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禮 省墓 告祀
음력 8월 보름날을 속칭 秋夕 또는 가윗날(嘉俳日), 한가위라고도 한다. 그런데 8월 15일을 中秋 또는 秋中이라고 하지 않고 특히 秋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날의 인상 깊은 月夕에 관련시켜 명명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嘉俳日이라는 한자어는 신라 이래의 우리 고유의 말 '가배'를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이 날 행사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 우리 고유성이 짙은 명절이라고 생각된다.
당나라 문종(827~40) 때 입당했던 日僧 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산동 지방에 머무르고 있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보고 적은 대목에서 "8월 15일의 명절 놀이는 오직 신라에만 있는데, 그 곳 노승의 말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 날이 발해와 싸워 이긴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그 날을 명절로 삼고 일반 백성들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고 가무(歌舞)로써 즐겁게 노는 것인데, 이 절 역시 신라 사람의 절이므로 그 고국을 그리워하여 8월 15일 명절 놀이를 한다" 고 하였다.
추석 명절이 우리 나라 고유의 큰 명절로서 오래 됨이 이것으로서도 방증되거니와 민속학적인 문제로서도 추석의 민속은 더욱 구명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삼국사기 권제1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 9년조에 보면 가윗날(嘉俳日) 유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왕은 이미 六部를 정한 후에 이를 두 패로 가르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가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편을 갈라 7월 16일부터 날마다 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는데, 밤 늦게야 일을 파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살펴 가지고는 진 편에서는 酒食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이 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서 춤을 추면서 탄식하되 '회소(會蘇) 회소'라고 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 아담하였으므로 뒷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 노래를 지어 會蘇曲이라고 이름하였다.
동국세시기의 저자는 "우리 나라 풍속에 지금도 이를 행한다" 고 한 것은 7월 행사에서 소개한 바 있는 '두레삼'을 가르키는 것 같다.
고려 가요 動動에는,
八月 보르만
아으 嘉俳나리마란
니믈 뫼셔 녀곤
오날날 嘉俳삿다
아으 動動다리
라고 있어 신라 초에 비롯된 가위(嘉俳)란 말이 고려 시대에도 씌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思親歌나 농가월령가에 秋夕이란 말이 보인다.
열양세시기에도 8월에는 온갖 곡물이 성숙하고, 中秋라 가히 가절이라 할 만한 고로 민간에서는 가장 이 날을 중요하게 여긴다. 비록 아무리 벽촌의 가난한 집안에서라도 예에 따라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찬도 만들며, 또 온갖 과일을 풍성하게 차려 놓고 즐거이 놀면서 하는 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바란다"고 한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에도 절식(節食)으로 햅쌀술과 송편과 무우와 호박을 섞은 시루떡을 말했지만 이들은 토란국과 함께 지금도 추석에 없지 못할 시절 음식이다.
또 열양세시기에는 사대부의 집에서는 설날, 한식, 중추, 동지의 네 명절에는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바, 설날과 동지에는 혹 안 지내는 수가 있으나, 한식과 중추에는 성대히 지내고, 한식보다 중추에 더 풍성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지금도 추석 성묘는 일년 중 제일 중요한 행사임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다. 산소의 잡초는 대체로 추석 전날이나 2~3일 전에 베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 날 아침 햇곡식으로 메와 떡을 지어 주찬(酒饌)을 갖추어서 추석 茶禮를 지내는데 이것을 천신(薦新)이라고 한다. 또 이 날 새 옷이나 입던 옷을 깨끗이 손질하여 입는 것을 추석빔이라고 한다. 성묘는 한식과 추석에 가장 성하였다.
조상에 대한 차례와 성묘뿐만이 아니라 햇곡식으로 떡과 음식을 장만하여 집의 수호신인 성주모시기를 하는 곳도 있다. 보통 10월 상달에 安宅 고사를 지내지만 이 달에 성주모시기, 배고사, 시준단지갈기를 하는 곳도 있다.
성주모시기는 먼저 음식 즉 제수(祭需)를 장광에다 놓았다가 다음에 방 웃목이나 한 쪽 옆에 놓고 그 집 안주인이 성주에게 가내 태평을 공손히 빈다.
호남 일대에서는 햇곡식이 익으면 쌀 한 되 가량 장만할 만큼 베어 내서 짚채로 실로 매어 방 문 앞에 달아 놓고 절을 하기도 하며, 음식을 장만해서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비농가에서도 이렇게 하는 수가 많다. 또 햇나락을 베어다가 선영에 제사지내고 쪄 말려서 샘, 당산, 마당, 곡간 등에 받쳐 놓기도 한다. 이것을 올개심리(올이심리)라고 한다.
또 농가에서는 추석 비를 대단히 꺼려 이 날 비가 오면 이듬해에 보리 농사가 흉년이 진다고 한다. 松南雜識 권1 歲時類 視月孕胎傳條에도 "쇄碎錄에 이렀으되 중추, 즉 추석날에 달이 없으면 토끼는 포태를 못하고, 민물조개도 포태를 못하고 메밀도 결실을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신통하게도 月動物(lunar animal)에 관한 속신과도 부합되는 이야기다.
추석놀이
上元놀이가 예축의례(豫祝儀禮)와 관련되고 단오놀이가 성장의례(成長儀禮)와 관련된다면 추석놀이는 수확의례(收穫儀禮)와 관련된 행사들이다. 특히 상원과 추석에 반복되는 놀이에 거북놀이, 소멕이놀이, 줄다리기, 사자놀이, 지신밟기(農樂, 乞粒, 埋鬼) 등이 있다.
소멕이놀이는 장정 두 사람이 엉덩이를 맞대고 엎드린 위에 멍석을 뒤집어 쓰고 앞 사람은 고무래 두 개를 양팔에 하나씩 갈라 쥐고 뒷사람은 작대기를 흔들어 뿔과 꼬리를 가장하고 소가 되면, 앞뒤로 주인과 머슴을 가장한 사람들이 소를 몰고 밤 늦게까지 마을을 돌며 부유한 집에 가면 '엄메 엄메'하고 소울음을 하고 "옆집의 누렁 소가 평생에 즐기는 싸리꼬챙이와 뜨물이 먹고 싶어 왔으니 내놓으시오" 하고 외치면 그 집 주인은 산적과 술을 내놓는다. 이 때 농악대가 따르며 소가 여러가지 동작과 춤을 보이고 농악에 맞추어 일동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동리를 돌아다닌다. 이 놀이를 하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것은 황해도의 예이지만 경기 충청도의 소멕이놀이도 거의 같다.
거북이놀이는 소 대신 거북을 썼고 멍석 대신에 수숫대 잎이나 짚을 써서 거북의 모양을 만든다. 거북놀이도 소멕이놀이처럼 기호지방에서 상원과 추석에 놀았고 거북의 장수에 곁들여 장수 무병을 빌고 동리의 잡귀 잡신을 쫓는다고 하는데 거북은 수신을 나타내는 영수(靈獸)임을 생각할 때 이 거북놀이도 소멕이놀이와 마찬가지로 농신에 관련된 기풍행사(祈豊行事)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또 상원의 예축의례로서뿐만 아니라 추석의 수확의례에서도 기풍의 목적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음을 본다.
소멕이놀이는 경기도 양주 지방에 현존하는 소놀이굿의 소와 마부와 그 모양이 비슷하다. 소놀이굿은 이 원초적인 형태인 소멕이놀이와 거북놀이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양주소놀이굿은 소놀이굿, 소놀음굿, 소굿, 쇠굿, 마부타령굿 등 여러가지로 불리나 농사나 사업이나 장사가 잘 되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빌어 행하는 경사굿의 일종이며 경기지방 열두거리 중의 하나인 제석거리에 이어 하나의 제차(祭次)로, 주로 추수 후에 많이 논다.
무당은 제석거리 때의 복색 그대로 마루에 안마당을 향해서 서고 잡이(樂士)들은 무악반주를 위하여 역시 안마당을 향해 마루에 앉고 이 놀이의 주인공들인 원마부와 곁마부는 마루 앞 봉당에 선다. 앞마당에는 멍석을 뒤집어 쓰고 고무래를 짚으로 싸서 머리를 만든 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온다. 이와같이 소놀이굿의 무대는 이제까지의 굿의 주무대였던 마루에서 봉당과 앞마당으로 옮겨지고, 주역이 또한 무당으로부터 마부로 바뀐다. 소놀이굿의 진행은 무당과 마부와의 대화, 마부의 타령과 덕담, 마부의 동작과 춤, 소의 동작 등으로 엮어지며, 연희로서의 구성을 갖추었다.
무의(舞儀,굿)나 판소리가 형식상 거의 무당과 광대의 독연형식(獨演形式)인 데 비하여 소놀이굿은 마부와 무당과의 대화형식으로 진행되며 무당과 악사, 마부와 곁마부, 가장(假裝)한 소의 주요 배역과 많은 구경군의 참여로서 이루어진다. 마부의 마부타령은 훌륭한 장편서사가요의 민속예술적 가창이다.
이들 추석놀이의 분포를 보면 소멕이놀이는 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황해도 등 중서부 지방에, 거북놀이는 경기, 충청남북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 사자놀이는 경기, 강원도 이북의 중부 이북 지방에, 그리고 농악(지신밟기, 埋鬼, 혹은 乞粒)은 충청도지방 이남의 영남과 호남지방에 성하다.
동국세시기에는 제주도의 조리지희(照里之戱)라는 줄다리기를 소개하고 있다.
제주도 풍속에 매년 8월 보름날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좌우로 편을 갈라 큰줄의 양쪽을 잡아당겨 승부를 겨룬다. 줄이 만약 중간에서 끊어지면 양편이 모두 땅에 엎어진다. 구경군들이 크게 웃는다. 이를 조리지희라 한다 이 날 또한 그네도 뛰고 포계지희(捕鷄之戱)도 한다.
이밖에 보름날 각 지방에서는 씨름대회를 하고 또 전남지방의 남해안 일대에서는 부녀자의 특유한 유희로 강강술래가 있다. 그러나 단순한 유희라기보다 오히려 원무형식을 취한 무용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날 밤 곱게 단장한 마을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모여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는 노래를 부르며 뛰노는 놀이이다. 대개는 추석날뿐만 아니라 연일 놀게 되는데 그 동네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의 마당을 매일 바꾸어 가면서 빌리고 그 마당 임자의 집에서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 노래의 하나를 보기로 들면 다음과 같다.
달아달아 밝은달아 강강술래
이태백이 노든달아 강강술래
저기저기 저달속에 강강술래
계수나무 박혔으니 강강술래
은도끼로 찍어내어 강강술래
금도끼로 다듬어서 강강술래
초가삼간 집을짓고 강강술래
양친부모 모셔다가 강강술래
천년만년 살고지고 강강술래
천년만년 살고지고 강강술래
양친부모 모셔다가 강강술래
천년만년 살고지고 강강술래 (완도지방)
대체로 4,4조로 되어 있으며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맨 앞에 서서 선창을 하거나 원의 가운데에 들어가서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라고 뒷소리를 후렴으로 부르면서 원무를 한다. 이 때에 처음에는 진양조로 느리게 춤을 추다가 차츰 빨라져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변하고 선도자에 따라 여러가지 변화 있는 춤으로 발전하고 힘이 지칠 때까지 춘다.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충무공이 임진왜란 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지었다고 하고, '강강수월래'는 '强羌水越來' 또는 '强羌隨月來'라기도 하나 이것은 하나의 부회설(附會說)이고, 예로부터 있어 오던 영월(迎月)과 수확의례(收穫儀禮)의 농민원무(農民圓舞)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이 놀이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영남지방에서 남자들에 의해서 추어지는 '쾌지나칭칭나네'가 있고, 안동지방의 상원(上元)의 '놋다리밟기'가 있다. (李杜鉉, 韓國民俗學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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