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時風俗

전승놀이 및 오락-바둑/장기

如岡園 2010. 12. 10. 14:14

          # 바둑

 바둑은 한문으로 기(棋), 혁(奕) 또는 위기(圍棋)라고 하며, 이것을 우리말로 '바둑'이라고 부르는 연유는 잘 알 수 없다.

 바둑은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며 요순(堯舜)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그 유래는 오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 전래된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바둑의 명수가 정치적 내지 군사적인 이면공작의 한 수단으로 원용되었으며 일반에서도 성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전당시(全唐時)에 보면 당에 유학한 학자, 명승 중 바둑의 명수가 많았던 듯하며, 향가 원수가(怨樹歌)에 얽힌 신충(信忠)과 잠저(潛邸)시의 효성왕(孝成王)과의 우의(友誼)도 바둑이 큰 구실을 하였던 것 같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바둑은 문인, 학자의 애호를 받았으며 이규보, 진엽, 혜문 등의 관기시(觀棋詩) 수십 수가 전하는 바, 특히 이규보에는 신동국수시(神童國手詩)도 있다. 또 고려가요 중의 예성강곡(禮成江曲)은 내기 바둑을 두어 아내를 중국 상인에게 빼앗긴 한 시정인과 그 아내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왕조 시대에 있어서도 바둑은 국민 상하가 즐기던 가장 보편적인 실내오락이었다. 왕가에서는 세종, 세조가 바둑을 사랑하고, 특히 세조는 오행위기법(五行圍棋法)을 친제하였으며, 왕자로서는 안평대군, 봉래군, 덕원군 등이 유명하고, 명종대의 유희춘, 숙종대의 윤홍임과 영정간의 이필, 김종귀, 김한흥, 고동, 이학규 등이 국수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조선 말엽에 지우연, 김만수, 백남규, 윤경문, 서병오 등이 이름을 떨쳤다.

 이와같이 바둑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실내오락의 하나로서 전승되었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가장 대중적인 오락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바둑과 현재의 그것은 기법(技法)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가 있다. 즉 종래의 바둑에 있어서는 먼저 정석(定石)을 배치한 다음 시작하는데 현재는 그것이 없으며, 판이 끝난 뒤에 집을 헤아리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동(異同)이 있다. 현재의 방법은 이른바 일본바둑이라 하여 일본의 바둑방식을 따른 것이며, 종래의 이른바 조선바둑을 두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바둑 알도 과거에는 백(白)은 조개껍질을 부셔서 적당한 크기로 갈아 만든 것이며 흑(黑)은 검고 매끄러운 조약돌을 사용하였으며, 바둑판도 오늘날의 것과는 만든 제도가 다르다. 이런 것들도 현재는 별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 바둑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는 하였으나 사대부나 양반층의 주로 점잖은 인사들이 즐기었으며, 평민들이 두는 경우는 드물었고 지역적으로는 영남지방이 성하였다.

 

          # 장기

 장기는 바둑과 아울러 민중오락의 표본이 될 만한 것이지만 역시 그 연원은 자세하지 못하다. 장기는 한자로 '將棋'라고 표기되지만, 대개 이것은 조선왕조 중기 이후의 일로 보고 있으며 그 이전에는 주로 상희(象戱)라고 표현되었다. 상희라는 말은 물론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며, 상희 이외에 상기(象棋), 상혁(象奕) 등으로도 호칭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주 무왕이 상희를 친제하였다 하고, 후주(後周)의 유신(庾信)은 상희부(象戱賦)를 지었는 바, 이 상희는 이른바 장기와 내용이 같지 않은 듯하며, 당대(唐代) 이후 현재와 비슷한 놀이로 변하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대개 고려시대에 전래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수백 년 전승되는 동안에 피차간 놀이의 방법에 다소 차등을 보이게 되었으나 그 대강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도 장기라는 놀이가 있어 그 기원은 우리나라에 있다고 보여지나 노는 방법은 매우 다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세조실록(世祖實錄)> 등에는 상희라는 표현 아래 장기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고, 중종대(中宗代) 심수경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잡기(雜技)를 설명하는 가운데 비로소 장기라는 말이 나오고 이를 설명하기를 "장기는 車 包 馬 象 士 卒을 사용하며, 나무를 갈아서 거기에 글자를 새긴 후 채색한다" 라고 하였다.

 이밖에 장기에 관한 문헌으로서는 선조대 장유의 <상희지(象戱志)>가 있고, 장기의 명수로는 <식소록(識小錄)>에 전하는 금강산 백전암(白田庵)의 중 지암(知巖)이 있고, 또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소개된 종실 서천령(西川令)이 유명하여 '서천령수법'이라는 묘법을 남겼다고 한다.

 장기는 바둑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보편적 대중오락이지만 여러 면에서 바둑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바둑이 조용하고 점잖은 놀이인데 대하여 장기는 활발하고 서민적인 놀이이다. 그리고 바둑은 대개 실내에서 두게 되지만 장기는 옥외에서 많이 둔다. 특히 무더운 한여름 서늘한 정자나무 아래에서 반나의 노인들이 장기판을 둘러싸고 흥겨워하는 것은 우리나라 전원풍경의 한 장면을 이루어왔다.

 장기는 장기판과 장기씨(흔히 말이라고 한다)가 있어야 된다. 장기판은 대략 바둑판과 비슷한 크기의 목판을 사용하며, 장기씨는 종래 주로 회양목으로 만들었다. 車 馬 象 包 卒 등 글자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두 가지로 새기며, 해서는 홍색 초서는 청색으로 채색하고, 노홍소청(老紅少靑)이라 하여 연장자가 홍색의 장기씨를 차지한다. 장기씨의 크기는 車 馬 象 包 등이 같고, 士 卒은 이보다 작으며 장군(將軍)은 가장 크다. 장군은 홍군은 漢, 청군은 楚 자를 새기는데, 이는 '팔년풍진초한전(八年風陳楚漢戰)'을 본뜬 것이다. 장기씨의 형체는 나무의 생김새대로 잘라서 만들었으므로 대체의 크기는 같으나 모양이 다양하였으며, 때로는 육각형으로 다듬어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는 대개 기계로 둥글게 제조되어 균형미는 있다 하겠으나 아취는 오히려 재래의 것이 월등하다.

                                                                       

                                                                                                 (梁在淵외 3인 共編 韓國風俗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