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정초의 전승놀이 및 오락- 윷놀이/ 연날리기/ 널뛰기

如岡園 2011. 2. 1. 11:11

          # 윷놀이

 정초에 들어 가장 보편적으로 남녀노소가 귀천없이 즐겁게 하는 놀이가 윷놀이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농가가 한가해지면 여러 가지 오락이 행해지거니와 명절이 되어 방에 들어앉게 되면서부터 윷놀이는 우리의 생활에 없을 수 없는 놀이가 되었다. 윷의 어원은 아직 분명하지 않으며, 종류로서는 크게 장작윷과 밤윷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장작윷은 길이 15~20센티미터, 직경 3~5센티미터 정도의 윤목(輪木) 두 개를 각각 반으로 쪼개어 네 개비를 만든 것이다. 나무는 박달나무나 밤나무를 쓰는 것이 보통이며, 박달나무윷은 주로 여자용이어서 비교적 작고 잘 다듬어서 채색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밤나무윷은 남자용으로서 크고 무게가 있다.

 밤윷은 작은 밤알 만한 크기의 나무조각으로 만든 것인데 장작윷 네 개비를 높이 던져 바닥에 요란스럽게 떨어뜨리는데 반하여 이 밤윷은 보통 조그만 공기 따위에 넣어 휘두르다가 바닥에 휙 던지는 식이다. 밤윷의 변형으로서 나무조각 대신 팥알을 반으로 쪼개어 쓰는 지역도 있다. 대체로 남한에서는 나무조각, 북한에서는 팥알을 사용하였다.

 윷은 노래의 아리랑과도 같이 한국인이면 누구나 그 노는 방법을 알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전승놀이이다. 놀이 방법은 소정의 윷판(넉동판이라는 고장도 있다)을 놓고 쌍방이 각각 윷을 던져 나온 결과대로 말 네 개를 진행시켜서 최종점을 먼저 통과하는 편이 이기는 것이다. 물론 말이 윷판(말판)을 지나가는 도중, 여러 가지 규칙이 있어서 단순히 높은 끗수만 나온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닌 데에 이 놀이의 묘미가 있다. 이 방법에 있어서 말 하나가 출구(出口)를 벗어나면 한 동 났다고 하며, 4동이 나면 이기는 것이므로 이 놀이 방법을 '동몰이', '동뛰기'라고 하는 지방도 있다. 

 이 놀이에 윷판(말판, 넉동판)이 쓰이며, 그 윷판의 자리 하나하나에 명칭이 있어 능숙한 사람들은 윷판을 따로 그리지 아니하고 머리 속으로 말을 쓰기도 한다.

 다음에는 산윷[算柶]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평안, 함경 지방에서 행하는 놀이이며 일명 보습윷이라고도 한다. 노는 방법은 산개비나 콩 팥을 늘어놓고 윷을 던져 나온 수대로 산개비나 콩 팥을 거두어들여 많이 차지한 편이 이긴다. 그런데 만일 나온 수에 해당하는 산개비나 콩 팥이 이미 그 자리에서 없어졌을 때는 자기가 딴 것을 그 수대로 그 자리에 메우는 규칙이 있어 이 놀이에 변화를 주고 있다.

 윷놀이는 단순한 오락에서 벗어나 도박성을 띠기도 한다. 넉동나기로도 돈을 거는 일이 많지만 도박 위주의 윷놀이로서, '덕대놀이', '모다먹기' 등의 방식이 있다. 가령 덕대놀이를 보면 한 사람의 덕대를 정하고 나머지는 제각기 돈을 건 다음 덕대가 먼저 윷을 던져 윷이나 모가 나면 판돈을 모두 가지게 되고, 그 이하일 때는 돈 건 사람들과 각각 윷을 놀아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밖에 윷놀이에는 모가 나면 엄지를, 윷이 나면 검지를, 걸이면 가운데 손가락, 개면 약손가락, 도면 새끼손가락을 꼽는 식으로, 먼저 다섯 손가락을 다 꼽는 편이 이기는 단순한 것이 있고, 또 윷치기라는 놀이도 있다. 

 윷을 던져 나오는 수에 의하여 1년 신수를 점치는 일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을 윷점[柶占]이라고 한다. 방법은 윷을 세 번 던져 나온 수를 가지고 미리 마련된 총 64 괘에 의하여 점을 치는 것이다. 

 윷을 던져 나온 수의 명칭은 도, 개, 걸, 윷, 모라고 부르는 것이 표준이지만, 도를 '토' 또는 '돼지'라고도 하며, 윷을 '숭' 또는 '중'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이것을 한자로 徒(刀), 介(開), 傑(杰), 뉵(流), 牡(牟) 등으로 표기하는 수도 있었다. 이 말에 대한 확실한 해명은 아직 없으나 대개 돼지(도), 개(개), 소(윷), 말(모) 등의 가축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윷놀이의 유래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한 사실은 찾아내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나무개비를 던져 승부를 다투는 유희로서 최고(最古)의 것으로는 중국의 격양(擊壤)이 있으며, 저포(樗蒲)도 비슷한 놀이이지만 윷놀이의 원형이라고 단안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몽고의 살한(撒罕)이라는 놀이는 윷놀이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민간의 전설로서는 신라 시대 궁녀들이 새해 초에 즐기던 놀이라고도 하고, 백제의 관직 명인 저가(猪加), 구가(狗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대사(大使)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고, 또는 고구려의 오가(五加; 동,서,남,북,중앙)에서 나온 것이라 하기도 한다. 이밖에 옛날 어느 장수가 적과 대진 중에 적군의 야습을 경게하여 진중 병사들의 잠을 막기 위하여 이 놀이를 창안하였다는 말도 전하고, 윷판은 초패왕 항우의 마지막 결전장이던 해하(垓下)의 진형(陣形)을 본뜬 것이라고도 하나 이들을 그대로 신빙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 있어 윷놀이는 대개의 다른 민속놀이와 마찬가지로 그 시발에 있어서는 신앙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즉 상대(上代)에는 세초(歲初)에 농민들은 그 사는 지역에 따라 한편은 산농(山農), 다른 한편은 수향(水鄕)으로 편을 갈라 이 놀이로 승부를 결하여 그 해 농사가 고지대와 저지대 중 어느 곳이 좋은가를 점친 것이었다. 후세에 그 본뜻이 없어지고 다만 오락의 방편으로 변하고 말았다.

 윷놀이에서는 그 진행중에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으나, 경상도 안동지방에서는 윷놀이를 저포(樗蒲)라 하고 저포송(樗蒲頌)이라는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안동지방에서는 다음과 같은 민요가 전하고 있다.

 

오록조록 포도런가 / 오실보실 앵도런가 / 공부장이 승도런가 / 맹부장이 장도런가 / 산천초목 분명하니 / 첫 도 적실하고 /

    인의예지 분명하니 / 지도자 적실하다 / 이개 저개 다 버리고 / 신무부제 차재경가 / 캐캐씨고 캐캐씨고 / 불언언지 효녀로다 /

      이캐머리 걸이졌네 / 컬컬하고 웃는 양은 / 제와문에 스승하니 / 요순우탕 호걸이요 / 도덕문에 스승하니 / 공맹안중 호걸이요 /

  화룡도 좁은 길에 / 이석조조 하였으니 / 관운장은 호걸이요 / 이겸으로 윷이졌네 / 육관대사 성진이는 / 팔선녀를 희롱하고 /

     백배사장 너른 들에 / 백학이 비상천은 / 두 나래를 훨씬펴고 / 앞다리를 성금성금 / 날아드는 격이로다 / 이개모로 모가졌네 /  

모양수가 진을 치면 / 영군의 대패로다 / 신가라의 첫날밤에 / 자지이불 당치마 / 가이 볼것 못쓸네라

 

                    # 연날리기

 정초에 청소년들의 놀이에 연날리기가 있다. 지방에 따라 12월 중순께부터 연날리기를 시작하나 대개 설날에서 보름 사이에 가장 많이 한다.

 연은 창호지나 백지와 죽목(竹木)으로 만든다. 종이를 의미의 크기로 접어 만드는 바, 대개 가로 두 자 세로 석 자 정도로 한다. 종이 중앙을 도려서 구멍을 내고 대나무 오본(五本)을 가늘게 깎아 뼈를 만들어 종이에 붙이며, 연 이마를 실로 졸라매어 반월형으로 하고 양쪽 머리와 아래 쪽 두 곳에 연실을 매어 바람에 날려 공중에 띄운다.

 연실을 '자새'에 감아 바람에 연이 나는 대로 실을 주었다 감았다 한다. 연은 바람에 떠야 하므로 중앙 구멍의 크기와, 이마를 실로 조이는 정도와 실을 매는 위치와 길이를 알맞게 해야 하는 바, 만드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잘 만들고 못만들고가 결정된다.

 연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채색을 하거나 화상(畵像)을 그리기도 하며, 점을 찍고 종이를 오려서 붙이기도 한다. 또 종이로 꼬리를 달아 바람에 나부끼게 하는 수도 있으니, 그 모양과 빛깔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연에 관한 최고의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중의 '김유신전'에 보인다. 

 선덕왕 16년이자 진덕왕 원년인 정미년(丁未年, 647)에, 대신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은 여왕으로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어 여왕을 폐위시키려 하였다. 이리하여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진을 치고, 왕을 지키는 군대는 월성(月城) 안에서 방어진을 치고 있으면서 10여일 동안 서로 공방전을 벌였으나 승패가 나지 안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밤중에 큰 별똥이 월성 안에 떨어졌다. 이것을 바라본 비담의 무리는 휘하 장병에게 말하기를, 별똥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유혈(流血)이 있다고 하니 이것은 바로 여왕이 패망할 조짐이라고 하였다. 그의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환호성을 올리니 천지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여왕은 이 함성을 듣고 대경실색하였다. 이때 왕사의 지휘관인 김유신장군이 여왕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인형을 만들어 이것을 큰 연에 매달아 불을 질러 올려보내니,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올라 가는 것같이 보였다. 다음날 김유신은 말을 놓아 어제 저녁에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되올라갔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적군의 장병들은 의아하여 동요하게 되고 마침내 패주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나라의 연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에서 찾을 만하고, 특히 연이 때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사적으로 이용된 또다른 전설은 최영장군에 얽힌 이야기이다. 민간에 전승된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옛날 고려 말의 명장 최영장군이 제주도를 정벌하였을 때의 일이다. 섬 주위(성주가 살고 있는 성벽이라고도 전한다)에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병사가 진군할 수 없었으므로 최영장군은 묘안을 생각해냈다. 즉 연 밑에 갈대씨를 담은 주머니를 달아 그 연을 높이 띄워 섬 주변 가시밭에 그 씨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그해 가을에 섬 주위는 마른 갈대로 뒤덮였으므로 여기 불을 질러 가시밭을 태워 마침내 상륙하여(성에 들어가서) 섬(성)을 점령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소년들을 소집하여 제각기 연을 날리게 하여 성안에 떨어뜨려 이것을 이용하여 줄을 대어 성중으로 기어올라가 성을 쳐부쉈다고도 한다. 

 전승(傳承)으로는 최영장군의 이 사실로 연의 기원을 삼고 있으나 물론 그런 것은 아니며, 다만 이런 전설을 통하여 연이 군사적으로 이용된 사실이 있었다는 시사를 받을 뿐이다. 

 연날리기가 도시에서는 난점이 있으나 농산어촌에 있어서는 청소년의 겨울 옥외 오락으로서 흥미있고 건전한 것이지만, 현대에 와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음은 서운한 일이다.

 

          # 널뛰기

 정초 부녀자들 놀이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정초 이외에 추석 단오 등 명절에도 노는 수가 많다. 젊은 부녀자, 특히 처녀들이 즐기는 스포오츠 취미의 놀이이다. 

 널뛰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고할 자료가 없고, 다만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여성은 매우 활발하여 기마(騎馬)의 풍습이 있었고, 또 격구(擊毬) 같은 경기도 하였으므로 역시 힘들고 활발한 이 널뛰기도 고려 여성의 호상(好尙)을 받았음직하다.

 전설에 의하면, 높은 담장 저편에 갇힌 옥중의 남편을 보려는 그 아내가 다른 수인(囚人)의 아내를 꾀어 둘이서 이 놀이를 하면서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기도 하고, 과거 사회의 여인들은 항상 울안에 갇힌 몸이었으므로 이 놀이를 창안하여 높이 올라갔을 때 담장 밖의 세상을 살피고, 외간 남자의 모습을 엿보기도 하였다 하나 모두 가당한 말은 아닐 것이다.

 널뛰기는 서양의 시이소우(seesaw)와 어느 면에서 비슷하지만 피차의 교류 내지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우며, 다만 유구(琉球)의 판무희(板舞戱)라는 것은 우리 나라의 널뛰기와 흡사한 바, 고려시대 피아간의 교통이 비교적 빈번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우리의 것이 유구로 전파된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梁在淵 任東權 張德順 崔吉城 共編 韓國風俗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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