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
자빠져서 침뱉기로 제가 벼슬하고 있는 조정을 드러내 놓고 욕할 수는 없다. 조령모개(朝令暮改)로 변덕 많은 정사를 비꼬되 민심이 이탈되어 망했다고 전 왕조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어느 때고 왕조가 바뀌면 전대에는 형편 없었다고 과장하여 표현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관원이 요새로 치면 공문을 기안하여 하인을 시켜 보내 놓고, 이튿날 보니 그것을 변경하여야겠으므로 고쳐 써서 뒤미쳐 보내며 앞의 놈의 것을 회수하고 이것을 전하라고 하였것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또 고쳐야 할 일이 생겨 사람을 보내되 이번엔 아예 좇아가 둘다 불러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직 출발하지도 않은 두 하인을 각기 저희들 집에서 데리고 왔다.
"왜 그저 안 떠났느냐?"고 힐책하니까 그 대답이 걸작이다. "언제든지 그러기 마련인데 무엇하러 애써 가다가 돌아옵니까?"
조선조 중엽에 소재(蘇齋)라는 호를 가진 노수신(盧守愼)이라는 문장 대가가 있었다. 판서들 중에서 발탁되어 우의정이 되었으니 정승이다.
그런데 하루 온종일 있어도 한가지도 헌책(獻策)이라곤 하는 일이 없다. 그래 동료의 한 분이 독설을 퍼부었다.
"노정승의 침은 종기의 선약이라".
속담에 아침에 일어나 말 안한 침을 바르면 종기가 낫는대서, 말없는 노수신을 비꼬아서 한 소리다.
그를 천거하였다는 율곡(栗谷)선생에게 어떻게 그렇게 무능한 분을 추천하였느냐고 따진 사람이 있었다. 그랬더니 대답이 또 묘하다.
"공연히 쓸데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보다 나아".
그래, 민요에도 있다.
"옛법 고치지 말고, 새법 내지 말라" 고.
전 정권 지금 정권 가릴 것 없이 요새 정치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 군자(君子)는 가기이방(可欺以方)
군자란 마음이 곧고 사악(邪惡)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방편을 가지고 속일 수 있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후기 정조 때 조태채(趙泰采)라는 당파 싸움에 희생된 정승이 있었다. 마침 부인 심씨를 잃고 얼마 안 있어서의 일인데 담당한 서리가 예정된 시간을 지나 기다리고 애타던 끝에서야 나타났으므로 그 벌로 볼기를 때렸더니 울면서 호소를 한다.
"소인의 죄를 소인이 모르는 배 아니옵고 죽을 때 죽더라도 비통한 말씀이나 드리고 벌을 받아도 받겠습니다. 소인은 상처를 하여 어린것 셋을 데리고 있사온데 큰놈이 다섯 살, 다음이 세 살, 끝이 딸년이온데 난 지 여섯 달밖에 아니 됩니다. 그래 아비겸 어미겸 키우고 있사온데 오늘 아침도 어린 년이 울고 보채어 이웃집 아주머니께 젖 먹여 줍사고 부탁하고, 이어 두 놈이 일어나 또 배고프다고 울기에 나아가 죽을 사다가 먹여 주곤 부랴부랴 들어온 것이 이쯤 되었사오니 그저 죽여 줍소사".
"네 정경이 정히 나와 같고나" 하고 물자를 후히 주어 내보냈는데, 물론 말짱히 거짓말이요 매맞는 것을 모피하기 위한 깜찍한 계교였던 것이다. 역시 군자는 사악을 모르기 때문에 방편을 가지고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 말뚝이모양 대답만 해
상대를 해도 딴전만 부리는 일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개화되기까지 우리나라에는 똑똑한 연극이 없었다고들 말하고 있지만 전통적 개념에서의 민속극으로 외연을 확대해 보면 그렇지 않다.
그 중에서 탈춤이라는, 무용을 주로 한 가면극이 있는데 황해도의 봉산(鳳山), 경기도 양주(楊州)의 것이 널리 알려져 왔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이미 소멸된 기악(伎樂)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서 중국 남방으로부터 수입되어 온 것임을 문헌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또 사자(獅子)도 일반 서민 사이에 널리 애호되어 수원성을 쌓았을 때의 실황을 그린 것을 보면 역군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쌍사자를 놀리는 광경이 나타나 있다.
이 사자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던 것인데, 전기 봉산의 경우는 탈춤과 어울려서 연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 탈춤은 모두 열 두 마당으로 구분되어 거의 전승한대로를 연기하는데 그 중에 말뚝이 과장(課場)이라는 것이 있다.
이 과장에서 취발이가, "말뚝아 말뚝아" 하고 수없이 불러도 말뚝이는 딴전을 보면서 퉁명스럽게 "네 네" 하고 대답만 한다.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생겼을 때는 과거의 탈춤이 얼마나 민중에게 친근한 존재였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멀쓱하니 키 큰 여자더러 '왜장녀 같다'든지, '취발이 상투 짜나 마나' 하는 유의 말도 역시 탈춤에서 나온 말들이다.
# 가명인(假明人)
이것은 국어학자이자 국사학자인 권덕규(權悳奎)라는 사람이 만든 말이다.
삼일운동 후 일본이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자 전국의 유림(儒林)에서 만동묘(萬東廟)의 제향(祭享)을 다시 받들자는 공론이 돌았다.
만동묘란 것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만주족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 한이 되어 명나라야말로 우리 종주국(宗主國)이라는 명분 아래 임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모신 사당으로, 흥선대원군 때 일시 철폐되었다가 재건은 하였으나 혼란 통에 제향을 못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꼴을 보자 그 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 1920년 5월 8, 9 양 일자 지상에 <환민(桓民) 한별>이란 필명으로 이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야유하는 내용의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捧)'이라는 글을 실었다.
제목부터가 그러하듯 매우 감정적인 어투로 그들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은 인사를 여지없이 몰아쳤다. 나라의 주권까지 빼앗긴 오늘에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는 강개(慷慨)한 마음에서 쓴 글이겠으나 유림의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궁벽한 역사 사실인 야먀자끼(山崎闇齋)의 일화까지 들추어 그의 자주성을 주장한 나머지, '만약에 공구(孔丘,공자)가 원수(元帥)가 되어 70제자를 거느리고 일본을 침공한다면' 하는 가제(假題) 아래 마땅히 '먼저 공구를 버히어 그 죄를 물을 것이다' 라고 한 대목은 더욱 큰 노여움을 사, 동아일보의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지는 문제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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