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더니 사슴은 구명에 대한 보답으로 나무꾼의 후손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 또는 부자가 되게 하였다, 혹은 선녀와 혼인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이런 유의 설화를 우리는 '사슴과 나무꾼' 또는 '나무꾼과 선녀' 설화라 한다.
이 같은 나무꾼과 선녀 설화는 여러 설화집에서 조사 보고된 자료만 하더라도 백여 편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 설화는 '나무꾼과 선녀'라는 제목으로 한 때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이 설화의 존재 가치를 재인식시켜 준 자료이기도 하다.
1913년 정봉덕의 구연으로 정인섭 선생에 의해 채록된 '선녀와 나무꾼'을 보면,
"금강산 기슭에 가난한 모자가 있어 아들이 나무를 해 생계를 이었다. 나무꾼은 어느 날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더니 사슴은 구명에 대한 보답으로 선녀와 혼인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나무꾼은 사슴이 일러 준대로 무지개 봉우리 사이의 8담에 8선녀가 하강하여 목욕할 때, 막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어 승천을 하지 못하게 하고 집으로 데려다 혼인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아이 넷을 낳기 전에는 날개옷을 돌려 주지 말라고 한, 사슴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마음씨 고운 나무꾼은 선녀의 청에 못 이겨 아이 셋을 낳았을 때 날개옷을 주었더니 선녀는 아이 둘을 양 팔에 끼고 또 하나는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승천하고 말았다. 나무꾼은 사슴의 재 신탁으로 목욕물을 길어 올리는 선녀의 두레박을 타고 승천하여 천상에서 처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효심이 남달랐던 나무꾼은 지상에 두고 온 어머니가 보고 싶어 선녀에게 부탁, 용마를 타고 하강하여 어머니를 만났는데, 어머니가 끓여주는 호박죽을 먹다가 타고 있는 용마 잔등에 엎질러 용마가 놀라 뛰는 바람에 나무꾼은 용마에서 떨어져 죽어 수탉이 되었다."
는 이야기이다.
이 설화의 핵심 모티프가 되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준 초부(樵夫)의 이야기는 고려 때 이제현의 <역옹패설>에서 찾을 수 있다.
"國初 徐神逸 郊居 有鹿帶箭奔投 神逸 拔其箭而匿之 獵者至不見而返 夢一神人謝曰 鹿吾子也 賴君不死 當令君之子孫世爲輔 神逸八十生子曰弼 弼生熙 熙生訥 果相繼爲太師內史令 配享廟庭" (역翁稗說 全集二)
(서신일이 들에서 일을 하는데 화살이 꽂힌 사슴이 뛰어 들어와, 화살을 뽑고 숨겨 주었더니 사냥꾼이 사슴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은혜로 죽지 않았으니 그대 자손이 대대로 벼슬 길에 오르게 하리라 하였다. 신일이 나이 80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필, 필의 아들이 희요, 희가 눌을 낳았는데 과연 신인의 말과 같이 태사가 되고 내사령이 되었으며 모두 고려 종묘에 배향되었다.)
서신일과 사슴의 이야기는 <세종실록> 지리지二. 전설4. 인물조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이니 상당한 근거가 있는 전설이다.
서신일은 신라 헌덕왕에서 효공왕 대까지 내리 벼슬하면서 6두품의 으뜸벼슬인 아간에 이르렀는데 만년에 고향인 경기도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은일하니 세인들이 서처사라 칭하였다. 서신일은 우리나라 서씨의 시조이며, 그의 손자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고 강동육주(江東六州)를 개척한 외교의 달인이다.
필자는 만년에 경기도 이천에 이주해 와 살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서신일과 서희를 내세워 향토의 큰 자부심으로 삼고 있음을 놀라워하고 있던 차, 어떤 인연으로 서신일의 묘역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자리에 소일거리로 한 농장을 일구고 관리하게 되었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17호인 서신일의 묘역이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번지이고, 우리 농장의 위치는 같은 산촌리 2@@번지이니 서신일의 묘역과는 지호지간인데다가 서신일이 효양산 아래에 은일하여 살았다 하였으니 어쩌면 서신일이 일을 하다가 화살 맞은 사슴을 구해 준 그 들판이 바로 우리 농장일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농장 일대는 해발 200미터가 미처 못되는 야트막한 효양산 기슭에 자리하여 지금도 사슴은 아닐지라도 마록(馬鹿)이라고 하는 사슴과에 속하는 고라니와 살쾡이 같은 짐승들이 서식하는 환경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농장이 얼개가 잡혀가면서 사슴과 나무꾼의 상념을 좇아 농장 이름을 짓기로 작정을 하였다.
기왕의 연고가 있는 농장이라면, '徐神逸郊居有鹿帶箭奔投神逸拔其箭匿之'라 했으니 신일이 아닌 우리들은 초부(樵夫)가 제격이다 싶어 '神逸匿鹿'이 아닌 '樵夫匿鹿'을 주제로 삼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樵鹿農園'이라 이름 짓고 '사슴과 나무꾼'을 부제로 하였다.
농장 이름치고는 브랜드 가치가 높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게 뭐 영업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심심소일을 하자는 놀이터이고 보면 그런 것을 따질 일도 아니다.
그래도 농장 이름을 지었으니 간판 하나만은 내어다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궁리를 했다.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외양만은 번듯하게 하느라고 농장 간판을 달아맬 지지대를 생으로 된 통나무로 베어다 심고, 돈을 들일 만큼 들여 목각으로 조각을 하여 내어다 걸었더니 그 분위기가 사슴과 나무꾼이라는 주제에 어울린다 싶어 쾌재 하였다.
참, 이름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다. 함부로 붙여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이름을 붙였다 하면 이름값을 하여야 하는 의무 같은 것도 있게 마련이어서 속을 채우는 일에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처음 우리가 이 터전에 발을 부친 것은 그저 흙을 좋아해서 야채나 가꾸고 주말이나 가정에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아이들이나 몰려오면 좁은 아파트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좀 넓은 장소에서 불고기나 구워 먹고 캠핑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런 면에서 이 농장은 제격이었다.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지근의 거리에 있으면서 조용한 산기슭의 개활지, 양지 살 바른 밭 언덕 옆으로 산골 도랑물이 흐르고 주변은 원시 그대로의 나무 숲, 갖가지 날짐승 길짐승이 천연으로 서식하면서 사람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며 유유자적하고 있지 않은가.
목관악기를 두드리는 듯 둔탁하나 가볍고 빠르게 '다그르르!' 하는 소리는 새봄을 맞이하여 집을 짓는 딱따구리과의 작은 새가 나무를 쪼는 소리일 것이며, 풀숲에서 화들짝 푸드득! 하다가 껄껄 끼드덕! 하고 비명을 지르며 일직선으로 하늘로 치솟는 저 날짐승은 필시 까투리를 낚아채 일을 치르고 제풀에 놀란 장끼의 처신머리 없는 비상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 하얀 조팝나무 꽃이 제멋대로 어우러져 피었다가 지고, 숲이 신록으로 물들어지면 그 흐드러진 뻐꾹새의 울음에 섞여 휘파람새의 귀신 같은 울음소리, 청아 낭랑한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쯤이면, 또 올해도 신생의 고라니 새끼가 산골 도랑물 건너편 언덕배기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카시아 새순을 뜯을 것이다.
'사슴과 나무꾼'의 전설 속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펴자면, 그 신생의 고라니 새끼는 전설 속 사슴의 정령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슴을 지켜주는 나무꾼이고 싶어짐에 있어서이라 누가 무엇을 탓할 것인가.
우리들이 농원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수원도 양계장도 채소밭도 어느 것 하나 전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가 보니 전문성이 있을 수는 없다.
다만 마음의 풍요를 누리고 자족하는 여가 생활이 지선의 과제라는 데 매력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사치와 낭비일 수도 있고 감정의 유희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손이란, 사람의 마음이란 쓰기 나름이니, 바탕만 좋은 데 두고 있다면 나무랄 것도 못되는 것이 아닌가.
(수필 동인지 '길' 제13호. 201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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