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호롱불의 추억

如岡園 2011. 10. 9. 12:13

 등불은 불을 켜 어두운 곳을 밝히는 불의 총칭으로 그 열원(熱源)이나 도구에 따라 횃불, 화톳불, 관솔불, 등잔불, 촛불, 남포등불, 가스등불, 호롱불, 전등불 등의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편리하기로야 전등불을 따라잡을 만한 것이 없겠지만 전등불이 있기 이전이나 그 은전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생을 살았던 사람에게 있어 등잔불은 남다른 정신적 의미까지 곁들여진다. 따라서 등불은 일차적으로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도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일깨우는 매체이기도 하다.

 촛불은 화톳불과는 달리 신앙적 의미가 강한 불이고, 칸데라불이라고도 불리었던 가스등불은 전깃불처럼 밝기는 했지만 냄새도 고약하고 폭발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어서 싫으며, 접싯불은 동식물의 기름을 연료로 한 원시적인 등잔불이라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판이니, 전깃불이 보편화되기 이전까지 조명을 얻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켜지는 대표적인 등불이 석유를 연료로 하는 남포등이나 호롱불이었을 것이다.

 등불을 켜는 기구가 등잔이라면 등잔은 동식물성 기름이나 석유를 연료로 등불을 켜는 그릇인데 등잔의 재료로는 사기, 백자, 대리석, 백동, 놋쇠, 철 등이 쓰이고 심지는 솜, 한지, 노끈 등이 쓰인다. 심지가 두 개인 것을 '쌍심지'라 하는데, 어떤 일에 눈알을 부릅뜨고 밝히는 꼴을 두고 '두 눈에 쌍심지를 켠다'는 속담이 생겨난 것을 보면, 그것도 꽤나 밝은 조명이었던가 보다.

 호롱불은 동식물성의 기름을 연료로 하는 접싯불이 아니라, 석유를 연료로 하는 비교적 근세의 등불이다. 등잔의 여러 재료 중 사기로 되어 있어 서민적 친근감이 감돌 뿐 아니라 그 모양이 한결 정겹다. 남포등불보다 기름이 덜 닳는 것도 가난한 서민에게는 제격이지만 그 태고적인 소박미에 은근한 운치가 흐르고 그윽한 정취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안온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따사롭다. 남포불빛이나 촛불보다 밝지도 못하고 바람 앞에 등불이라 꺼지기는 잘할지라도 오순도순 도란도란 옛날이야기가 있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한 호롱불 가의 향수가 있어 좋다.

 호롱불을 켜던 그 시절 농촌 사람들이야 얼마나 가난하고 헐벗고 배고팠던 것인가. 꼭이 호롱불과 직접 관계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세월 나의 유년시절, 나는 일생을 통하여 잊을 수 없는 한 소박한 인물을 기억하고 살아간다.

 본명이 있었겠지만 통칭하여 '제 참봉'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성이 제씨(諸氏)이니 참봉(參奉)이란 벼슬을 한 사람이란 뜻이라 '참봉어른' 쯤으로 불러야 되는데 그냥 제 참봉이다. 조부님의 설명에 따르면 산 너머 동네 박씨 문중의 문서에 얹힌 종이었는데 돈으로 면천을 하고 참봉을 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조부께서는 그 사람을 조금도 천시하는 기색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존경까지는 아닐지라도 모범적인 농군에다 침술에 능한 반 의원쯤으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제 참봉은 동네에서 몇째로 논밭이 많은 부자이고 침을 놓는 재주까지 있어 감히 남이 입질을 못할 만큼 기반이 든든했는데, 이것이 순전히 그의 부지런함과 정성스러움과 겸손한 인간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종의 신분으로 돈을 모아 면천을 하고 벼슬까지 샀으니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조선조 후기 신분 계급사회에서 얼마나 천대를 받고 한이 맺혔으면 허명에 지나지 않는 참봉을 돈을 주고 샀겠는가. 그리고 또 돈을 받고 판 사람은 그 누구인가. 나는 자라 세상을 알면서부터 마음속으로 그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다. 나보다 48세가 많은 조부님보다 두어살 연배이니 1세기 전 사람이다. 

 나의 유년시절 그는 나의 주치의였다. 배가 아파도 감기가 들어도 연락만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는 달려왔다. 치료법이란 게, "어라 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엄지와 인지 사이를 벌리고 사관(四關) 한 대를 꾹! 그 더득장아찌 같은 손으로 나의 어린 손을 어루만져 주면서 어머니에게, "아주까리기름 한 숟갈 먹이고 잠을 푹 재우시오."였다. 아파서 울음소리를 터뜨릴 때쯤이 되면 그는 이미 우리 집을 떠난 뒤였고 신통하게도 병은 나았다. 보수를 받고 침을 놓았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제 참봉은 참으로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농군이다. 비료가 없던 시절이지만 그의 논의 벼는 항상 거름기로 무성하다. 동네에 개들을 방사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개똥이 없었다. 이른 새벽 제 참봉이 논밭을 둘러보러 가면서 개똥망태에 담아 가니 개똥이 있을 수가 없다. 제 참봉의 별명은 그래서 개똥망태였다.

 그 제 참봉의 집 아래 채 후미진 골방에서 맏형뻘 되는 동네 청년들이 '이수일과 심순애'의 연극을 할 때도 조명은 호롱불이었지. 사랑 놀음이라 금기시했던 것을 숨어서 보면서 동네 호롱불이란 호롱불은 모두 모아온 듯했지만 얼마나 밝았을까 몰라.

 시험을 앞둔 고등학교 시절 나의 호롱불은 코카콜라병에 심지를 박은 신식조제 호롱불이었지. 지쳐 쓸어져 잠든 사이 그것이 넘어졌는데 숨이 답답하여 잠을 깨보니 불은 나지 않았지만 넘어진 채로 심지에 불이 붙어 있어 온 방안에 그을음의 작은 입자로 가득찬 현실. 방바닥을 손으로 쓸었더니 검은 가루가 새까맣게 묻어났다. 폐 속에 그 검은 입자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몰라.

 내게 있어 호롱불은 20대 중반까지 불을 밝혀 준 고마운 존재였다. 개인 생활이 엄격히 제한된 병영생활 공군 부대 막사였다. 소등 나팔이 불면 일체의 실내조명이 금지된 내무반, 그래도 주경야독이 아닌 주근야독을 장려해 개인 관물함에 머리를 쳐박고 호롱불을 밝혀 독서하는 것을 권장하는 아량은 있었다. 휘황찬란한 전등불 밑에서 생활하던 그 시절 나는 호롱불의 고마움을 새삼 깨달은 시절이었다. 제트 엔진 부속으로 쓰이는 피스를 코카콜라 병뚜껑에 조립한 자작 호롱불에 JP4 항공기 연료로 쓰는 기름으로 불을 밝힌 호롱불 밑에서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리나, 토마스 하디의 테스, 솔제니친의 이반제니소비치의 하루, 보리스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닥치는대로 읽었고 독서노트며 일기며 편지들을 마구 써댔지.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 되어 버린 호롱불, 그것은 단순히 어둠을 밝혀 주는 불빛이 아니라 내 영혼의 등불이다. 등불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과도 같다고 하였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등불을 이렇게 말하였다.

 " 그 불빛 하나하나는 그 암흑의 대양 안에 기적을 일러 주는 것이었다. 이 가정에서는 책을 읽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끝없는 속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또 저 가정에서는 공간을 탐색할 생각을 하고 안드로메다 성운에 관한 계산에 골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기서는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광야에서 이따금씩 비치는 이 불빛들은 양식을 달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시인의 불빛, 교사의 불빛, 목수의 불빛 같은 가장 미천한 불빛까지도 양식을 달라고 하였다. 이 살아 있는 별들 중에 닫힌 창문이 얼마나 많았으며 꺼진 별과 잠든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서로 만날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들판 여기저기에 흩어져 타고 있는 이 불들 중의 몇몇하고 통신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등불은 길을 밝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으로 간주된다. 인류는 불을 발견, 이용하면서 불에 의지하고 어둠을 밝혀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확실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비가 불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학문에 전념함을 의미하였고 불경에서는 등불을 미망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으로 묘사하였다. 어둠을 밝히는 빛의 원천인 등불은 광명을 상징하며 여기서 얻은 심리적 안정감은 위안을 상징한다. 여러 가지 등불 중 호롱불은 그 소박한 맛에 은근한 운치가 흐르고 고요한 성격을 조금도 상하지 않을 뿐더러 그윽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제 호롱불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그 정겨운 이름마저 아는 어린이나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사전이 알려 주지나 않을까 하여 들쳐보았더니 석유등의 석유를 담는 그릇이 호롱이고 그러한 호롱에 켠 불을 호롱불이라 하였다. 촛불시위를 밥먹듯이 해대는 세상이라 호롱불 같은 등불을 시위의 도구로 생각할까 봐 가슴이 조인다. 어느 암자에 갔더니 호롱불의 모형을 수백  개나 탑처럼 진열하여 전깃불로 불꽃을 장식한 것을 보고 경악한 일도 있다.

 호롱불의 기능을 전깃불로 대신하고 있으니 호롱불의 존재를 망각한 듯하면서도 조명등을 파는 상가의 전기스탠드를 이모저모 뜯어보는 내 심상에 호롱불의 향수가 깔려 있음을 느끼곤 한다.

 마침, 내 작은 서재 서가엔 심지까지 박혀 있는 호롱 두 개가 있어 금방이라도 석유를 부어 불을 붙이면 호롱불을 밝힐 수가 있다. 관광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모양이 반듯한 새것이 아니라 손때가 묻고 오랜 세월에 불꽃의 그을음이 묻은 골동품이어서 호롱불을 추억하는 촉매구실을 단단히 하고 있다. 손때 묻은 전통의 생활 도구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여 이것저것 모아 두었던 것인데 형체가 큰 것은 이사를 다니면서 부담이 되어 모두 내어다 버리고 몇 십 점 남겨 둔 것 중의 하나가 이 호롱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활도구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으랴.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농기구가 필요했을 것이고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아낙에게는 그에 따른 음식 조리기구가 있었을 것이며 글 읽는 서생에게는 등불이며 여러 문방도구가 필요했으니, 그런 도구들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보듬어 안아야 할 정신적 그 무엇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 호롱이란 기구는 얼마나 근사한 물건이냐. 이름부터가 '호롱'이라면 가히 도자기 급이다. 등불을 담은 종다래끼를 총칭하여 등롱(燈籠), 촛불을 담았다고 초롱(燭籠)이라 했던 것처럼 호롱은 항아리 모양의 등불기구라는 뜻의 '壺籠'의 음역일 것이다. 백토를 빚어서 구워 만든 매끄럽고 단단한 항아리[壺] 모양의 이 사기그릇은 석유를 담아 불을 붙이는 기구이니 우선 안정감이 있어야 하고 별다른 멋을 부릴 필요는 없지만 보기가 싫어서도 안된다. 밑면이 넓게 평평하고 주둥이 부분으로 갈수록 외양이 수그러들었으며 손잡이가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壺[항아리]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다가 뚜껑 부위에 해당하는 곳은 심지를 박을 수 있는 구멍이 있어 기능성까지 갖추고 있으니 그 모습이 아름답다 아니 할 수 없다. 가장 기능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가 생활도구에 더 적중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는 쓸 곳이 없어 버려지고 만 운명의 호롱불, 전등이 켜짐에 따라 기름등잔불이나 석유호롱불을 켠 집은 가난을 상징하기도 했던 그 추억의 호롱불은 지워버리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우리들 삶의 발자취이다. 

                                                                           

                                                                             (동인지<길>12호. 2011. 7. 30.  김  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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