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의 글B(논문·편글)

토끼전의 골계성과 현실 인식

如岡園 2012. 4. 21. 23:30

 토끼전은 전승되던 동물우화담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소설적 효과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물우화소설이다.

 한국의 동물우화로 수용된 <삼국사기> 속의 '龜兎說話'는

 "동해 용녀가 병을 얻어 토끼의 간을 얻고자 하였는데 용왕에게 자청하고 나선 거북이 육지에 나와 토끼를 유인하여 등에 업고 가다가 도중에서 사실을 말하였더니 토끼가 자기의 간을 바위 밑에 두고 왔으니 가지고 가자고 하여 다시 육지로 돌아왔는데, 육지에 이른 토끼는 숲으로 달아나며 거북이를 놀려댔다." 

는 것이지만 소설 '토끼전'은 이러한 동물우화의 요소를 다치지 않고 훌륭하게 소설로 변용하고 있다.

 

 동해 용녀가 병을 얻었다는 상황에 착안한 소설적 전개는 '용궁설화'까지 가미시켜 용궁이라는 가상왕국을 설정하고, 다시 용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린 근엄한 현실사회의 군주임을 표방한다.

 군왕의 존엄성마저 상실된 현실 인식은 왕의 병이 주색에 기인한 것으로 결구하고 있으며 의원의 병 처방이 장황하게 설명된다.

 토끼의 간을 구하러 가는 과정도, 대뜸 자라가 육지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사전에 어전회의가 열리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공적을 쌓기 위한 경쟁심까지 덧보태진다. 토끼를 확인할 자료로 화공을 불러 토끼의 화상이 그려지고 만조백관과 처자와의 이별 장면이 있다. 

 육지에 오른 토끼의 산천경개를 구경하는 가사조의 사설이 엮어지며 자라와 토끼의 대담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대담 속에 경솔한 인간의 오만이 있고, 상대편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해학적 언사가 있는가 하면, 존장의 겨룸이 있고, 토끼와 자라의 육지와 수부에서 살아가는 재미가 그려진다.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준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이라는 자라의 말 한마디에 덥석 자라의 등에 업혀가는 '龜兎說話'에 비하면 '토끼전'에서 자라가 토끼를 유인하는 과정은 용의주도하기 이를 데 없다. 別乾坤의 세계가 자라의 입을 빌려 묘사되고 육지에서 살아가는 토끼의 현실적 아픔을 찔러 기를 죽여놓아야 했던 것이다.

 토끼의 허욕을 충고하는 너구리의 등장도 소설적 전개과정에서 삽입된 부분이다. 토끼를 업은 자라가 수중 2,3리허에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용궁에 이르러 문무백관이 도열한 어전에서 용왕을 속이는 것으로 결구함으로써 소설적 통쾌감을 살렸다.

 

 전래의 동물우화를 소설로 변용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일조가 되었던 것은 동물우화라는 소재를 인간의 본성문제에만 국한시켜서 해석했던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현실, 나아가서는 사회제도에까지 확대시켜 생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동물의 외양이나 생활습성이 세세히 관찰되고, 그것을 인간사회의 한 단면에 결부시켜 의인화함으로써 다양한 인간사회의 현실문제를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전의 토끼를 통해서는 지나친 자신감, 우월감은 스스로 묘혈을 파는 자살행위이며, 현실과 괴리되는 환상에 빠져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헛된 욕심을 부리다가는 자기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우화 자체가 유형적인 인간행위를 예시하여 교훈적 명제를 훈시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러한 우화를 소설로 변용한 동물우화소설이 교훈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동물의 세계를 빙자한 구상적인 서술 속에 일정한 도덕적인 교훈을 표현하고, 인간사의 결점을 풍자하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동물우화소설은 우화라는 특이한 흥미를 통하여 인간 본성을 승화시키고, 행위 원리를 제시하여 인간사회에 잠재한 병소를 치유하고 있다는 데 큰 뜻이 있다.

 또 한편으로 토끼전은 유교적 지도이념하의 신분제를 거부하는 의식을 잘 부상시키고 있다. 생동하는 현실적 인물, 바꾸어 말하면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군주, 맹목적인 충성심에 사로잡힌 신하, 하층계급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토끼전은 그만큼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며 봉건사회의 완고한 유교적 이념을 거부하고 신분적 질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동물우화소설의 평민문학적 의지가 토끼전에 이르면 왕권까지도 희화화한다.

 지엄해야 할 용왕은 주색에 병든 골계적 인물로 전락되고 충신 자라와 문어는 자라탕과 술안주감이 될 수도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위엄과 충성심을 허무한 것으로 돌려버리는 의식의 저변에는 권위의식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 자아를 실현하려는 저항적 평민의 의지가 깔려 있다.

 토끼전에서, 주색으로 얻은 불치병으로 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충성을 강요하는 용왕은 권위의식으로 군림하던 지배층의 모순을 풍자한 것이고, 불안한 현실을 탈피하기 위하여 이상을 좇다가 죽음이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용궁에서 자학적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토끼는 서민을 압박하는 규범사회의 억압에서 해방의 의지를 표방한 서민층의 의식 구조를 풍자한 것이며, 충성을 자처하고 공명을 바라다가 토끼에게 되속아 스스로를 자조할 수밖에 없었던 자라는 맹목적 충성심에 자가도취된 신하의 허구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용왕을 속이고 별주부의 등에 올라 만경창파 큰 바다를 순식간에 건너 와서 육지에 내린 토끼는 개선장군을 방불케 한다.

 용왕을 속이고 꾀로써 살아난 토끼에게 쾌재를 보내는 것은, 주색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충성이라는 이념으로 합리화시키고 자신의 안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력하고 미천한 생명쯤은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권력자의 사악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토끼전에서 토끼는 제 분수도 모르고 호사한 생활을 꿈꾸는 간사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로서, 의뭉하면서도 충직한 자라의 성격에 대비하여 보면 사리에 대한 분간이 없고 경거망동한 인간의 전형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등장 인물의 인간성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봉건적 계율에 속박되어 규범에만 따르는 자라보다 훨씬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라의 부추김에 토끼가 자신이 썩 훌륭하다는 착각에서, 의욕에 찬 자신감에 사로잡힐 수 있었던 것도 현실을 사는 인간이기 때문에 빠져들 수 있는 오류이며, 자라가 八難을 들어 토끼의 아픈 곳을 찔렀을 때 갈등과 불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현실을 사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심성이다.

 고난의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안전을 추구하는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고 고차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꿈의 고장으로 가고 싶은 것은 현실적 인간의 이상이다. 그러한 이상이 무참히 짓밟혔음을 알았을 때 용왕을 속이고 탈출에 성공하는 것은 간사함이 아니라 지혜인 것이다.

 

 토끼전에서 토끼의 행위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자라에게 육지 살아가는 재미를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토끼이기도 하며, 고통과 원한 속에서 살아온 세상을 한탄하는 토끼가 되기도 한다. 자라의 꾐에 빠져 이상적인 꿈의 고장 용궁으로 떠나지만 꾐에 빠지는 요인은 자기 배반의 모순성에서 온다.

 용궁에서 탈출하여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토끼는 그렇게도 원한스럽던 세상을 다시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 아이러니를 빚는 것이다.

 토끼전은 작품 자체가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극적 아이러니의 연속이고, 토끼전의 주인공 토끼는 숙명의 아이러니(the irony of fate)의 희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토끼전에서 자라가 토끼에게 세상사는 재미를 묻자,

 "인간 재미를 말하고 보면 형이 재미가 나서 오줌을 졸졸 쌀 것이니 저 둥글넙적한 몸이 오줌에 빠져서 선유하느라고 헤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 아니 불상한가" 

한다든지, 토끼가 꾐에 빠져 자라 등에 오르려 할 즈음에 너구리 달첨지가 토끼에게 충고를 하자 토끼의 마음이 변할 것을 두려워한 자라가,

 "달첨지가 토선생 일에 대하야 꽃밭에 불지르려고 왜 저리 배를 앓노? 제 어디 실업날 똥떼어 먹을 놈이 다시 그일에 대하여 말할소냐"

라고 한 것은 비속한 뉘앙스에서 오는 해학이다.

 토끼전에서, 존경받아야 하는 용왕은 주색 때문에 오장육부가 마디마디 녹아나는 골계적 인물에 지나지 않고, 충성과 용맹을 자랑하는 신하인 문어와 자라는 자라탕과 술안주밖에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과장과 기롱으로 이어지는 토끼와 자라의 재담은 해학적 흥미의 연속이다. 자라에 대해 토끼가 세상사는 재미를 늘어놓는 것은 스스로의 환상에 취하고 허세를 부린 과장이기 때문에 우습고, 자라가 팔난을 들어 토끼의 오기를 분질러 놓았을 때 일순 허세가 무너지고 송편으로 목을 따고 접시물에 빠져 죽고 싶은 토끼가 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용왕이 득병하여 백약이 무효라 三豪傑을 초청하여 진맥하였더니 토끼의 간이 특효약이라 하여, 수궁 신하들 중 자라가 사명을 띠고 육지로 나가 토끼를 꾀었다. 너구리가 토끼에게 충고하였으나 별천지에서 벼슬이나 하면서 여생을 편히 살 꿈에 부풀어 있는 토끼는 자라를 따라 갔다. 수부에 이른 토끼는 그곳이 사지임을 깨닫고 꾀를 내어 용왕을 속여 육지로 되돌아와 자라에게 망신만 주고 도망쳤다'

는 내용으로 정리되는 토끼전은 봉건적 지배체제에서 억압된 울분과 저항의 숙명밖에 지닐 수 없었던 서민의식을 성공적으로 풍자했다 할 것이다.

                                                                        (도서출판 박이정, 金在煥 著 <寓話小說의 世界>에서 발췌)