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A(창작수필)

진달래꽃 연서(戀書)

如岡園 2011. 12. 1. 21:08

"붉디붉은 바위 끝에/

 잡고 온 암소 놓아 두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 한다면/

 저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신라 성덕왕대에 가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순정공이 바닷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병풍처럼 험한 바위 절벽이 둘려 있고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 척촉(철쭉)이 만발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꽃을 꺾어 달라고 했지만 모두들 못하겠다고 하는데 소를 몰고 지나가던 늙은이가 꽃을 꺾어 오고서 바친 노래가 서두의 노래인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신라의 향가 <헌화가>이다.

 

 척촉은 철쭉이고 진달래는 식물학상 철쭉과에 속하는 꽃이니 수로부인이 꺾어 달라고 했던 꽃은 참꽃이라고도 하는 진달래꽃이다.

 이렇게 진달래는 신라 때의 노래 향가에 담겨진 꽃이니 오래 전부터 사랑받아 왔던 꽃임이 분명하다.

 따사로운 봄기운이 퍼져가는 3,4월! 어느 결에 개나리가 집둘레의 울타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을라치면 앞뒤 동산 원근 산곡 벼랑 끝에 붉디붉은 진달래는 지천으로 피어난다.

 진달래는 가히 먼 옛날로부터 우리 민족의 삶에 가까이 있어 왔고, 그만큼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겨레의 꽃이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연분홍 치마가 진달래 꽃빛이고, 초동(樵童)의 나무 지게 위에 그 가녀린 진달래꽃은 얹혀 봄을 불러왔다. 북으로 백두산 남으로 한라산 태백산 지리산 그런 태산 준령이 아니래도 진달래는 원근 산야에 만산홍엽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이런 시가 유명해진 것도 진달래꽃을 읊음으로 해서 인지도 모른다.

 진달래를 일명 두견화(杜鵑花)라고 하고 소쩍새를 두견새라고 하는데 두견화와 두견새에 얽힌 전설은 진달래꽃을 더욱 의미심장한 꽃으로 만들고 있다.

 촉나라의 망제(望帝)는 이름을 두우(杜宇)라고 했는데 위나라에 패망한 후 도망하여 복위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새가 되었는데 이 새가 두견새이며 망제의 넋이 씌워졌다고 한다.

 진달래가 만발해 산곡이 붉은 빛으로 물들면 두견새가 더욱 구슬피 울부짖음으로 붉게 핀 진달래는 망제가 토한 핏자국이며 이름하여 두견화라 했다는 것이다.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고 철쭉을 개꽃이라 하여 같은 과의 꽃이었으면서도 진달래를 상위에 두었던 것은 그 청순함과 식용성에 기인했을 것이다. 

 진달래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피는 꽃이다. 평지를 버리고 사람이 쉬 접근하기 힘든 층암절벽 장송(長松)이 우거진 그늘에서 더욱 광채로운 빛을 발하여 친근감과 탈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누구나 시골의 고향을 생각할 때 흔히 마을의 동산에 핀 진달래를 함께 떠올리게 되는 그리움의 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하는 동요가 그렇게 사랑받는 국민의 노래가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진달래는 겨울을 이기는 재생의 꽃이면서 봄을 전해 주는 봄의 전령으로 상징되는 시정(詩情)어린 꽃이다.

 진달래는 척박하거나 기름지지 못한 땅에서도 곧잘 번식하는 낙엽관목으로, 찬란함 향기로움 생명력을 상징한다. 나뭇가지에 봄물이 오르기 시작할 때면 산이란 산의 기슭과 골짜기 산허리 벼랑끝을 뒤덮다시피 피는 진달래의 무더기무더기는 어둡고 황량했던 겨울을 떨치고 일어서는 벅찬 생명의 환희이다. 

 삼라만상은 제각기 자기가 설 자리,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처해야 제구실을 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진달래꽃 역시 그 격에 맞는 자리에 서 있을 때라야만 더욱 아름답고 사랑받을 수 있다. 수로부인이 갖고 싶어했던 진달래꽃은 바닷가 하늘에 맞닿은 높이 천 길이나 되는 병풍 같은 석벽의 언덕 위에 있었고, 사람의 손길이 쉬이 닿을 수 없었기에 더욱 가지고 싶었고 그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진달래꽃에 대한 아름다움의 통념은 아무래도 오래고 원시적이며 인적이 드문 산곡의 층암절벽에 낙락장송과 어우러져야만 제격이다. 만산홍엽 아닌 붉은 진달래꽃으로 칠갑이 된 진달래꽃 천지는 그것으로 일종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은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국가체제의 붉은 깃발의 홍수나 어느 시기 또 어떤 정치집단의 노란색 혹은 푸른 색깔의 물결을 대한 듯하여 식상하다.

 지난 4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 옛 직장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케이블카로 서울 남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산정 가까이 인적이 차단된 바위 틈에 노송과 어우러져 피어 있는 진달래꽃은 일품이었다. 남산 위의 소나무가 철갑을 두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해묵은 소나무는 있었고, 그런 소나무와 바위와 진달래가 어우러진 풍경은 천만의 인구가 들끓는 도심이어서 더 값지고 보배스러웠다.

 

 진달래꽃에 대한 나의 애정과 관심은 이미 아득한 유년 시절부터 자리잡힌 바이지만, 나는 근래에 이런 진달래꽃과 별스런 관계를 맺어 이 진달래 꽃나무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일에 부대끼다 보면 그저 그 꽃이거니 하다가도 또 어떤 계기가 있어 그것과 부딪치다 보면 새삼 어떤 관계 속으로 빠져드는가 보았다. 어떤 인연으로 내가 경작하게 된 농장의 산골물이 흐르는 골짜기 언덕배기에 백 년은 훨씬 넘었을 법한 준수한 진달래 한 그루가 있었다. 역시 그만한 나이로 같이 살아왔을 두 그루의 소나무 아래, 좀 푸석한 바윗돌이기는 하지만 제법 그럴싸한 암벽을 이룬 언덕에 자리잡고 뿌리를 내려 풍성한 가지를 펼친 이 진달래는 4월이면 풍성한 꽃을 피워 가히 작은 무릉도원을 떠올리게 해 쾌재를 올리곤 했다. 그야말로 노송과 진달래꽃과 바위언덕과 계곡물의 4박자가 어우러져 속된 말로 '딱'이었다. 흰쌀밥과도 같은 꽃을 피우는 주변의 조팝나무의 흰색 꽃과 배색이 이루어지면 별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애주중지하던 이 진달래가 수난을 겪게 된것이다. 그냥 수난 정도의 시련이 아니라 사망신고 직전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난해  추석 전날 저녁 때의 폭우로 계곡물이 범람하여 농장 둑을 허물었던 탓에 계곡을 정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진달래 꽃나무는 송두리째 파헤쳐져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작업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 진달래 꽃나무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폭우에 대비한 물길을 트는 일이니 경치를 보려고 큰일을 그릇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옮겨 심으면 안 되느냐 싶기도 하지만 그 뿌리가 워낙 두어 평이나 됨직한 넓이로 벼랑의 석괴(石塊) 표면에 얕게 퍼져 있어 이식할 나무의 뿌리를 보존하기도 어려워 포기를 하고 말았었다. 포클레인의 오목손으로 파헤쳐지고 짓이겨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진달래 꽃나무를 아쉬워하며 소리 없는 통곡을 할 지경이었다. 

 도랑물이 흐르는 산골짜기 작은 계곡은 시원하게 뚫렸지만 두 그루 장송 아래 꼭 서 있어야 할 진달래는 없어져버렸다. 따라서 내가 애지중지하던 계곡의 풍경도 화룡점정이 못되었다.

 사체가 되어버린 진달래 꽃나무는 일주일이나 넘게 그대로 방치되었다. 하도 아쉬워 인근 산기슭에서 나이 어린 다른 진달래 꽃나무를 옮겨 왔지만 속이 차지 않았다. 죽은 자식 뭐 만진다는 심정으로 산산조각이 난 진달래의 잔해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파헤쳐진 벼랑에서 진달래 꽃나무의 부활 흔적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본 둥치가 됨직한 직경 이십 센티미터에 가까운 줄기를 찾아 밑뿌리를 살폈더니 실뿌리 몇 가닥이 근근이 붙어 있었지만 그렇게도 장대한 진달래 꽃나무를 재생시킬 가망은 없어 보였다.

 계절은 11월, 낙엽 교목은 잎을 떨어버리고 휴면기에 접어들었으니 나무 이식의 적기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진달래꽃을 꺾어 화병에 꽂아 두던 환영이 진달래꽃에 대한 연정을 부채질하여 이 사체나 다름이 없는 만신창이가 된 진달래의 본줄기를 옮겨 심어보기로 작정을 하였다.

 구덩이를 깊이 파 그 진달래가 자리하고 있던 곳의 흙을 최대한으로 긁어모아 밑자리에 깔아 다져 심고, 제대로 된 뿌리도 없이 옮겨 심은 나무가 추운 겨울은 어찌 견디랴 싶어 볏짚으로 뿌리짬에 보온을 하고 새끼를 꼬아 줄기와 가지를 휘감아 주었다. 

 마지막 잎사귀 서너 떨기가 아직까지 줄기의 원기로 살아 있었으니 그것이 이 옮겨 심은 진달래의 생명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진달래를 바라보고 제발 살아나 그 청순한 꽃잎을 내게 보여 주기를 기대했다. 나무를 애호하고 분재를 전문하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도 있었지만 나는 미련하나마 내 나름의 생명력에 대한 신념으로 진달래를 관찰하고 일구월심으로 키워갔다.

 

 삼라만상이 새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봄이 왔다. 언 땅이 녹고 나무줄기에 물이 오르면서 가지 끝에 움이 돋았다. 나의 이 진달래도 움이 돋아나는 듯하다. 사실 모든 낙엽활엽수의 새 움은 봄에 돋는 것이 아니라 낙엽이 지면서 돋아나기 시작하여 꽃이나 잎을 피우기 위한 진행형에 있는 것이다. 그 진행의 과정을 나는 이 옮겨 심은 진달래에 겨냥하여 삼동을 살펴온 것이다.

 우수 경칩을 지나고 춘분에 들어서면서 꽃의 움이 커지는 조짐이 확연히 보였지만 진달래가 완전히 살아 있다는 속단은 금물이다. 꽃을 꺾어 화병에 꽂아 두고서도 상당 기간 꽃을 완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워낙 큰 둥치의 잔존 생명력의 여력이 아닐까 하면서도 살아 있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지켜보았다.

 다른 산속의 진달래가 꽃망울을 부풀려 가는 단계와 비교해 가면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농장을 드나들며 이 진달래 꽃나무를 주시했는데 꽃망울이 커가는 속도가 조금 뒤지긴 했어도 꽃을 피울 조짐이 분명하였다.

 그러던 것이, 4월 상순의 어느 날 다른 산속의 진달래와 함께 꽃을 피웠다. 살아 있다는 확신을 다짐해 주는 그 환희로운 개화!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기쁨에 젖어 혼자 환호했다. 서울 남산 노송 아래 바위 틈의 수십 년 해묵은 진달래를 대견스러워 했던 것도 나의 이 진달래의 개화에 대한 축복이 마음에 도사려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고도 안심이 덜 되었다. 잎이 피기 전의 봄꽃은 뿌리로부터의 수분 공급 없이 가지의 생명력으로도 쉬 꽃을 피운다. 부지깽이를 거꾸로 꽂아도 움이 튼다는 청명 한식의 계절이고 보면 나의 이 진달래가 언제까지 생명을 지속할는지는 의문이었다. 꽃이 지고 잎이 돋아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어쨌던 이 진달래는 꽃의 장막으로 드리워진 4월이 저물고 신록의 계절 5월이 되어서는 잎까지 돋아 나와 몇 가닥 안 되는 뿌리를 통한 탄소동화작용으로 생명력을 완전 회복했다. 태반의 가지가 떨어져나가고 한 길 남짓한 크기로 초라한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백 년을 넘었을 역사와 양 손아귀가 벌도록 큰 묵은 밑동을 지닌 채 새 자리에 의연히 서 있다.

 

 청복(淸福)이 있는 사람이라야 능히 꽃을 사랑할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우수에 잠기고 비겁하고 인색한 사람은 이런 복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도 있지만 꽃도 꽃 나름이어서 실로 꽃처럼 많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자연물도 드물 것이다. 내가 이 진달래꽃에 애착하고 연서를 띄우는 사연은 실로 백 년을 넘어 살아왔을 그 장구한 역사를 기림에 있고, 노송과 바위와 물이 있는 공간과의 조화에 있었음이라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녹음이 짙어가는 6월, 비록 모습은 다른 관목들에 뒤섞여 빛을 잃었을지라도 뻐꾹새와 장끼와 산비둘기와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실로 관악 사중주를 연주하는 전원도시의 한 변죽 산곡에서, 천 년을 넘어 겨레와 더불어 생명을 같이 해 온 이 진달래의 재생은 다름 아닌 우리의 존재를 재인식시키는 표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개가 무량하였다.          (2011. 7. 수필동인지 <길>제12호. 김재환)               

'여강의 글A(창작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닭들의 집단무의식  (0) 2012.08.22
사슴과 나무꾼 이야기  (0) 2012.07.01
호롱불의 추억  (0) 2011.10.09
고향을 사랑하는가  (0) 2011.08.10
우리집의 고양이 가족  (0) 201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