곡 길은/ 그 사랑 간 곳 없고// 텅 빈 자리에는/ 추억만이 말없는 산사에 묻혀 있구나// 추억 찾아 가는 길은/ 저 긴 계곡을 돌고 돌아// 침묵의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그 곳엔 첫사랑 망초꽃이/ 아직도 피지 못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망초꽃 피는 길에...
표주박이라는 닉의 '망초꽃 피던 길'이라는 시인데, 망초꽃이야말로 추억의 꽃 그리움의 꽃 안타까움의 꽃이다.
내가 늘그막에 망초꽃에 관심하게 된 것은, 초여름 들판 산책길에서 흐드러지게 핀 망초꽃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아니 그 추억 때문이다.
대학시절 우리들 흑백사진 한 장의 배경이 된 복현동 사범대학 본관 건물 뒤 언덕에 핀 망초꽃은 50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잊을 수가 없다.
점심시간, 하얀 망초꽃밭에서 옹기종기 모여 펼쳐놓고 먹는 자취생활의 빈약한 도시락! 망초꽃이 가난해서인지 도시락이 부실해서인지 눈물겨운 장면이면서 어찌 그리 마음은 풍요롭고 젊은 혈기가 약동했는지!
서클 활동이 별도로 있었던 때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곧잘 새로운 노래를 찾아 배우고 즐겼다.
'목장 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스타틀라 스타틀라 스타틀라 품품...' 하는 노래며, <에덴의 동쪽>, <자이언트> 같은 엊그제 개봉된 영화 주제곡의 악보를 작성하여 원어로 합창을 지도하던 천재도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그 하얗게 핀 망초꽃 언덕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시절 우리들 대학이 자리한 산격동 복현동 일대의 캠퍼스 산언덕은 풀 한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 그런 곳에 그 강인한 생명력의 망초꽃은 천사처럼 다가와 복음을 내리고, 우리는 그에 환호했다. 풍로에 장작불을 지펴 알루미늄 밥솥에 설익힌 도시락일지라도 망초꽃의 풍경과 열정이 넘치는 동과 동기생이 있어 진수성찬이었다.
망초꽃을 보면 그 친구들, 그 점심 도시락, 그 노래 그 영화가 생각나고 그 영화 그 노래를 떠올리면 지금도 나는 반세기 전 그 망초꽃 핀 산언덕 추억의 캠퍼스 복현동으로 달린다.
원지에 필경을 하여 등사한 악보를 돌려주며 노래를 리드하던 천재를 평생토록 잊을 수가 없었다. 가슴 속 깊이 각인된 그 시절 그 산언덕의 하얀 망초꽃처럼...
수석으로 졸업한 업보로 서울특별시로 도 배정을 받은 것이 그 당시로 봐서는 악운이었던지 교사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갔는가 보았다.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미국시민이 되어버렸으니 대학의 문을 나선 후론 그것이 끝이었다.
긴 긴 세월을 등에 지고 다시 가 본 그 길 '망초꽃 피던 길' 처럼, 망초꽃 흐드러지게 핀 들길을 나는 자전거를 달리며 상념하기를 좋아했다. 살아온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 같은 세월 같은 전공끼리는 늙어가면서 정서면에서 공감되는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다. 망초꽃에서 연상되던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망초꽃이 매개로 된 어떤 교감일까 실로 50년만의 전화를 통한 조우였다. 목사의 직을 정년퇴직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단다.
망초꽃 그늘에 앉아 다른 나라 다른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온 일생을 이야기로 나누며 만년을 즐기고 싶다.
우리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수천수만 광년 밖에 있는 별에 갈 수 있듯이 기억은 수십 년 전 한 초점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50년 전의 그 망초꽃이 피었던 동산으로나 달려가 볼꺼나. (동인지 <길> 11호)
如 岡
p.s
* 목장길 따라:보헤미아 민요. 중학교 2학년 과정 음악교과서에 등재.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스톨라 스톨라 스톨라 품파/ 스톨라 품파 스톨라 품파
스톨라 스톨라 스톨라 품파/ 스톨라 품파 품품품
* 체코의 서쪽 지방인 보헤미아는 집시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경쾌하면서도 서정적인 민요가 많다. 이 곡은 보헤미아 지방의 민요와 집시민족 특유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알맞은 곡이다. 스케타나, 드보르자크 등도 보헤미아 출신의 음악가이다. 1950 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이 곡이 지금은 중학교 2학년 과정 음악교과서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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