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리를 잘린 여우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약고 꾀많은 여우였다. 그러니까 병아리잡이로나 토끼사냥으로나 남 못지 않게 유명했고 십리 밖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이 여우가 한 번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 덫에서 몸은 빠져 나왔으나 꼬리는 냉큼 잘리고 말았다. 살기는 살았으나 꼬리가 끊어져서 남부끄러워 밖엘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늙은 여우는 새로이 꾀를 생각해 냈다. (다른 여우들의 꼬리를 죄다 없애버린다면......). 물론 여우의 꼬리가 당초에 없었다는 약은 지론은 성립될지 모른다. 하지만 깊이 있는 사고방식은 못되었다.
어느 날, 여우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늙고 꾀많은 여우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동포들이여, 그 무겁기만 한 꼬리를, 아무 소용 없는 그 꼬리를 달고 다녀서 대체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진흙투성이의 거리를 빗자루처럼 쓸며 다니겠다는 거요? 이 꼬리라는 건 아무 쓸모 없는 물건이오. 이걸 잘라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다니는 것이 어떻소. 내 말이 옳다고 믿는 이는 곧 꼬리를 자르시오."
늙은 여우의 말이 끝나자 한 여우가 입을 열었다.
"늙은이여, 그럴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늙은이의 꼬리맵시를 한 번 보여 주십시오. 자르고 안 자르는 건 그 다음에 의논합시다."
이 말이 떨어지자 모여 앉은 여우들은 쌍수를 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늙은 여우의 잔꾀에 넘어가는 여우는 하나도 없었다. 그때 꼬리를 자르자는 제안이 일소에 부쳐져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우에게는 긴 꼬리가 붙어다니고 있다.
- 잔꾀는 깊이가 없다. 미구에 그 계략이 마각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잔꾀는 남을 속이는 게 아니라 자기를 기만하는 수작이다.
# 광에 들어간 족제비
허리가 길죽하고 날씬하게 생긴 족제비가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광으로 들어갔다. 족제비는 마침 병을 앓고 난 뒤였다. 광에서 맛있는 것을 실컷 먹어치웠다.
그리하여 마음도 편히 며칠을 잘 먹고 지냈다. 자연히 살이 안 찔 수 없었다. 몸이 뚱뚱해지기 시작하였다. 온몸에 기름끼가 돌고 살이 토실토실하게 불어났다.
한 주일이 흘러간 그 어느 날이었다. 족제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 때 사람의 소리가 족제비의 귓전을 울렸다. 주인이 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족제비는 부랴부랴 처음 들어온 구멍을 찾아 달아나려고 애썼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올 때의 쉬움과는 반대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머리를 밀어 보기도 했고 몸을 조아보기도 했다. 모두 실패였다. 족제비는 전날 들어온 구멍보다 작은 것이라 생각하고 광 속을 이리저리 헤매어 다녔다.
"틀림없이 이 구멍으로 들어왔는데 그 동안 좁아진 것일까?"
족제비의 독백을 엿듣고 있던 쥐란 놈이 구멍에서 머리만 불쑥 내밀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그땐 아저씨가 지금보다 훨씬 날씬했지요. 여윈 몸으로 들어온 이는 다시 여윈 몸으로 나가야지요."
- 올챙이쩍 기억을 좀 단단히 하라는 충고다.
# 독수리와 부엉이
독수리와 부엉이는 곧잘 싸웠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은 일단 휴전을 하고 서로 곱게 입맞추었다. 그리고 상대편의 새끼를 잡아 먹지 않는다는 상호협정을 맺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왕의 명예를 걸고 부엉이는 제 족속의 명예를 두고 굳게 굳게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부엉이는 독수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독수리님은 내 아기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아니."
"그럼 지금 약속도 믿을 수 없지 않습니까? 내 귀여운 아기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려면 얼굴이라도 알아야 되지 않을까요. 독수리님은 새 중의 왕인지라 다른 새들은 하나하나 기억해 두시지 않으면 내 아기를 어디서 만나 큰 사고를 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럼 자네 아기들의 모습을 잘 말해 주게, 그렇지 않으면 내 눈으로 확실히 보게 해 주게, 그러면 평생 자네 아기들을 절대로 잡아 먹지 않을 걸세."
부엉이는 곧 제 새끼의 모습을 말해 주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주 귀엽고 잘 생겨서 마을에서는 이쁜이로 통하지요.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다른 아기들과는 구별될 겁니다. 아무쪼록 잊지 마시고 우리 아기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며칠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무렵이었다. 독수리는 먹이를 찾아 나왔다가 험한 바위들이 있는 곳에서 괴상한 꼴을 한 날짐승을 발견했다. 그 날짐승은 얼굴을 찡그리고 불쾌한 울음을 늘어 놓고 있었다.
(이 새들은 못생겼으니 내 친구 부엉이의 아기들은 아니겠지......)
독수리는 그 새들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한편 부엉이는 외출했다가 다시 귀가하자 깜짝 놀라자빠졌다. 사랑하는 새끼들은 하나도 없었고 여기저기 연약한 뼈다귀만 깔려 있었다.
부엉이는 하느님께 빌었다.
"이런 나쁜 짓만하는 악한에게 벌을 주소서......"
그 때 어디선지 이런 소리가 부엉이의 귓전에 울렸다.
"저주하려겨든 제 자신을 저주하라, 그러기도 싫거든 제 자식이 누구보다 귀엽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버릇을 저주하라. 너는 독수리에게 제 새끼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었지마는 그게 어디 사실과 닮은 정확한 이야기였드냐."
- 자식사랑의 과대망상을 충고한 우화 한 토막.
* 라 퐁떼느 우화집
프랑스 작가 라 퐁떼느(1621~1695)가 30년 이상에 걸쳐서 쓴 240편의 우화. 전부 12권으로 3회에 걸쳐서 간행되었다. 우화라는 형식으로 여러가지 소재를 다루어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하면서 동시에 교훈을 통해서 교화코저 하며, 특히 이솝의 우화가 많이 나오고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여우 이야기>가 유명하다. 라 퐁떼느는 주제를, 이솝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에게서 구했지마는 이 문학 형식을 예술 작품으로서 완성한 것이다.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 사는 모든 신분의 사람들- 모든 인간의 성격을 맵시있게 그려내고 있다. 동물의 모습을 통해 묘사된 그 표현은 동물의 특징을 인간의 특징과 묘하게 연결하고 있다. 고전주의 시대의 예술 이념을 지키면서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주장하여 후에 루소나 라마르티느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유용한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라 퐁떼느의 우화집은 모든 세대의 프랑스 인에게 사랑받고 어린이가 애송하는 국민적인 문화유산이 되어 있다.
그는 동물을 단순한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동물 그 자체로서 살아 있는 등장인물을 창조하였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우리 눈앞에서 달리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였다. 동물의 외관이나 그 행동거지나 색채를 묘사하는 데는 아주 정확하다. 동물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중요한 특징을 볼 줄 알며, 그것을 잘 나타낼 줄 안다. 그는 동물의 전통적 성격을 재검토하려 하지는 않는다. 여우에게는 교활성을, 나귀에게는 소박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동물관의 특이점은 동물을 기계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점이다. 느끼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할 줄 아는, 서로 사랑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良識도 있고 절도도 있는 인간같은 동물. 이런 동물들은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직접 등장될 때도 있다.
그는 인간에게서 결점과 탐욕과 배은과 악의와 에고이즘을 보고 있다. 어린이는 심술궂고, 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결점을 인간의 속성으로 믿고 있을 뿐이다.
그는 도덕을 암시할 생각은 없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이다. 그는 현실의 죄를 허용하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을 마음 속으로 개탄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강한 자의 주장이 언제나 옳은 도리다' 라는 것을 슬프게 여기면서도 라브뤼에르나 몽떼스뀌 모양 제도를 비난하거나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여,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말고 남에게 속지도 않도록 자신을 구제해 나가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삶의 성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實用道德에서부터 죽음을 준비하고 자손을 생각해야 한다는 理想道德의 매우 높은 교훈까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퐁떼느의 시적우화는 작자 자신이 그 서문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 각자가 모두 자기의 肖像을 발견하는 畵帖'이 됨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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