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바귀 타령
잔치 자리 같은 데서 이 노래를 꺼낼 때면, "시작일세 시작일세 담바귀 타령이 시작일세" 하는 법이라 '시작'이라는 말의 곁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이 노래가 일정시대 때 불온하다 하여 금지를 당하였던 이유는 잠깐 밝혀 볼만한 일이다.
"귀야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너의 국이 어떻길래 대한제국을 왜 나왔나? 우리 국도 좋건마는 대한의 국을 유람왔네" 로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어,
"은을 주려 나왔느냐? 금을 주려 나왔느냐?" 의 묻는 말의 대답이,
"은도 없고 금도 없고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 로 되어 있다. 다음부터는 전승하는 이에 따라 가사 내용을 달리하여 일정한 것을 찾을 길 없다.
그러나 애초 '담바귀'를 단발귀(斷髮鬼)', 곧 '머리 깎는 귀신' 또는 '머리 깎은 귀신'이란 뜻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일본 세력의 상륙을 은근히 비꼰 것이라고 보겠으니, 먼저 가사의 '은도 없고 금도 없이' 라는 말의 뜻이 짐작이 간다.
노래하는 이에 따라서는 '처녀 쌈지는 한 쌈지요 총각의 쌈지는 빈털털이라', 어찌 보면 익살도 같으나 처녀로 실속 차린 일본 세력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 계란유골(鷄卵有骨)
'재수가 없으려면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는 식으로, '모처럼 호의로 생긴 것이 그나마도 마(魔)가 들어 득이 되지 않는다' 는 뜻으로 쓰인다.
흔히들 황희 정승을 쳐들지만, 그가 청백하고 어렵게 지냈다는 얘기가 하도 많으니까 실제 인물에 덧붙여서 그럴싸하게 얘기한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겠고, 실지로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여간 어떤 재상이 몹시 곤궁하게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임금이 특명으로 어느 하루 서울 사대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을 몽땅 사서 그 대신에게 주라고 분부하였더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아침서부터 비가 노드리듯 내려서 인적이 딱 그쳐 버렸다. 꼭 하나 서대문인가로 계란 세 꾸러미를 가지고 들어오는 이가 있어 그것이 그 재상의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또 사고다.
계란마다 뼈가 들어 있어서 그나마도 하나 먹어 보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몇몇 기록에도 나오는데 주인공은 물론 밝힌 곳이란 없다.
# 불수산(佛手散) 지으러 갔다 금강산 구경
조선시대 말엽의 기인 정수동(鄭壽銅, 본명은 芝潤)의 일화에서 나온 얘기다.
정수동은 뛰어난 글재주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지우(知友)를 입었으며, 또 두호해 주는 권세가도 있었으나 언제나 뜬구름 같은 행적으로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기이한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불수산이란 여자가 애기를 낳을 때 고생 않고 수이 낳으라고 먹이는 약이다. 부인이 애기를 낳으려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약을 지으러 나섰다가 길에서 친구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온 그런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조두순(趙斗淳)이란 대관 앞에서 수동의 그런 행적을 탄하였더니, "당대에 자네 있는 줄은 몰라도 정수동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고 그를 감싸더라고 한다.
어떤 연회 자리에서 화제가 마침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으로 미쳤을 때, 모두 '호랑이' 니 '양반'이니 '도둑놈' 이니 하니까 불쑥 한다는 소리가, "호랑이 탄 양반 도둑놈이 제일 무섭지 뭐..." 했더란다.
호피 깔고 앉아 갈퀴질하는 양반들을 면전에서 비양한 것이다. 그의 날카로운 풍자가 대충 이와 같았다. 철종 9년(1858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유고(遺稿)를 모은 <夏園詩抄> 한 권이 전한다.
# 먼저 영감의 제사
조선시대 후기 영조 때 청나라에서, 조선이 명나라를 잊지 못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 제향을 받드는 일을 힐책한 사건이 있었다.
유척기(兪拓基)가 사신의 어려운 임무를 띠고 가는 도중 이종성(李宗城) 속칭 장단(長湍)대신이라 하는 분의 향제에 들르니 의미심장한 얘기를 들려 준다.
늙은이가 밤에 남의 제사밥을 좋아하는데 이웃에 재가한 여인이 있어 먼저남편의 제사를 받들므로 영감이 탓했더니, "당신이 만약에 불행하고 내가 살기 어려워 개가했다면 당신 제사를 뉘 있어 받들겠소?" 하여 영감이 그리 여기고 제사를 차리게 하여 내 그런 음식을 다 얻어먹었소.
유척기가 청나라 정부의 문책을 받을 제 이 비유로써 대답하여 외교관계를 무사히 수습할 수 있었다 한다.
물론 사대주의의 찌끄러기 얘기라 하겠으나 선견의 안목을 높일만하다.
그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5세손이었는데 역시 백사 현손에 이광좌(李光佐)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찌나 무섭고 점잖든지 어린애들이 학질을 앓을 때 그의 이름 석자만 써 붙이면 떨어졌다고까지 한다.
또 전라도 출신의 명필 이삼만(李三晩)은 자기 아버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철천의 한이 되어 뱀만 보면 반드시 잡아서 먹었으므로 뱀 들어올만한 데 그의 이름을 써 붙이면 얼씬도 못한다는 것이 그 지방에 전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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