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운명과 사주 - 홍만종/순오지

如岡園 2011. 10. 1. 12:21

 운명을 짐작한 서적을 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오행(五行), 성명 학문인 자평(子平), 점성술인 성요(星耀), 천문학인 자미(紫微)라고 하는 여러 가지 논설이 길흉에 부합되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 봤더니 갑자년 정월 초하루 자시(子時)로부터 계해년(癸亥年) 섣달 그믐날 해시(亥時)까지의 사이에 윤달 또는 크고 작은 달이 있다고 하여도 그대로 한 돌을 지나면 그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적어도 25만 9천 2백 명(그 당시 인구추세)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명경술수(明鏡術數)에 보면 시간마다 각각 초중말(初中末)로 나누어져 세 곱이나 그 수효가 많아도 77만 7천 6백 명이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온 천하에 숱하게 태어나는 사람들은 동년 동월 동일 동시에 태어나는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수명과 궁달(窮達)이 꼭 같게 되는지 그게 가장 의심스럽다.

 옛날의 당요(唐堯)와 단구자(丹丘子)는 동년 동월 동일 동시에 태어났기 때문에 당요는 자기가 차지하려는 천하를 단구자가 방해할까 두려워서 칼을 숨기고 단구자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훗날 당요는 천자가 되고 단구자는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또 송나라의 태조는 진도남(陳圖南)과는 같은 나이요,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 도남은 화산(華山)에 살다가 천하를 얻을 포부를 품고 산문 밖을 나오다가 이미 조점검(趙點檢)이 천자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박장대소하고는 타고 오던 나귀를 돌려 화산으로 돌아가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대개 인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천자이건만 그것은 역대의 운수가 그리 되도록 마련되어 있고, 단구자나 진도남은 하늘에서 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도를 닦고 신선이 되어 이 만승 천자(萬乘天子)에 굴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제왕의 업적과 신선의 도술은 비록 같지는 않으나 위치의 높음을 따진다면 인간의 제왕이나 천상의 신선이 균등하다 할 것이다.

 내가 근대에 황명소설(皇明小說)을 보니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고황제(高皇帝)가 운명이란 말을 증명코자 하여 술객(術客)에게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자기와 같은 동갑(同甲)이 있거든 궁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어느 날 동갑된 사람이 왔으므로 고황제가 너는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시골의 한 백성이라고 했다. 왕이 그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전답이라고는 한 이랑도 없이 사는 가난뱅이라고 했다. 왕이, 그러면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는 다른 수입은 없고, 다만 벌[蜂]을 열 세 통 치고 있는데 거기에서 꿀을 따서 겨우 연명해 나간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웃으면서 역시 그렇구나, 나는 임금이 되어서 내 밑으로 13성(省)을 두고 다스리고 있는데 너는 백성이 되어 열 세 통 벌을 치고 있으니 너도 황제라고는 할 수 있겠다. 벌이란 임금이 벌통마다 하나씩 있게 되니 비록 크기는 같지 않으나 다같이 통치하는 데는 다를 바가 없겠다. 그러니 이 운명을 누가 감히 미신(迷信)이라고 하며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고는 자기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그 백성에게 술과 밥을 주어 후히 대접했다.

 

라는 내용이었다.

 또 내가 들은 일설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는 자기 동갑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자 한 사람이 궐내로 들어왔으므로 평생의 일을 낱낱이 물어보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고 미천한 거지로 떠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이말을 들은 명나라 태조는,

 "나는 천자의 몸이 되고, 너는 거지의 몸이 되었으니 무엇 때문에 같은 사주(四柱)를 타고나서 이렇게 다르게 살수 있단 말이냐."

하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저는 밤마다 꿈속에서 천자가 되어 궁궐과 성곽, 종묘와 백관의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을 보는 것이 폐하가 생시에 천자노릇 하시는 것이나 같습니다."

 명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찡그리고 화난 듯 말했다.

 "천하에 운명이 있다는 말을 거역할 수는 없나보다. 낮에는 양(陽)이며 밤에는 음(陰)이 되는 법인데, 나는 이 세상을 좇아서 만승 천자의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되고, 너는 귀신의 세계를 좇아서 남면(南面)하는 낙을 누리게 되니, 내가 낮일 때는 너는 밤이었고 네가 낮일 때는 내가 곧 밤이었구나. 생각해보니 하늘은 나에게 양계(陽界)를 주장하게 하고 너는 음계(陰界)를 주장하게 한 것인가 보다."

하면서 그를 후히 대접하여 보냈다고 한다.

 또 내가 가만히 돌이켜보니 광해조 때 사람인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五山說林>에 씌어 있길, 우리나라의 성종(成宗)께서 길일의 선택을 받은 천관으로 하여금 자기와 같은 나이의 사람을 찾도록 나라 안에다 지시를 내렸다.

 한 여인이 상한(常漢)에 있는데 집안이 성도에서는 제일 갑부였다. 그 여인의 생년 생월 생시가 성종과 다름이 없었다. 

 성종은 궐내로 그 여인을 불러들였다.

 "너의 평생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들어보고 싶구나."

 "저는 미천한 몸인데 어찌 고락이 있겠사옵니까. 아버지께서 제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예리하다고 특별히 사랑해주셨고,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종 값을 속량하고 주인 집에서 어진 남편을 구해서 시집을 보내주셨사옵니다. 그러나 졸지에 남편을 잃고 혼자의 몸이 된 지금은 역사와 책을 보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성종이 그 여인에게 더 상세하게 물어보자, 성종이 즉위하던 바로 그 해에 종을 면하고, 그가 지아비를 잃은 날짜는 곧 왕비가 세상을 떠나시던 때였다. 성종은 몹시 기이하게 여겨 다시 물었다.

 "그대의 과거와 나의 경력이 비슷하구나. 그러니 세상에 운명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말을 한 성종은 웃고 나더니 다시 말을 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다시 물어보겠는데, 지금 나는 수십 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있는데 너도 후궁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

하고 물으니 그 여인도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말씀을 드리기가 송구스럽사오나 저는 원래부터 복잡하고 사치한 것을 좋아해서 남첩(男妾)을 둔 무후(武后)와 마찬가지로 저도 12,3명의 남첩을 두고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박장대소를 했다.

 "이런 것까지 같았으니 남자 중에는 과연 내가 있고, 여자 중에는 네가 있다고 하겠구나."

 이렇게 말한 성종은 여인에게 물건을 후히 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도 13성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것이나 13통 벌을 가지고 꿀을 치는 것이 같았고, 양계의 만승과 음계의 만승이 서로 같았으며, 거기다가 성종이 왕위에 오르시던 해에 여인이 종살이를 면하고 평민이 된 것과, 또 왕비가 죽던 바로 그 해에 지아비를 잃은 것이 같으며, 후궁을 수십 명이나 둔 것에 비해 남첩이 10여 명이 있는, 그 대소와 음양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점이 많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닐쏘냐.

 아아, 나아가는 술법이 생긴 다음부터 세상에선 모든 길흉과 운명에만 맡기기고 말았다.

 성인이 충언하기를

 "복이나 화는 모두 자기 스스로 구하는 것이다."

 "재앙과 경사는 착한 일이나 악한 일을 쌓는 데에 따라서 생기는 법이다."

하였다. 여러 군자들은 스스로의 몸을 수양하는 것을 근본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운명에는 이미 정해진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란 사람의 운명을 옮기고 바꿀 수가 없게 정해진 것이고, 아직 정해지지 않은 운명이란 변화무쌍한 세상의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등통(鄧通)은 굶어 죽을 얼굴을 가졌기 때문에 문제(文帝)가 구리산[銅山] 을 주어서 부자가 되었지만 끝내는 절식해야 하는 병이 들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 곽박(郭璞)은 흉기를 맞아 죽을 액운이 있어서 칙신(칙神)에게 빌며 애원하여도 왕돈(王敦)의 해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또 요주(饒州)에 사는 가난한 선비는 많은 종이와 먹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일이 일어나 요주에 있는 천복비(薦福碑)를 깨쳐버렸고, 위공(魏公)에게 온 홀아비 손님은 그를 모실 여인을 허락까지 받았건만 성레(成禮)를 올리기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나라의 왕비라면 궁중에만 있기 때문에 짐승으로부터 피해를 입을 걱정이 없건만, 고려 때 범의 발톱에 할퀴어 죽은 왕비가 있다.

 나라의 왕자라면 고량진미(膏梁珍味)라도 마다할 처지니 의원이나 약이 그리울 것이 없건만, 우리나라의 광평대군(廣平大君)은 목구멍이 막혀 절명하고 말았다.

 이런 것들은 이미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지혜와 힘으로는 일을 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아, 무식한 세상 사람들은 부처에게 아부하여 액운을 피하려 하며, 혹은 귀신에게 기원하여 더러는 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헛되게 자기에게 정해진 운명 밖의 일을 가지고 쓸데없이 수고롭고 혼란하게 정신만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덕과 의리를 향해서 한결같이 천명에만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洪萬宗의 <旬五志>에서)  

 

洪萬宗(1643~1725)

인조 21년 영천군수인 世柱의 아들로 태어남. 숙종 원년에 진사시에 합격, 부사정, 참봉을 지냄. 허견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됨. 역사, 지리, 가요, 시 등 연구에 전념하였고 시평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81세로 세상을 떠남. 저서로 <역대총목> <시화총림> <소화시평> <명엽지해> <순오지> 등이 있음. <순오지>는 인조 25년인 1647년에 서호에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15일에 걸려 이를 완성했기 때문에 이 책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 순오지의 내용은 주로 유,불,선, 3교에 대한 매우 해박한 논설이 많고 또한 문장론을 합치고 여기에다 재치있는 해학까지 곁들여 편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