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의 세계

라 퐁떼느 우화6) 원숭이와 고양이/이리와 여우와 원숭이/해면을 진 나귀와 소금을 진 나귀

如岡園 2011. 6. 10. 23:26

          # 원숭이와 고양이

 원숭이와 고양이가 주인의 귀여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원숭이는 무엇이든지 훔쳐냈고 고양이는 쥐를 잡는 것이 아니라 치즈를 노렸다. 

 어느 날이었다. 이 원숭이와 고양이는 화롯불에 밤을 굽는 것을 쳐다 보고 있었다. 

 먹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불 속에 있는 밤을 어떻게 줏어내야 될 것인지 궁리를 했다.

 간사스런 원숭이는 고양이를 추켜 올리면서 간계를 꾸몄다. 

 "네 솜씨를 보여 줄 때는 바로 오늘이다. 만일 하느님이 불 속에 든 밤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나를 만들어 주셨드라면 모조리 꺼내어 먹어 버릴 텐데......"

 고양이는 기분이 우쭐했다. 

 화로 속의 재를 조금씩 파헤치고 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나...둘...셋... 그러나 나오는 쪽쪽 원숭이는 줏어 먹었다. 고양이는 몹시 불쾌했다. 그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였다. 식모가 나타났다. 둘은 엉겁결에 도망치고 말았다. 

 - 이 얘기는 다른 사람이 추켜 주는 바람에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하였으나 그 이익은 몽땅 빼앗기게 된 호인을 풍자한 우화다. 

 

          # 이리와 여우와 원숭이

 이리가 도둑을 맞았다고 했다. 이웃집 여우가 의심을 받고 재판소에 끌려나왔다. 여우는 평소부터 손버릇이 나빴기 때문이다. 

 재판관은 원숭이였다.

 이리와 여우는 변호인 없이 저희들의 색다른 주장을 앞세웠다. 원숭이는 명판관으로 유명한 여신 테미스라도 이처럼 어려운 사건은 판결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덤덤히 재판관 자리에 버티어 앉았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리와 여우는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고성과 욕설로 거래하였다. 원숭이는 둘 다 똑같이 교활한 놈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나는 옛날부터 너희들을 잘 알고 있다. 너희들은 둘 다 벌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리는 사실 아무 것도 도난 당한 것이 없으면서도 거짓신고를 했기 때문이며, 여우는 이번 고소 당한 것은 예전에 그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재판관 원숭이의 생각은 이 판결이 엉터리 같기는 했다. 그러나 나쁜 놈들을 벌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도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해면(海綿)을 진 나귀와 소금을 진 나귀

 나귀 두 마리를 몰고 가는 상인이 있었다. 한 마리에는 해면을 실어서 가벼워 보였으나 다른 한 마리에는 소금을 실어서 무거워 보였다. 이 상인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서 가다가 한 개울을 만나 걸음을 멈췄다. 개울을 건너자면 부득이 나귀를 타야 되기 때문이었다. 

 상인은 가벼운 해면을 실은 나귀 위에 올라탔다. 소금을 실은 나귀는 앞서 개울을 건느기 시작했다. 수심이 점점 깊은 곳으로 나귀는 걸어갔다. 그리하여 나귀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개울을 건너갔다. 그 무거운 소금은 물 속에서 녹아버렸다. 나귀는 가벼워 보였다. 이것을 보고 있던 해면을 진 나귀는 등에 주인까지 업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소금을 진 나귀가 물에 소금을 녹여버리고 홀가분하게 된 것을 보고 자기도 수심이 있는 곳으로 골라가며 물이 목까지 이르는 데에 왔다. 그러나 물먹은 해면은 먼저보다 몇 갑절로 무거웠다. 그리하여 나귀는 꼼짝할 수 없었다.

 "사람 살려 주시오"

 상인은 나귀를 탄채 물속에서 외쳤다.

 개울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광경을 보았다. 자기꾀에 속아 넘어간 나귀를 보고 모두 웃었다. 구경군들과 힘을 합하여 상인은 온갖 고생을 치르며 간신히 물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귀도 끌어 올렸다.

 - 남의 흉내를 내다가 온갖 고생을 치르게 된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려 주는 좋은 우화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자. 하나의 창조성도 없이 모방에만 골몰하는 인간군이 그 얼마나 되는가.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타인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또 그 얼마나 인간에게 해를 주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도 숱하게 있었지만 결국은 개울가의 구경군에게 웃음을 샀던 것처럼 후세사람들에게 조소를 받았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없는가? 단언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